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은총으로 받은 선물들
오은정 미국 오렌지 교구 성 이레네오 본당 신자
우리 성모님 최고!
2000년 초였습니다. 가게를 옮기기로 하고 임차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보니 근저당이 너무 많이 잡혀 있었어요, 보증금을 그대로 날릴 정도여서 깜짝 놀랐죠. 잠자리에 누워도 그 생각만 하면 열불이 났습니다. 한겨울이었지만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있어야 열이 식을 정도였으니까요. 불현 듯 이러다가 건강마저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게가 날아가게 되었어도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열심히 레지오 활동 하고, 구역 모임 하느라 바쁜 거예요. 그런 남편을 보고 저도 자연스럽게 신앙 쪽으로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우리가 이 가게 보증금으로 하느님을 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동안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만 했지 실제로 믿음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다음부터는 하루하루를 기쁘게 지내게 되었고, 더 이상 열불도 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가게는 남의 손에 넘어갔고, 이제 빈 몸으로 나가야 할 때가 다가오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더군요. 세를 놓은 집이 한 채 있었지만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으니 들어갈 수가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돈도 없고⋯. 앞날이 아득하더군요. 큰 맘 먹고 54일 묵주기도를 바치기로 했어요. 9일씩 하는 기도는 많이 따라다녔지만, 이렇게 지향을 가지고 오랫동안 혼자서 기도하기는 생전 처음이었죠. 54일 동안 기도하는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묵주기도를 마치고 이틀이 지났을 때 가게 두 곳을 운영하고 있는 사촌 언니가 일 좀 봐달라며 전화를 했어요. 전철을 타고 가게에 갔는데, 도중에 구두굽이 망가져 절룩거리며 갔어요. 일을 해주고 집에 올때에는 형부가 먼저 다른 가게를 들르고 나서 저를 태워다 주어야 했기에 졸지에 그 가게까지 가게 되었죠. 그런데 그 가게는 사촌 언니 네가 팔려고 내 놓은 가게였어요.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형부 차로 돌아왔죠. 밤에 기도를 하는데 자꾸만 그 가게가 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가게를 하려면 5,000만원이 드는데, 돈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제 가게일 것만 같았어요.
다음 날 아침, 기도를 드리다가 갑자기 미사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장레 미사였어요. 남의 장례 미사에서 그 돌아가신 분의 친한 친척처럼 울었죠. “하느님! 저 어떡해요”라면서요.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어요. 아는 동네 자매님이 왜 그렇게 서럽게 우느냐고 묻기에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흔쾌히 3,000만 원을 빌려준다는 거예요. 원래 이 자매는 돈 때문에 혼난 적이 있어서 그 후로는 돈거래를 전혀 안 하는 사람이었죠. 그날로 바로 그 자매가 돈을 가지고 왔어요.
그날 밤에는 또 다른 아는 자매가 집에 들렸는데, 이 자매는 남편이 선종했을 때 제가 주관해서 초상 치러 준 적이 있었어요. 이 자매도 나머지 돈을 흔쾌히 빌려주었어요. 돈을 빌리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하다가 돈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와, 우리 성모님 최고!
다음 날 저는 사촌 언니네 가게로 가서 가게를 넘겨달라고 했어요. 알고 보니 그 가게는 형부가 자기 동생에게 주려고 기다리던 중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돈을 들고 간 거죠. 그때 사촌 언니가 그러더군요. “이 가게를 달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상하게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돈들이 안 돈다고 하데? 다들 너무 이상하다고 하더구만! 그렇게 미루더니, 정작 말 한번 안 해 본 네가 돈을 가장 먼저 가져왔으니, 네 하느님이 제일 힘이 센 거야! 이건 하느님이 너에게 준 거야!”
남편과 저는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죠, 진짜로 제가 한 것은 54일 동안 묵주기도 한 것밖에 없었는데 말이죠.
가게 계약서를 들고 와서 제가 모시는 성모님 앞에 놓고 기도했어요.
