속죄와 보속
우리 모두 속죄와 보속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의문을 갖곤 합니다. 또한 우리는 지상의 삶에서 속죄와 보속을 하지 못한 죄에 대해 주님의 자비를 통해 정화를 할 수 있는 선택이 주어진 것이 연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상의 삶 안에서 보속과 회개를 하도록 부르십니다. 지상의 삶이 끝나 연옥에서 정화를 하여야 하는 그것은 이 곳에서의 것과 매우 다른 단계입니다.
어제 우리가 묵상하며 나누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영혼에 영향을 주며 그로써 우리의 영혼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 지상의 삶을 마치고 육체를 떠났을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그 영혼으로 되어집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보속을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통해 우리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기회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으면 하느님의 평화 안에 머물게 된다 하더라도 또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잠벌(일시적인 벌)을 받아야합니다.
왜 일시적인 벌을 받아야 할까요? 우리의 죄는 속죄하고 기워갚아야 (보속)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람들이 매우 여려운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낙태를 했다고 합시다. 그것을 어떻게 기워갚을 수 있을까요? 아기를 도로 데려올 수 없지요.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는데 그 사람이 죽었거나 돈을 훔쳤는데 어떤 이유로든 갚을 능력이 없다든지…등등 우리가 많은 잘못된 일을 하였을때 우리는 즉시 우리가 원하는대로 그것을 원상복귀할 수가 없습니다.
보속은 뉘우침의 인식을 갖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진정한 속죄는 진정한 뉘우침입니다. 단지 고백성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몇분만에 고백성사를 끝내버리고 말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하느님과 화해를 이끄시는 성령을 통해 고백성사를 보게 될 때 그 화해는 자신과 이웃과의 화해를 포함하는 것이어야합니다. 즉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뿐만 아니라 공정하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이해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이웃과 자신의 영혼을 상하게 하였으며 얼마나 자신의 영혼이 옳은 길에서 벗어났었는지를 죄의식을 갖지 않도록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이 속죄와 보속의 싸인입니다. 그것을 하느님의 자비안에서 용서와 은총을 통하여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로 인한 벌이나 마지막 심판과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잘못된 이유로 그것을 하게 되면 자신 안에 죄의식을 보상하려 하며 진정한 보속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좀더 명확하게 말씀드리죠. 여러분이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고 고백성사를 보고 뉘우치고 성체로서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하게되면 하느님 안에서 깊어지고 자신의 삶 안에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잘못된 이유로 하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보호와 유익만을 위한 것일 수 있으며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한 것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카톨릭신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고 유익을 얻기 위해 많이 하는 방법인데 그것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속죄와 보속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사랑에 대한 계약 의 빚(debt) 을 이해해야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결혼한 남자가 아내를 잃게 될 것이 두려워 충실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충실한 것과 같습니다. 그와같이 조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하나됨을 말합니다. 진실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속은 그와 같은 것을 이해할 때 시작됩니다. 우리가 선해져야 하고 잘못을 고쳐야함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으로 부터 나와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낙태의 죄를 지었다고 합시다. 그 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면 하느님은 그것을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동정을 이해하는 시작점입니다. 그러고 나서 여러분이 삶 안에서 그 죄를 고치고 속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삶의 목적을 생명의 은총을 위해 싸우는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마다 처음 하는 일이 하느님께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낙태한 아이에게 생명을 주신 것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또한 낙태의 위험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합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낙태반대운동에 참여합니까? 그들 모두가 낙태의 경험이 있는것은 아닙니다만 그 가운데 낙태의 경험이 있으나 훌륭한 리이더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생명에 대한 덕을 수호하는 사도가 되기를 원하며 낙태죄 와 맞서 싸웁니다. 사람들에게 낙태는 잘못된 것이고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드려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의 속죄의 행위는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물건을 훔침으로서 다른사람을 상하게 하였으나 “정직성”과 관련된 덕을 증거하며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면 자신의 죄를 보속하는 커다란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가져오고 그러한 덕을 수호하는 것이 모든 지향과 목표가 됨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정말 빨리 속죄하고 보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를 고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나 체험을 통해 하게 되어 더욱 큰힘을 갖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이나 여러가지 영적 훈련, 종교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려고 노력합니다만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집으로 가기위해 받아들여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잘못한 행위를 지금 이곳에서 보상하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끌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했던 모든 잘못된 행위와 우리가 깨뜨린 약속을 갚기 위하여 놀라운 사도들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속죄이고 보속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으로 부터 나오는 행동을합니다. 