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5년

예수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셔야 합니다.

김레지나 2015. 4. 20. 10:57

  개신교 신자들의 믿음과 열성은 참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부 목자들에 의해 잘못 배운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믿음은 상대하기 불편합니다.

정말이지 개신교 형제, 자매들을 위하는 염려하는 마음에서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개신교 신자들로부터 어설픈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입니다. 수업 중에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한 남학생이 “아, 마리아 믿는 교회”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 “마리아는 공경할 뿐이지, 믿는 것은 아니거든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개신교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믿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믿음만 강조하는 설교에 뒤틀린 적도 많았습니다. 성경구절을 색다르게 해석해서 새로운 종파를 세웠노라고 자랑하는 목사님도 있었고, 담임 선생님은 은근히 개종을 권유했습니다. 학교 목사님은 성경 수업 시간에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집안 치고 안 망하는 집안 없다.”면서 천주교를 비난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서 이슈가 될 만큼 타종교를 박해하는 분위기에서 3년을 보내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담임선생님은 월요일마다 반 아이들에게 교회 간 사람 손들어보라며 자기 교회 나오라고 독려하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는데, 하루는 제가 아들이 오른쪽 뺨의 혈관이 잘 터지니 엎드리는 자세로 오래 있지 않게 신경써 주십사 부탁드리는 전화를 했습니다. 선생님 왈, “어머니, 안타깝습니다. 성당을 나가지 마시고 교회를 나오세요.”하는 것입니다. 아들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제가 이단 종교를 다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저도 하느님 믿거든요.”하고 쏘아붙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또다시 “안타깝습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하고 나를 불쌍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의 오해는 사실 지금까지도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천주교 이단이라고 그래.”

  “니 글 보고 천주교도 하느님 믿는 데인 줄 처음 알았다.”

  “왜 성상을 숭배해?”

  “다른 건 다 이해해도 인간에게 죄를 고백한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천주교에도 하느님과의 교제가 있고 체험이 있다는 걸 생각해본 적도 없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 안 해. 이미 믿음으로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했을 텐데.”

  이런 말들이 가방끈 짧지 않은 지인들 입에서 나오는 걸 보면 상황이 좀 심각해 보입니다.

 

  오랜 냉담 끝에 제가 암환자가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이후로도 개신교 형제자매들로 인해 불편한 상황을 가끔 겪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기리라 하셨는데, 어디 목사님이 안수하면 많이들 낫는다던데, 항암치료 안 하도록 거기 가봐야 한다.’

  제게 그런 권고를 한 언니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믿음 또한 부러워할 만큼 깊구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시의 내 믿음은 하느님을 만난 직후라서인지 겨자씨만한 것이 아니라 산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그저 웃으며 고맙다고 했지만, 제가 병이 낫지 않고 고생하는 이유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는 탓이라는 핀잔을 들을까봐 살짝 걱정이 되었습니다.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믿음이 가까운 이에게 폭력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한참 심한 병을 앓고 있는 한 자매를 알게 되었는데, 오로지 믿고 의지하던 오랜 친구로부터 큰 상처를 입어서 힘들어했습니다. 개신교 신자인 친구는 병에 걸린 자매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차도가 없자 천주교 다녀서 그런다며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병원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환우 중 한 명이 병원 마당에서 고래고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누구보다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있는 환우들한테 대놓고 할 소리인가 싶어서 화가 나더군요.

 

  이곳 병원에는 목사님 사모님이 근무하는데, 말씀이 그리워서 매일 새벽기도 모임을 나가는 천주교 신자 환우한테 “천주교에도 구원이 있습니까?”라고 묻더라고 합니다. 그렇게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흔들리게 해서, 환자가 혼란스러워하다가 정말로 중요한 생의 마지막 시간에 성사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 사모님에게 ‘덜 배우고 지도자 노릇을 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는 "믿음으로 승리하리라" “우리를 대신해서 악의 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싸워 이기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을 줄로 믿쓥니다.”하고 기도합니다.

  어쩔 때는 예수님의 권능을 붙들겠다고 너무 힘을 들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사랑’이 아니라 ‘수단’으로만 여기고 전투적인 믿음을 조장하는 곳에서 진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환우들 중에 목사님도 있는데, 어제는 제가 “어머, 목사님이셨어요?”하고 웃으며 인사했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목사가 짜잔하게 병에 걸렸네요.”하고 대꾸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기도공동체 모임에 암환자 넣지 말라고 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암환자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다가 암환자가 죽으면 그 기도 공동체 구성원의 믿음이 흔들린다는 이유에서랍니다.

 

물론 극히 일부 교회의 분위기이겠지만, 쭉 적다보니 슬퍼지는군요.

 

  같은 하느님을 믿기에 말이 가장 잘 통하는 개신교 형제 자매님들!

  “믿쓥니다.”하는 기도로 힘을 쓰다 지칠 때에는, 그저 우리의 힘을 좀 빼고,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권능 대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껴보는 게 어떨까요?

  우리가 힘을 쓰지 않아도 사랑으로 우리의 아픔을 헤아리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게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수단'이 아니라 우리 항해의 '목적‘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의 바람만 들여다보고 호소하느라 힘을 다 써버리지 말고,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에 마음을 기울여봅시다.

 고요한 마음으로 그저 예수님을 향해 있으면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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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썼던 글 하나 붙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손을 볼 줄 아는 마음

 

  L 님은 억울하고 근거 없는 모함으로 수년간 하시던 일에서 물러나계셔야 했다. 꼬리를 물고 부풀려지고 퍼져가는 갖은 소문으로 당신의 정체성마저 잃을 만큼 명예가 땅에 떨어졌지만 변명 한 마디 하실 수 없으셨다. 나는 예수님께서 시련을 통해 그분이 완덕을 쌓도록 이끌고 계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루는 L 님이 전화를 하셨다.

  “성체조배를 하면서‘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묵상했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걷다가 풍랑을 보는 순간 물에 빠졌잖아. 나는 지금까지 내가 예수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고 있어서 힘듦을 견뎌내고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 거야. 예수님이 지금까지 나를 잡고 붙들고 계셨던 거야.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까봐 조배실에 있을 수가 없었어.”

  그분의 깨우침이 고맙고 감격스러워서 나도 눈물이 났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으려면 우리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붙들고 계시는 예수님의 손을‘볼 줄 알아야’한다. ‘예수님의 손을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믿음'이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은 '우리 손'이 아닌 '예수님의 손'을 신뢰해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도 지쳐 힘이 없어지면 물 위를 걷다가도 빠지겠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으면, 우리 힘이 바닥날 만큼 힘든 고통 중에서라도 빠지지 않고 견딜 수 있다. 그러니 좌절할 만큼 힘이 들 때, 예수님을 놓지 않으려 허우적대며 우리 힘을 쓸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사랑으로 붙잡아주시는 손길을 바라볼 줄 아는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힘들수록 우리의 힘을 빼고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우리 힘으로는 지칠 일도 주님의 권능에 기대면 지치는 법이 없으니까.

 

  나는 ‘믿음’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에 한 가지 정의를 보탤 수 있었다.

  ‘믿음’이란 우리의 손을 놓지 않고 붙잡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이 얼마나 신나고 고마운 일인가. ‘믿음’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움인가. ‘믿음'을 지닌 사람은 얼마나 강하고 행복한가.

 

  “예수님께서 “오너라."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마태 14:29-32)

 

                                                                                                      2011년 1월 20일 엉터리 레지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