‘성모님! 잘 기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예수님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도 묵주기도를 아주 열심히 한답니다.
나를 부르신 예수님
제가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목욕탕을 운영했을 때 저는 카운터에서 입장료를 받느라 남편과 교대로 일해야 했죠. 작은 동네 목욕탕이라 그리 힘든 일은 없었지만 남편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했고, 저는 카운터에서 꼼짝없이 앉아 있는 게 지루했어요. 그래서 성경을 읽거나 묵주기도를 하기도 했고, 다른 책을 보거나 전화로 수다를 떨곤 했지요. 그런데 때밀이 아주머니가 갑자기 그만두었어요. 새 직원을 뽑기 위해 면접을 보던 날,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낀 아주머니가 오셨어요. 힘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두 딸을 키우고 있는 분이었지요.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나오라고 했는데, 심성도 곱고 성격도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두 달쯤 지났을 무렵, 그 아주머니가 기도회에 가자고 권하더군요. 집에 모여 묵주기도를 20단씩 하는 성시간 기도회라고 하는데 매주 목요일 밤에 한다고 해요. 저는 너무 이상해서 물었죠. “기도회를 왜 집에서 해요? 혹시 사이비 아닌가요?” 아주머니는 예수님의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기도회라면서, 집에서 한다고 말하면 가끔 그런 오해도 받는다고 웃으셨어요. 하지만 저는 가지 않겠다고 딱 잘라 거절했어요.
며칠 후 저는 수원행 직행버스를 타고 있었어요, 중간쯤 갔을 때, 제 앞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는 어떤 사람이 선명하게 나타났어요. 너무 놀랐는 데 그 순간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느껴졌어요. 저를 슬프게 바라보셨지요.
“아, 예수님⋯.”
갑자기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왔어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흐르더군요.
“아! 예수님⋯.”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서인지, 아니면 제 귀에 들려서인지, 예수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불렀다. 나는 너의 거절이 슬프다.”
“저를요? 언제 부르셨어요? 제가 예수님을 거절하다니요?”
그런데 그 순간, 빠르게 제 머릿속에서 때밀이 아주머니의 기도회가 생각났어요.
“아니, 그러면 그 아주머니가 한다는 성시간 기도회요?”
“내가 그곳으로 너를 불렀다. 나는 그곳에서 너의 위로를 받고 싶다.”
“아! 그런데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로해요? 저는 너무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요.”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너의 작은 기도들이 바로 나를 쉬게 하고 위로한단다. 나는 좀 쉬고 싶다.”
“아, 그러면 꼭 갈게요. 가서 기도할게요.”
예수님은 곧 사라지셨고, 저는 버스 안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 후 남편과 상의해서 성시간을 다녔는데, 그 여운은 제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았어요.
제 기도가 예수님을 위로한다는 것이 좀 이상했지만, 그렇게 예수님을 만났으니 안 갈수가 없더라고요. 막상 기도회에 가서 보니 모두들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기도한다고 하셔요. 그래서 ‘아, 이렇게도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지요. 처음에는 희생의 개념이었고, 나중에는 배상한다는 기도로 이해했어요. 새벽 2시까지 기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저는 그 성시간을 다니는 동안 언제나 하느님께로 곧장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저는 성체 조배를 시작하였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저는 성시간에 관한 책을 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책을 읽어 보니 성시간의 메시지를 받았던 마르가리타 수녀에게 나타나신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성시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죠. 지금 이 성시간의 배상의 기도로 성체 조배를 해는 것도, 고난을 우리 삶 속에서 받아들여 보속으로 봉헌하는 것도, 우리가 예수님을 쉬게 하는 기도라고 생각해요.
성당 건립 기금이 치료비?
