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마리아 선생님
저는 지금 암요양 병원에 들어와 있습니다. 재발 후 받은 항암치료를 이겨내지 못한 탓인지, 폐전이 의심 진단을 받고 말았습니다. 치료에 최선을 다해야겠기에, 아들 중간고사와 방학 기간에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입원을 결정했습니다.
산속 병원으로 들어오려면 차가 서로 비켜가지 못하는 외길을 십 분쯤 지나야 합니다. 한 번 들어서면 물러설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어서 여간 겁이 나는 게 아닙니다. 제 삶의 마지막에 주님을 뵈러 가는 길도 그렇게 가족을 떠나 저 혼자 가야 하겠지요. 아직은 그 순간의 느낌 한 자락도 온전히 짐작할 수 없지만, 서른 아홉에 암환자가 되어, 벌써 십 년 째, 수도 없이 제 마지막 순간과 남겨질 아들들의 삶을 상상하며 슬퍼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불행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제가 영원한 생명을 ‘이미 살고 있음’을 믿기에, 제 생명의 주인께서 저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가끔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어쩌다 가톨릭 신자가 되어서, 이런 행운을 누리고 사는지 몰라’.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억세게 운이 좋아 ‘믿는 자’로서 고통을 겪고 ‘믿는 자’로서 인내하고, ‘믿는 자’로서 희망하며 삽니다.
저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을 제일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일부러 제자들이 문을 다 잠가놓고 있을 때를 택해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대보지도 않고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닫힌 제 마음의 문을 여시려고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놀라운 일을 벌여 평화의 인사를 건네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토마스처럼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못자국과 옆구리 상처를 지닌 채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저도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의 기억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게 되겠기에, 제 삶의 모든 순간은 그지없이 귀하고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영원 속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고,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실 것이기에,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이 세상에서의 삶이 비로소 값지고 아름답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기쁨도 고통도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제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얼마나 힘들어하고 방황하며 지냈을까요?
이제는 주님께서 제 삶을 ‘사랑으로’ 주관하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제 죽음 또한 ‘사랑으로’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제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제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해도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선생님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미소 짓는 것도, 이렇게 그리워하며 편지를 쓰는 것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저도 슬퍼집니다. 하지만 이 슬픔도 영원한 생명 안에서는 아름다운 빛을 내는 기억이 될 것이기에 아쉬워하지 않으렵니다.
선생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제게 남은 삶이 오 개월이든 오십 년이든, ‘영원한 생명을 믿는 이’답게 살아야 할 텐데, 그 기쁜 소식을 살아내어 고통 받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싶은데, 제가 너무도 부족하여 쉬이 넘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래도 지금 저는 분명 행복합니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은 법이라지요. 병원 마당은 봄꽃으로 눈이 부시고,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지 환우들의 웃음소리는 파릇파릇 푸르기만 합니다. 삶은 참 아프도록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제 행복을 통해 찬미 받으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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