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기억할 글

영적 인식 / 마리노 레스트레포

김레지나 2015. 5. 21. 22:55


 



말씀을 청하며 이 묵상을 시작하겠습니다.


고린토 전서14:18


나는 여러분중 어느 누구보다도 이상한 언어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상한 언어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 율법서에 "내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자들의 혀와 외국인의 입술을 빌어 이 백성에게 말할 지라도 그들은 끝내 내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한 언어는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능력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능력의 표입니다. 



성바오로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 모임에도 적용되는 매우 구체적인 말인 것이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은총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곳에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우리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은총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영감을 주기 때문이며,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하느님에 대한 말씀을 나눕니다. 오직 성령만이 그러한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 조차 할 수 없으므로,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이 순간은 은총임을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것을 우리의 정신과 마음안에 분명히 해야만이, 우리안에 성령의 은총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성바오로께서 말씀하셨듯이 공동체안에서 성령의 은총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언의 은사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예언의 은사란 누군가가 미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예언의 은사중에 한 부분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만, 예언의 은사의 가장 중요한 역활은 교회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으로서 우리의 믿음을 깊게하고 믿음안에서 마음을 하느님께로 더욱 깊게 향하도록 방향을 잡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많은 것들을 듣고, 읽고, 말하며 또한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많은 교리상식을 통하여 이미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얼마만큼이나 소화하고 있습니까?  사실은 매우 적을 것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뼛속까지 드러내도록 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삶의 여정중에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교회도 이 부르심 위에 세워졌습니다. 성령의 부르심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각자는 다 다른 부르심의 시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각기 다르게 지으셨기 떄문입니다. 우리 한사람 하사람은 유일무이 합니다.  오늘과 같이 우리가 함께 모여 이런 묵상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우리들의 마음은 무언가를 목말라 합니다. 정확하게 그것을 표현을 할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을 열고 무언가 성령께서 이순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어떤것을 목말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 하느님을 더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기 떄문입니다.  성심으로부터 우리의 작은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 사랑, 성령과 같은 것들의 한 조각을 우리의 마음안에 적당한 만큼 주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과 같은 이런 모임에서 사람들이 모여 같은 것을 듣고 나눔을 할 때도  각자 다른 비젼과 미션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각자에게  맞게 각 마음의 완전히 다른 영역을 터치하였기 떄문입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여 말씀을 들을 때, 모두 예전에 여러번 들었던 말씀입니다. 왜 그 말씀을 다시 들어야 할까요?  이유는 우리는 계속 진리안에 드러내져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진리로서 사는 방법을 배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 진리안에 머무는 데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의 삶의 여정 동안 우리는 계속 그 진리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영원히 진리안에 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진리가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진리가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와 똑같은 진리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제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떠날 것이다.  나는 협조자를 보낼것이다. 성령을 보낼것이다. 어디를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알려줄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공생활 중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나요? 그들도 불완전한 사람인데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협조자를 보낼 터인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고 가르칠 것이다."   제자들이 복음을 쓸때, 어떤 것은 이 후에 써졌지만, 성령으로 도유되어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고 그것을 전하여 씌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좀 더 흥미로운 것은,  성바오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성령이 성 바오로에게 부어져서 다른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갖게 됩니다. 주님이 나타나신 후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울이 아나니아의 손에 의해 시력을 회복한 후 성령세례를 받자 다른 제자들이 받았던 모든 지식을 갖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과 같이 말입니다. 그 후 분명히 성 바오로는 여러번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셨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 밖의 많은 신비한 일이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도유하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시면 성사생활을 통해 성령이 우리와 함께 머물며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같은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도 그러한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식이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려면 그리는 매우 기도하는 성사적인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한 신자 생활,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 성령이 실제로 우리 안에서 효과를 내게 하기 위해선 오직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성질이 나쁘다고 칩시다. 모든 일에 화를 잘내고 매우 까다롭게 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자신의 문젯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복음이 여러분의 존재를 꿰뚫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과 감각을 뚫고 있다면,  그러한 성질을 죽이고 나이지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모든 기도, 성사생활은 작용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악덕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약점과 악덕은 이 지상의 삶에서 다 극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정화되어지고 성화되어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아마 그것이 자신을 고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문제가 그러한 나쁜 성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폭발할 것 같고, 소리지르고 싶고, 화를 내고 싶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싶고, 내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뱉어내고 싶고,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 등등 의 많은 화를 내는 정당한 이유가 있지만, 본인이 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그러한 모든 것을 느끼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아냄으로써 그것을 희생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참지 못하고, 그것을 발산하고 남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전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게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약점과 악덕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서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쓸데 없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교리를 많이 알고 많이 읽고 기도하고 미사에 첫번째로 참여하고 가장 늦게 나온다고 해도 다 도움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꾸어지지 않고, 나쁜 행동습관과 악덕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다 소용없습니다.


말씀으로 끝맺겠습니다. 


히브르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