어느 해인가 제주도에 있는 남원 성당 건축 모금에 참여하였습니다. 1년 약정으로 건립금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해에 갑자기 허리가 너무 아팠어요, 가게 바닥을 대걸레질하다가 갑자기 허리 아래 척추 하나가 순간적으로 앞으로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허리 힘이 빠지면서 뻐근했어요. 똑바로 누워 잠잘 수도 없어 이불을 몽땅 쌓아 놓고 앉아서 기댄 채로 자야 했죠, 그런데 저는 병원 가기를 죽기보다도 더 싫어합니다. 주사에 대한 어떤 공포 같은 것이 있어서요⋯. 그때 공교롭게 언니도 같은 증세로 아프기 시작했어요. 큰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니 선천적으로 척추가 탈골되어 있다면서 수술을 해도 장담할 수 없답니다. 아프다가 말다가 하고, 가족이니까 같은 증세일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아픈 채로 그해 내내 살았습니다.
성당 건립 기금을 다 납입할 즈음, 남원 성당도 볼 겸해서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갔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우비를 입고 여행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가볼 수 있는 곳은 열심히 다녔어요. 관음사에 갔는데 비가 너무 와서 들어갈 수 없다기에 돌아 나오다가 그만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쭈르륵 미끄러졌어요. 그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보였고, 뒷목에서 허리 아래 뼈까지 마치 커다란 몽둥이로 강타당한 느낌으로 확 고꾸라졌어요. 정말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아팠습니다. 모두들 다 놀랐고, 저는 주저앉은 채로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죠. 어딘가 뼈가 나갔다는 느낌이 들어 감히 몸을 움직일 생각을 못 했습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몸을 하나씩 움직여 보니 다행히 뼈가 나간 데는 없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잠시 쉬었다가 다음 목적지인 이시돌 목장으로 가자고 남편에게 말했어요, 저보다 더 놀란 남편이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안 든다며, 길을 찾을 수가 없으니 그냥 숙소로 돌아가자고 하더군요.
남편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한 30분쯤 지나 눈이 떠져 밖을 바라보니 이시돌 목장 팻말이 보이는 거예요!
“와! 자기야 이시돌 목장이네. 어떻게 길을 찾았어?”
숙소로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에 들어섰다고 생각하고 운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 갇히면서 길을 잃어버린 거랍니다. 그래서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속이니 그냥 보이는 길만큼만 따라오다 보니 이시돌 목장이 보인 거라네요.
“와! 성모님이 우리에게 여기 들렀다 가라고 하시나 보네!”
이시돌 목장에 들어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묵주알을 돌면서 각자 자기 몫의 묵주기도를 한 단씩 하고 내려왔어요. 많이 아팠는데 참았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요. 다음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숙소로 돌아와 그날 밤 내내 끙끙 앓았어요. 그냥 서울로 돌아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좀 참아야 하나? 갈등이 생기더군요.
우리가 제주도에 간 목적 중 하나가 남원 성당에 들르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아파도 거기는 들렀다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도했어요. ‘저희가 남원 성당을 보고 돌아가게 해주세요!’ 다음 날 아침, 몸이 좀 가뿐해진 것 같아 남원 성당으로 갔습니다. 미사도 드리고, 처음으로 거양 성체를 모시는 영광도 누렸어요. 제가 맨 마지막에 성체를 영하러 나갔는데, 성체가 다 떨어지고 거양 성체만 남았던 거죠. 신부님께서 거양 성체를 드시고는 외지인인 우리를 한참 쳐다보시고는 나머지를 주셨어요.ㅋㅋ
남은 일정을 잘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동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바쁜 일주일이 지나고, 남편이 물었어요. “요새 앓지 않고 잘 자던데, 허리는 괜찮은 거야?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정말로 허리가 아프지 않았어요. 그날 밤 성체 조배하면서 주님께 여쭈어 보았어요. “제 허리가 갑자기 안 아픈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기도 중에 제주도에서 미끄러졌던 일이 기억났고, 그 순간 제 몸이 충격을 받으면서 순간적으로 뼈들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았어요. 미끄러지면서 그동안 앞으로 밀려나와서 저를 아프게 했던 뼈가 제자리로 돌아간 거라고요. 그 순간에 제가 왜 안 아픈지 이해되었고, 너무나 감사했어요! 그래서 남편과 성시간 회원들에게 기쁘게 말해 주었죠. 제가 아픈 것을 알고 빨리 치료받으라고 성화였던 자매님들이 모두 놀라며 “하느님께서 성전 건립금을 네 허리 치료비로 받으신 거야! 병원에서 치료받으려면 돈 엄청 들었을텐데. 하여간 주님께는 공짜가 없다니까!” 저도 하느님의 계산법으로는 그럴 거라고 믿어요.