예를 들어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자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자세히 보면 그러한 자선이 세금을 공제받기 위한 것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선을 행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자선은 아니게 될 수 있습니다. 정부에 낼 돈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것이고 외향으로는 좋아 보입니다. 천만불을 버는 사람이 세금을 낼 돈 백만불을 자선합니다. 그러나 근사하게 보이는 그 자선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개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행위로 도움을 받는 이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이 하느님의 대전에 나아갔을때 그런 잘못된 이유로 했던 자선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던 시절 저는 캘리포니아의 여러 자선단체에 속해 있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로부터 매년 저는 많은 돈을 모금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었습니다. 저는 대죄중의 삶을 살면서도 그런 행위로 인해 제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느님의 자비로 회개의 삶으로 돌아온 후 제가 그것을 사랑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일종의 허영심 혹은 허세등을 가지고 제자신을 위해 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선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보여줄 것이 없는 행위였습니다. 사랑이 없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자선을 하고 사람들을 도와 줍니다. 자신의 구좌에 그 기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계속 그 것을 상기 시킵니다. “내가 한 그거 기억해?” 그와 같은 일이 남편과 아내, 부모자식, 친구사이, 더욱 최악은 교회내에서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속죄와 보속의 은총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올바르게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속죄와 보속을 해야하는지 모릅니다. 정말로 빨리, 아주 빨리 모든 것이 끝나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보속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실수 입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예상치 않은 때에 우리는 죽지 않습니까?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바로 우리의 어깨에 죽음의 선고를 받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신대로 하늘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삶을 뚫고 다음의 삶으로 가는것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제가 대단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의 구원을 진심으로 ,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기 때문임을 믿어 주십시오. 여러분을 집으로 데려가는 일이 저에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구원을 위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너희들의 친구가 너를 죄로 이끈다면 그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확신하여라.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면 결코 너를 죄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짓도록 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합리화합니다. 우리가 서로 죄를 짓게 만든다면 그것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서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매우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볼수있도록 준비하여라. 너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빨리 나를 볼 것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나이가 얼마이든 지난날을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지금 나이가 들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한 순간 같습니다. 되돌아 보면 환상같기도 하고 꿈같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관으로 들어가기 까지 얼마나 걸릴지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관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고있는데 자신은 옆에 서서 “나야 ! 나 여기 있어.” (웃음) 하는데도 그들은 자신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자신이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거의 하지 않지요.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여러분이 “우리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한다면 사람들이 여러분을 죽이려 들겠지요. “닥쳐! 말하고 싶지 않아!” (웃음) …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준비하여야합니다. 아마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래…하루를 망쳐 놓는구만..” 하며 계속 꿈을 꿉니다.
문제는 너무도 많은 영혼이 준비되지 않은 채 마지막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최악은 여러분이 죽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해”하던 말들이 여러분의 귓전에서 계속 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늦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속죄와 보속을 묵상하면서, 그 신비의 첫번째는 ‘나의 행위가 심각한 결과는 낳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깊이 들여다 볼 때 고통을 참기 어려우면 우리는 거기서 멈추려합니다. 더이상 들여다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버지로서 제가 저희 아이들에게 했던 매우 많은 잘못에 대한 고통을 느낍니다. 저희 아이들은 이미 38세 40세인데 그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제가 좀더 잘했더라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뿐이지 그것을 고칠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한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하지만 지나간 것들은 되돌릴 수가 없으므로 마음이 아플뿐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그에 대한 죄의식을 느낄 때 제 자신을 단죄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우리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단죄하지 말아야한다고 가르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죄의식은 분명한 단죄입니다. 그러므로 죄의식을 갖는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속은 우리 행위의 참 결과에 대한 것이라는 신비를 이해함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잘못한 행위의 결과에 대한 중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기워갚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그 결과에 대해 정당한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고칩니까? 여러분이 그 행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을 고치지(보속) 못합니다.
