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별난 신앙체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 주신 주님의 목소리 / 이정임-부산 기장 본당 신자

김레지나 2015. 5. 17. 19:37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 주신 주님의 목소리

 

                                                                                         이정임-부산 기장 본당 신자

 

1995년 봉 어느 날입니다.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 버린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제 건물을 소유한 사장이지만, 그 당시는 월급쟁이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아들과 행복하게 살겠다고, 중학교 1학년짜리 아들을 남의 손에 맡기고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제가 일하고 있는 곳에 놀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사건이 터졌습니다. 제 아들이 금고에서 거금 10만원을 훔쳐 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갈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아들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희망이 없어져 제가 살아야 하는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살면서 그러한 절망감을 느껴 보긴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아들도 아들이지만, 남의 집에 월급쟁이로 일하고 있으면서 내 불행으로 일을 소홀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터로 발길을 돌려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는 길을 걷는 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옷이 비에 젖는다든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 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없는 상태인데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때 갑자기 한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게 왜 아들 탓이니?”

이 말씀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게 왜 아들 탓이니?” 하는 말을 다시 되뇌고 있노라니, “네가 잘 살았어 봐!” 하는 말씀이 또 들렸습니다. “네가 잘 살았어 봐!” 하는 말을 되뇌는 순간, 그동안 제 삶의 모습들이 번개처럼 싸~악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곳에서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오늘 안으로 제 아들을 찾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하느님을 믿고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날 밤 저는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아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며 나중에서야 그것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루카 복음서 15장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11-32)에서 돌아온 탕자를 안아 준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들을 안아 주었습니다. 탕자를 품에 안으신 주님의 마음을, 세례 전에 미리 맛볼 수 있는 은총을 제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던 제가 어떻게 그 말씀이 하느님 말씀인 줄 알고, 무릎을 꿇고 “제 탓이오”를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토록 깊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 후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 길이 환하게 보였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 그렇게 살 길이 보이자 용기가 생기고 두려운 것이 없어졌습니다.

아들이 제 곁으로 돌아온 날 밤, 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그런 제 결단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제법 큰 금액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느 날 다시 하느님 말씀이 들렸습니다.

“돈이냐? 아들이냐?”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돈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을 선택하자 길이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남의 손에서 자란 아들을 데리고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했듯이 저도 아들을 위해 이사를 했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파출부 일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나섰지만 그 길은 힘들고 험했습니다. 일하러 오라는 전화를 매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동안 벌어 놓은 돈도 헐어서 써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을 찾아 주시면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해 10월1일에 성당 위치를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자 소화 데례사 축일이었습니다. 가톨릭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뒤에 앉아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했습니다. 사람들이 일어서면 따라 일어났고, 앉으면 저도 앉고, 돈을 들고 나가기에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나가 손을 내밀기에 저도 내밀어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기에 저도 내밀어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기에 신부님은 물론 교우들도 제가 비신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미사는 끝났고 사람들은 물밀 듯이 빠져 나갔습니다. 당시에는 낯가림이 심해서 누구를 붙잡고 성당에 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데, 모두 나가고 흰 옷을 입은 사람만 한 분 남았습니다. 당시에는 미사 해설자, 독서자, 복사 모두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누가 신부님인지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마지막 남은 저 사람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용기가 났습니다.

“저~어, 성당에 다니고 싶어서 왔는데요!”

 

그분은 그날 해설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소개로 예비 신자 교리반에 입교를 했는데 문제는 이미 교리가 시작된 지 2개월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앞 교리 내용을 다 배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해 예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비 신자 교리를 충실히 들어도 다 알지 못할 판국에 중간에 들어가서 겨우 묵주 기도 하는 방법을 배워서 세례를 받았으니 모르는 것 투성이였습니다.

그렇게 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아주 궁금한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 제 죄 땜문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인데 어떻게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제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고 하십니까?"

 

  그렇게 궁금해하며 살던 어느 주일입니다. 성당 입구에 이런 내용의 초대장이 있었습니다.

  '성서 사십 주간 모집'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서'라는 것으로 봐서 여기 가면 뭔가 답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평소 주간의 개념이 없었깅 사십 주간이 얼마만큼의 시간인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을 합쳐서 1년 과정을 공부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큰일이었습니다. 당시 월급쟁이로 취직을 했기에 허락되지 않는 시간대였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모님, 도와주십시오. 저 성서 공부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되든 안 되든 사장님께 이러저러해서 시간을 좀 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니 사장님 마음이 움직이도록 성모님께서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장님께서 그 부탁을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무사히 1년 과정을 마치고 성서 사십 주간 수료증을 받았습니ㅏ.

 

  성서 사십 주간을 하면서 수녀님께 배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실천하고 은총을 받은 사연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말씀을 하나씩 선택해서 그 말씀을 붙잡고 사십시오!" 그래서 저는 어떤 말씀을 잡고 살까 고민하다가 두 가지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어느 날 학교에 가라고 아들을 겨우 깨워 놨더니 늦었다고 투덜거리며 화를 내고는 문을 쾅 닫고 학교에 가는 것입니다. 저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럴 때 이 두 말씀을 되뇌자, 신기하게도 화가 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입니다. 그날도 위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저는 온통 이런 생각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해봐라!" 그러면서 어떻게 아들을 혼낼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왜 내가 죽이는 생각을 하고 있지?"

 그러자 갑자기 저 자신도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맞다, 왜 내가 죽이는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하며, 바로 살리는 생각을 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냬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뭐라고 위로해줄까?" 이제는 그것을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일 것입니다. 고백하건대 이 회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동안 아들과 서로 주고받은 상처로 인해 깊어진 골을 주님의 사랑으로 계속 메우고 있으니 현재 진행형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지금까지 교육하고 훈련한 것이 바로 이 작업을 해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우리 독자들과 함께 별난 신앙 체험을 통해서 나누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세요!

 

                    월간 <참 소중한 당신> 2013년 8월, 9월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