남양성모 성지 묵주 알
일요일에도 가게 문을 열어야 해서 저는 아이들과 변변한 곳에 놀러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업종의 사촌 언니 네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여기저기 좋은 곳을 잘도 찾아 다녔고, 다녀와서는 꼭 가보라고 권유하곤 했습니다. 남양 성모 성지에 가끔 들르던 사촌 언니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개신교에서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치면 일 년이면 10층짜리 건물이 올라갔을 거야.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남양 성지를 10년 동안 건축한다고 하는데 만날 그 모습 그대로인 거야. 너도 꼭 한번 가서 봐라. 느긋한 천주교의 심성이 보이는 곳이니까. 나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둘러보곤 해⋯.”
저는 그곳에 가 보지 못해서‘그런 곳이 있나?’할 정도였죠. 그런데 드디어 그곳을 지나치다가 팻말이 보이기에 얼른 들어가서 둘러보았어요. 사진도 찍고, 큰 묵주도 샀습니다. 평화로움이 고즈넉하게 느껴져서 참 좋았어요.
그 후 사촌 언니가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미처 팔지 못한 집을 저에게 처분해 달라며 수고비조로 100만 원을 주겠노라고 꾀더군요. 저는 공돈이 생긴 것 같아 ‘그 돈을 어디에 쓰지?’ 궁리부터 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어느 날 밤 남편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데, 그집을 팔면 받을 공돈 100만 원을 남양 성모 성지에 보내라는 말씀이 순간적으로 마음속에서 울려 나왔어요. 남편에게 말했더니, “무슨? 말도 안 돼! 하느님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시려고?”라고 했고, 저 역시 “그치! 내 생각인 거지?”라며 맞장구를 쳤지요.
그러다가 진짜로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게약 전날, 남편과 저는 공동 100만 원을 형편이 무척 어려운 친구를 돕는 데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계약하기로 한 그 사람이 공인 중개사에게 사지 않겠다고 했대요, 그 말을 듣고 ‘뭐, 살 사람은 많으니까!’하고 그냥 넘겨 버렸죠. 우리도 일이 바빠 그냥저냥 한 달이 지났을 즈음, 사촌 언니가 집을 빨리 팔아 달라고 재촉하여 그 집에 다시 신경을 쓰게 되었어요. 매기(買氣)가 끊겼는지 갑자기 집 살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어요. ‘어떡하지? 언니는 돈이 급하다는데⋯.’ 저는 애가 달아 여기저기 공인 중개소를 다니며 다시 부탁해야 했어요.
그렇게 또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기도 중에 문득 남양 성모 성지가 생각났어요. 그때 비로소 ‘이거 혹시 정말로, 그 돈 100만 원이 남양 성모 성지에 가야 하는 건데, 생각을 바꾸는 바람에 주님께서 그 집을 안 팔아주시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저도 모르게 기도를 바쳤죠. ‘혹시 제가 주님 뜻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면, 남양 성모 성지에 그 돈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제가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요.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 중 한 분이 놀러 와서는 “내가 지난주에 남양 성모 성지에 갔다 왔는데, 그 성지에 무척 큰 묵주 알로 꾸민 묵주 동산이 있거든. 그런데 글쎄 이번에 ‘빛의 신비’가 새로 생겼잖아. 신부님이 ‘빛의 신비’묵주 알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며 묵주 알 하나씩 맡아 달라고 하시더군. 묵주 알 하나에 107만 원(110만원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남)인가 한대!”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몸에 전율을 느꼈어요. ‘아이고, 주님! 그게 그럼 진짜였나 보네요! 아이쿠! 끙! 그냥 100만 원 그대로 보냈으면 이자 안 내도 되는데 괜히 친구에게 준다고 설레발치는 바람에 내 돈(7만 원)까지 더 이자로 붙여서 물게 됐네요!“
남편에게 말했더니 흔쾌히 보내라고 하더군요. 사실 남편은 물욕이 없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진짜로 집이 팔린 거예요. “이거 진짜인 거야! 그치? 우린 공돈 쓸 일이 없나 보네!”