전대사를 아시지요? 여러분은 경주를 하듯 전대사를 얻으러 교회로 달려갑니다.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완전한 통회가 필요합니다. 완전한 통회란 여러분이 진정으로, 진정으로 무릎꿇고 온몸과 온 마음으로 죄를 끊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다시 짓는다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하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백성사를 보러 갈때 죄는 죽음이고 삶가운데 가장 끔찍한 일이라는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죄를 다시 짓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주님께 말씀드려야합니다. 그렇게 완전한 통회의 행위를 하고 나서 전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때 여러분이 지은 죄의 영향으롤 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나가서 또다시 노력없이(사탄과의 결투없이) 고의적으로 그 죄를 짓는다면 여전히 그 죄에 머물러 있는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이 전대사의 놀라운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완전한 통회의 행위에 대한 은총으로 들어가야합니다. 우리 모두 전대사를 받고 돌아 나올때마다 우리가 그것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정말일까? 내가 깨끗해 진걸까? 더이상 잠벌이 없는걸까? 지금 죽으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가는 게 사실일까? 내가 고백성사 본 죄는 보속할 필요가 없는가?”
그것은 여러분이 그것이 정말인지 의심해서라기 보다 여러분의 인식안에서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게 그 신비안에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속은 여러분의 인식의 행위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의 중함을 인식해야합니다. 그래야만 기워 갚을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구를 상하게 했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용서를 청합니다. 그 때 여러분이 그 사람을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이해하지 못해 용서를 구함에 진실성이 없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직감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든 속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그가 행한 잘못의 결과를 인식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그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와 관계에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똑똑하다는 사람의 도움 없이도 누가 마음 깊이로부터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않습니까?
그것이 보속의 예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와 똑 같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지, 그것이 진심인지를 다 아십니다. 우리가 진심일 때 진실한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진심으로 그것을 고치려하고 보속하여 잠벌을 없앤다면 하느님은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보속하려 함을 아시므로 우리는 자유롭게 될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속하지 못한 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갈 것 같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비둘기와 같이 새들은 아무런 짐도 지지 않고 날지 않습니까? 영혼도 삶이 끝났을 때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이 삶이 끝났을 때 영혼은 비둘기 처럼 하느님을 향해 날아갈 것입니다. 등에 아무것도 지지 않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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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짐을 내려 놓으십시오. 죄의식의 짐과 ‘할 수 없다’고 하는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자주 의식적으로‘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며 자신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내려 놓고 “할 수 있다’고 할 때만이 속죄와 보속은 시작됩니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이 선하여 질 수 있고,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삶이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속죄를 하는 바로 그날부터 여러분의 삶은 바뀌기 시작하여 여러분의 행위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입니다. 훨씬 깊어진 크리스챤이 되어 하느님의 우물안 깊은 곳으로부터 많은 물을 길어 올리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마음 먹는 한 순간에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속죄와 보속은 그렇게 시작하여야 하고 자신의 죄를 깊이 들여다 보아야합니다.
