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5년

자판기 하느님?

김레지나 2015. 5. 15. 22:44

H언니 동생은 아주 열심한 신자여서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심한데도

세상을 떠나기 2주전까지 평일미사에 가기를 간절히 원해서 가족들이 미사에 참레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집에서 합성몰핀 등으로 통증 조절을 하면서 방문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아가며 마지막을 지냈다고 하는데,

가족들이 다 모여 있을 때, 딸이 마침 들어오는 것을 보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동생은 임종 직전에 갑자기 눈을 뜨더니,

어느 한 곳을 쳐다보면서  "아멘"하고 외치고 환하게 웃고, 다시 "아멘"하고 웃고, 연거푸 다섯 번을 그렇게 외쳤다고 한다. 

가족들이 뭐가 보이느냐고 물어봐도 이미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그저 "아멘"하면서 천상의 미소를 보였다고.

 

동생의 시어머님은 열심한 개신교 신자이셨는데,

동생이 투병하는 기간 내내

"너네 하느님은 그렇게 아프게 놔둔다니?"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셨다고 한다.

 

나도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들은 "너네들은 기도 응답 받을 수 없지 않느냐? 우리 하나님은 작전기도를 하면 다 들어주신다."라고들 하지.

돈도 명예도 건강도?....

하느님이 일정량의 동전(수고)이 들어가면 원하는 물건을 내놓는 자판기같은 분이시라고? 

이 세상 기준으로 고통을 겪는 것이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너네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따로 계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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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기도마다의 기도응답을 자랑하면 악이 교만을 부추기기 위해 그럴듯한 응답과 신비체험을 준다.

자신의 욕망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을 성령께로부터 온 기도 응답이라고 믿으면서 잘못된 결정을 하고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분별하는 지혜는 겸손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

겸손은 아무나 다다르지 못하는 높은 덕이기에,

우리들는 아예 어떠한 영적 체험도 일단은 값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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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신부님 말씀 중에서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수시로 거짓예언자들이 등장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키곤 했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성적 판단이 전제된 절도 있는 신앙, 진지한 자기성찰이 수반된 교리, 부조리하고 참혹한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한 직면보다는 다양한 감언이설로 백성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현세에서의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부르짖었고 너무나도 쉽게 천국을 보장했습니다. 그 거짓예언자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 앞에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았지만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는 도사였습니다. 요즘도 그릇된 종교지도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대체로 기본 상식이나 통상적인 사고를 벗어나 황당무계합니다. 때로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터무니없는 고액의 봉헌을 요구하는가 하면 물건을 강매합니다. 그들이 주로 애용하는 성경구절은 무시무시한 종말과 관련된 구절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니 조심하여야 합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지 누가 삯꾼인지 구분하는 식별력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관심사는 하느님 뜻의 추구였습니다. 그들은 늘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물론 참된 목자들은 백성들에게 한없이 크신 아버지의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백성들의 아픈 상처를 오래도록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때로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회초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죄와 타락을 강하게 경고했습니다.

이 시대 착한 목자들이 가르치는 정통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결핍 투성이의 인간이기에 이 세상에서의 갖은 고통과 실패, 방황과 우여곡절을 겪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십자가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 십자가 기꺼이 지고 한 걸음씩 성덕의 길로 나아가자고 초대합니다. 죄인이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 자비가 더욱 크시니 용기를 내라고 격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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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께서 기쁘게 응답하실 기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복음 16장 23~24절) 참으로 마음이 훈훈해지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복음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 각자를 향해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 무엇이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관건은 과연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세상의 왕이 자신이 아끼는 신하에게 “무엇이든 소원 한 가지를 말하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신하는 과연 어떤 것을 청할까요? 한 가지만 청하라 했으니 아무래도 심사숙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청할 것 정말 크게 한 가지 청할 것입니다. ‘현금으로 2천원만 주세요.’ ‘땅 다섯 평만 주세요.’라고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평생 먹고 정도의 돈인 ‘10억만 주세요.’ 아니면 평생 안전장치인 ‘장관 자리 하나 주세요.’라고 청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청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올바르고 순수한 지향으로 청해야겠습니다. 또한 이왕이면 드리는 청, 보다 큰 청, 보다 중요한 청을 드려야겠습니다. 인간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겪여야 할 작은 고통 하나, 눈 녹듯이 없애달라고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오히려 그 고통을 잘 극복할 힘을 청하고 그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큰 뜻을 이해할 능력을 청해야겠습니다. 다양한 한계와 약점 지닌 존재이기에 필연처럼 짊어져야 할 매일의 십자가 없애주시기를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다며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오히려 일상의 십자가 기꺼이 지고갈 인내심을 청하고 내 십자가 통해 주님의 십자가 묵상할 지혜를 주시라고 청해야겠습니다. 마치 부초처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보다는 보다 영원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불멸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 구원에 합당한 자격을 청해야겠습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한 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도 중요하지만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더 많이 청해야겠습니다. 더 이상의 비극이 없는, 더 이상의 무자비한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청해야겠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청해야겠습니다. 육에 매몰된 세상이 아니라 영으로 무장되었기에 건강하고 건전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청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