사촌 언니네 이름으로 남양 성모 성지에 입금시켰더니 나중에 신부님께서 감사하다며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증자인 사촌 언니가 미국에 사는 개신교 신자라고 간단히 말씀드리고 기도를 부탁드렸어요.
사촌 언니 네는 그 100만 원이 자신들이 즐겨 다니던 남양 성모 성지로 보내졌다는 것은 모르죠! 곰곰이 이 일을 생각해 보면, 사촌 언니는 평소에 남양 성모 성지를 좋아하고 자주 갔는데, 그것도 다 이렇게 주님 뜻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것 하나에도, 이렇게 묵주 알 하나에도 주님의 손길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저의 모든 일도 그리 해주실 것이라 믿게 됩니다.
‘기적의 메달’을 던져 놓고서
어떤 책에선가 데레사 수녀님이 고아들을 위한 집이 필요했을 때, 마땅한 집을 보신 다음에 그 집에다가 ‘기적의 메달’을 던져 놓았더니, 그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즈음 저는 성체 조배를 밤에 하고 싶어서 성당 열쇠를 주십사 하고 기도를 바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적의 메달’을 사제관 뜰에 던져두었어요.
사실 개인이 기도하고 싶다고 성당 열쇠를 달라고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얼토당토않은 일이지요. 처음에 보좌 신부님에게 말씀드리니 그 권한이 없다며 주임 신부님께 요청하라고 하셨고, 주임 신부님은 정말 난감하신지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자며 답을 미루시더군요. 그 후 드디어 주임 신부님께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주시며 열쇠를 직접 주셨어요. 그때 저는 ‘사제관 앞뜰에 던져놓은 성모님의 힘이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열심히 밤에 성체 조배를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참 겁도 없이 열쇠를 달라고 했구나 싶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을 장만한 제 친구가 그동안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이사를 나가게 되었어요. 저는 그 친구가 세든 집이 정말로 맘에 들었죠. 월세를 많이 안고 있었지만, 커다란 정원이 딸린 단아한 집이었습니다. 당시 남편 수입이 괜찮아서 아무 돈 걱정이 없었기에 그 집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로 하고, 자신 있게 그 집 정원에 기적의 메달을 던져 놓고 왔어요.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공교롭게도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정되어 있던 남편의 일들이 다 취소가 되었고, 얘기가 잘 되었던 그 집 주인과도 하나씩 엇나갔어요. 신기하게도 정말 눈에 보이듯이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주변 사람도 다들 한결같이 그 집을 포기하라고 했어요. 자기네들이 볼 때에도 그 집이 나와 인연이 없다면서⋯.
하지만 저는 그 집이 정말 맘에 들었기에 쉽게 포기하기 싫었습니다. 급기야 마지막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이 틀어져 버렸고, 주인은 마음을 바꾸어서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고 말았어요. 정말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니, 정원에 던져둔 성모님은 뭐하신 거냐고요?’
성모님께서 아무 일도 안 해주셨다고 한동안 씩씩(?)거리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면서도 문득 ‘왜 안 주셨을까?’ 우리가 그 집으로 이사를 갔으면 무슨 일이 있었을라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겨울은 경기가 너무나 안 좋아 우리는 처음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그제야 그 집을 허락하지 않으신 주님의 깊은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그 집을 얻었다면 월세 때문에 무척 버거웠을 것이고,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었을 거예요.