여러분을 얼마나 대죄(영어:MORTAL SIN 죽음의 죄)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대죄가 죽음의 죄로 불리우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의 서간에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도덕의 행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한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합니다. 그 시절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장을 써 주면 될 정도로 그 당시 여성은 노예취급을 했었음을 아실 겁니다. 그 남성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함으로써 끔찍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에 대해 성 바오로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성바오로는 그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그의 영혼을 구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토 1장 5절) 그 뜻은 어쩌면 사탄에 의해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되어 더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되면 그의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매우 신비로운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결과에 대한 깊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계속 죄를 지으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 리타 카시아를 기억하십니까? 성 리타는 두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 하기 위해 살인을 계획합니다. 성 리타는 그 것을 알고 하느님께 매우 열렬히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때 하느님께서 두 아들을 데려가십니다.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끔찍한 죄로 부터 그들을 구하신 것입니다. 성바오로도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묵상을 우리의 작은 삶에 비추어 볼때 자신이 얼마나 보속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속죄를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진심과 정직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백성사를 얼마나 정직하게 진심으로 보았으며 고백소를 떠나며 죄와 싸울 준비를 하며 고의적으로 다시는 그 죄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 속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뉘우치고 고백성사를 보고 나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죄의 유혹과 싸우려 할때 만이 비로소 속죄가 시작되는 것이기 떄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백성사를 남겨놓으신 겁니다. 우리가 항상 그것을 해낼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자주 사탄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또 우리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항상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과 맞서 싸우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고백성사를 봐야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언쟁을 하고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도록 해주세요…오우~ 참아야 해..” 목까지 차오릅니다. “오~ 도와주세요..이 말을 하면 큰일나~.말 하면 안돼~ 말하면 안돼~…오~ 도와주세요…”….”우웩~!”결국 입을 열고 맙니다. (웃음) 그리고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우리는 항상 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고백성사를 봐야 하지요.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더 잘 할 수 있었고 피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들로 인해 다시 고백성사를 보아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써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죄의식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쟁중 최전방에서 유혹과 사탄을 맞서 싸우는 전사의 삶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무기인 성사를 주셨으므로 그를 통해 일어나 계속 싸울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중 한 사람이 결혼생활을 위협하는 중대한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대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줍니다. 그러면 속죄와 보속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직 그 곳에 불신과 상처같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상처 준 사람은‘나를 믿지 못하나?..’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릅니다. 그러나 상처를 준 사람이 사랑을 가지고 동정심과 겸손으로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속죄가 됩니다. 상대방은 그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가서 상황은 좋아집니다.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물론 상처 자국은 남습니다. 어떻게 그것 마저도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많은 상처 자국을 갖고 살아 갑니다. 전쟁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 다른 크기의 상처 자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치유입니다.
바로 속죄와 보속이 치유입니다.
현재의 여러분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여러분이 하느님을 상하게 해드린 잘못한 일에 대해 얼마나 진심으로 속죄와 보속을 하였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과 대화를 할 때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께서 얼마나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용서하시는 분이신지 이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고 무관심한 비참한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더 잘 할 수 있었음을 깨닫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찬미하는것을 배우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끊임없이 잘못을 행함에도 저에게 계속 시간을 주시며 기회를 주고 계심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주님 사랑합니다. 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결코 저를 버리지 않으실것을 믿습니다. 홀로 선하시며 신실하신 주님, 제가 주님을 닮도록 도와주십시오. 저의 길을 인도하셔서 주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뜻에 따라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계속 주님을 찬미하면서 주님의 영광의 현존을 여러분의 마음안에 가져와 오직 한 분이신 그 분을 흠숭한다면 여러분의 삶이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속죄의 방법입니다.
그 선함에 마음을 모아 자신을 선함으로 이끌려 하고 그것은 찬미하고 , 행하고 느끼고 말하는 모든 것이 선함으로 이루어 지는 그것이 보속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선하신 그분을 찬미하고 사랑하고 예배할 때 여러분이 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치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잠시 연옥에 있는 영혼을 보게 된다면 두가지 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매우 아름다운 거룩한 광경입니다. 그들은 매우 거룩하며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영원히 사탄을 끊으며 더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도 열렬히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면에서 그것은 매우 귀한 광경입니다.
또다른 면은 여러분이 보게 되리라 상상 할 수도 없었던 가장 깊은 슬픔입니다. 거룩한 슬픔이지만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슬픔입니다.