그 해 겨울은 그렇게 힘들게 지내고 나니, 제가 던져 놓았던 성모님이 ‘진짜로 우리가 그 집에 못 가도록 정말 열심히 일하신 거구나!’하는 깨달음이 왔어요. 우리를 그 집에 못 가게 한 것은 주님의 뜻이었어요! 주님께서 염려하신 것은 제가 그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제 가족이 그 겨울을 잘 견뎌내는 것이었죠.
지금도 종종 생각해 봅니다. 기적의 메달도 주님 뜻이 있어야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이 우리가 바라는 기적이 아니라, 주님 뜻이 살펴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고요. 저는 그 후로는 기적의 메달을 던지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뜻을 이루시라고 성모님께 청한답니다.
주님 품이 바로 천국
30년 전 스물두 살 때 친구를 따라 처음 성당에 나갔습니다. 시골에 있는 작은 성당이었는데 하느님이나 성당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냥 친구 따라 대충 다니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의 은총이 그렇게 큰 줄을 몰랐습니다. 세례 받은 지 한 달 되었을 때 신심이 없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던 저는 부끄럽게도 성당 입구에 모신 성모상 앞에서 지금 받고 있는 월급이 적으니 돈을 많이 벌게 주님께 전구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일주일 후 지방으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출장비가 월급보다 많았지요. 그때부터 냉담할 때 까지 제 인생은 황금기였답니다. 그런데 회사에 사표를 낸 후 주님과 멀어지고 냉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남편은 쌍둥이였는데, 쌍둥이 형제가 행방불명이 되어 방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게다가 외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믿었던 남편이 외도까지 하자 저는 이혼을 결심했고 이혼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가까운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이, 미사 시간에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철이 없어서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친정에 와 있으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자 아들이 보고 싶고, 길을 가다가도 아이와 부모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재결합했지만, 예전처럼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일을 해야 했고 남편은 술주정까지 하였습니다. 답답한 저는 무당집을 찾기 시작했고 근천에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다녔습니다. 무당이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고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무당따라 산에 가서 빌고 왔는데 갑자기 ‘내가 천주교 신자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기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묵주를 찾아보니 묵주 알이 하나가 떨어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장 아는 언니에게 기도하고 싶다고 말을 했더니 다음 날 묵주와 『묵주기도로 드리는 9일 기도』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 기도서 뒤에 있는 그림을 보면서 묵주 알을 하나씩 돌렸습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우리 집 마당으로 빛이 내려왔습니다.
주일에 성당에 나갔습니다. 미사에 참례하고, 복음 말씀과 신부님 강론을 듣자 십 년 동안 꽉 막혀 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습니다. 저는 주님 말씀과 신부님 강론을 듣기 위해 주일마다 성당에 갔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병이 치유가 되면서 혼인 장애 때문에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죄에서 풀려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신부님과 약속을 해서 날을 두 번이나 잡았지만 남편이 성당에 가려 하지 않아 면담을 하지 못하고, 세 번째로 날을 잡고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저는 생전 처음 주님께 이번에도 안 들어주시면 안된다고 협박을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결국 혼인 장애에서 풀려나 성체를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술주정할 때는 죽이고 싶어서 잠든 남편 목에 넥타이를 감은 적도 있었고 날마다 ‘저 원수는 죽지도 않냐’고 했었는데, 회개하고 주님 곁으로 돌아오니 원수 같은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객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터 같던 가정이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렇게 떨어져 있으면서 가정을 위해 열심히 땀 흘리는 남편 모습에 미운 마음이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가난은 하지만 남편은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든든한 가장으로 변했고, 아들도 빗나가지 않고 바르게 커 주었습니다.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면서 평범한 가정으로 화목하게 살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을 배신했기에 주님께서도 저를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아픈 자녀에게는 더더욱 눈을 떼지 못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이제 더 이상은 당신 품을 떠난 자식들 때문에 마음 아프지 않으시도록 주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십 년 넘게 성당에 다니면서 정말 행복합니다. 무식하고 가난하기에 예수님, 신부님들, 수녀님들, 형제자매님들이 베풀어 주신 사랑이 제게는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주님 품이 바로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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