그들은 연옥에서 그들이 했던 행위의 결과를 맞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매우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완벽한 차원의 죄의 결과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시며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죄를 올바로 해야하는 그 시간이 시작 되기 전에 지상에서 사는 동안 속죄와 보속의 은총을 통해 그것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임을 믿어주십시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이 항상 교회에 가있고 많이 기도하고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등등으로 생각하지만 , 물론 그것들이 좋은 것임엔 틀림이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의 결과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상해 드렸고 얼마나 이웃에게 해를 끼쳤으며 얼마나 자신의 영혼 구원을 막았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때 그것이 우리를 깨워 하느님께 순종하고, 선하게 되고자 하며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염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걸으려 하며 과거의 자신이 어둠속에서 잃어버린 삶과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게 되어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회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럴 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네 저는 제가 했던 모든 잘못들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죄는 매우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대죄는 단순한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사탄이고 사탄은 영입니다. 사탄은 거대한 악의 군대입니다. 대죄는 많은 영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삶을 망쳐놓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 사탄의 군대와 함께 하며 이 일시적인 삶에서 유익을 얻습니다. 또 어떤사람은 끔찍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대죄와 관련하는 것은 끔찍한 악몽입니다.대죄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떄문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를 원하시며 부르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백소를 나올때 어떻게 보속과 속죄를 해야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제가 신자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아무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백성사를 보고 성체를 영하며 “마음이 가벼워졌어. 기분이 좋아!”라고 말하지만 속죄와 보속에 대해서는 마음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각조차 안 합니다. 어떻게 보속을 하겠냐고 물으면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우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대사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현존앞에서 하루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죄를 지었던 단 며칠 동안 일지라도 하느님과의 관계는 깨진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벗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백성사를 끝내자마자 속죄와 보속을 맞아야 합니다. 즉 마음으로 부터 하느님과의 우정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죄를 통하여 깨뜨린 하느님과의 관계를 고백성사를 통하여 용서받았으므로 곧 속죄와 보속을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화가났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것에 대해 고백성사를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고백성사를 보고 나오자 마자 그 사람을 다시 보았을 때 자신을 콘트롤 할 새도 없이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속죄와 보속에 대해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다시 그 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요즘은 속죄와 보속이라는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현대적인 사제들은 “오~ 자신을 그렇게 자학하지 말아요..그건 구시대 고리타분한 이야기 에요..시대가 달라 졌어요…” 하고 말합니다. 오~그런 현대적인 사제들이란…ㅉㅉ.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현대적인 크리스챤..그런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성서를 현대적으로 할 것이고 어떻게 도덕성을 현대적으로 할 것이며..현대적인 순결..그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죄와 보속으로 깊이 들어가 지금 지상의 삶에서 그것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연옥에 가길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연옥을 믿지 않는 크리스챤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그들은 은총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전체 교회가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제가 때로 묘지를 지나갈 때면 연옥을 믿지 않았던 크리스챤들이 기도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을 느낍니다. 아무도 그 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천국에 계십니다.” 하고 말합니다…하! 천국에 있다구요? 그들은 연옥에서 많은 것들을 맞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개신교 신자는 천국으로 곧바로 갑니다. 어떤 불교신자도 그럴것이구요. 하느님께서는 삶의 마지막에 종교가 아닌 사랑에 의해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카톨릭 신자에게는 많은 것들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그렇기 떄문에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입니다.
어떤 영혼들은 아무도 기도해 주지 않아 오랫동안 연옥에 갇혀있습니다.우리는 연옥에 있는 이방 종교인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합니까? 거의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구원의 조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과 용서입니다.
오직 성체의 도구인 우리만이 인류의 모든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인류의 다른 사람들보다 큰 의무가 지워진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더 낫다거나 특권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군대의 군사로 불리움을 받았으므로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도 선함을 위해 살았다면 천국에 갑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를 지나갑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이 끝나면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전앞에 나갑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완전한 하느님의 왕국으로 들어 갑니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은 종교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지만 불교도 회교도 유대교도 할 것없이 모두 생이 끝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대전앞에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정의와 선함을 보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그에 대한 죄의식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압니까? 누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우리 카톨릭 신자에게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주어졌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이해해야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연옥에 대한 지식과 보속과 속죄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이 곳 지상의 삶에서 그것을 보속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속죄와 보속의 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감사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삶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불평합니다. 하느님께 삶에 대해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생명에 대해 감사할 줄도 모른다면 어떻게 속죄와 보속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여러분은 아침에 눈을 떴을때 그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를 드립니까?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자기의 일에만 몰두하다가 무언가 필요하고 삶이 엉망징창이 될때만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항상 감사하고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흠숭하고 항상 감사를 드릴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시고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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