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5년

☆ 병자성사 받았어요.^^

김레지나 2015. 4. 23. 21:27

기쁜 소식임돠!

 

어제 병원 근처 성당 신부님과 봉사자분들이 오셨어요.

제가 그제 저녁에 상당히 중한 환우 한 분을 위해 병자성사를 청했었거든요.

2009년에 세례 받은 50세 형제님이 한 분 계신데, 최근 몇 년 성당에 못 나가고 계시고,

대장암이 복막, 간 등에 퍼져서 통증이 넘 심하고, 쓸 항암약도 더 이상 없다고 해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인데.. 넘 착한 분이어요.

제가 병원을 나가야할 것 같은데, 이곳 분위기가 영~~ 거시기해서, 그 형제님이 성사 못 받고 임종하게 되면 우째야쓰까 걱정이 되더라구요.

말기암 환우들은 멀쩡하게 지내다가도 갑자기 통증이 심해지거나 상태가 악화되면 본병원으로 떠나서 곧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형제님이 신경 차단술을 받고 통증이 견딜만하다고 해서, 저희가 모시고 근처 성당에 가서 성사 받겠다고 부탁드렸어요.

마침 저녁에 기도 모임을 하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바로 병원에 와서 성사를 주시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지요.

모두들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지요. 

 

어제 신부님과 세 분의 구역장님이 오셔서 이곳 환우 여섯 분에게 병자 성사를 주셨어요.

성사 받는 중에 모두들 우시더라구요. 모두들 눈물이 나고 마음이 평안해졌다고 고맙다고 하셨어요.

한 분은 췌장암 4기로 두 차례의 위험한 수술 끝에 중환자실에 계시다나오신 분이고,

한 분은 유방암에서 폐전이가 되신 분이고,

한 분은 담낭암인데 복막, 간전이가 되신 분이고...

 

모두들 하느님께서 주신 멋진 선물이라고 기뻐했어요.

신부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마침 기도모임 중에 알려지게 하시고,

성사 청하자마자 '지체없이' 와서 위로받게 해주시고,,

하느님께서 가톨릭 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귀하고 필요한 것인지 알려주시려고 서두르신 게 분명하지요.

 

신부님께서 한 달에 한 번씩 병자 영성체하도록 청하면 오시겠다고 하셨구요.

급한 환자 병자 성사도 청하면 바로 와주시기로 약속하셨어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봉사자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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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3. 세상 속 교회


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징

  근래 가톨릭 신자들이 겪는 정체성 놀란에는 다종교 사회 안 에서 '내가 왜 굳이 가톨릭 신자로 계속 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적지 않은 의문에서 시작된다. 가톨릭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마 음의 평화를 찾으며, 번거로운 교회법이나 교회의 규정에 얽매임 없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개신교도 있고, 의무를 지우지 않는 불교의 수행에 매력을 더 느낄 수도 있기 때 문이다.

  더욱이 종교적 신념이 상대화되는 오늘날 내 신앙이 남의 신앙과 별로 다를 것 없다는 위기의식은 별다른 종교적 체험을 하지 못한 가톨릭 신자에게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혼란 에 이르게 하는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누군가 내게 "왜 굳이 가톨릭 신자로 남고 싶어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 sacra - ment)'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가톨릭교회의 '성사' 하 면 '칠성사'를 떠올리기 쉬운데, 실상 '칠성사'란 농담처럼 말 하는 불교 사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보이지 않 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징을 통해서 전달해 주는 교회의 자기 이해의 일곱 가지 방식'을 일컫는다.

 

  '교회의 자기 이해 방식'이라는 어려운 말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인간의 종교적 갈망을 제도적으로 채워 주는 공동 체 가운데 하나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이 역사 안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한 인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났음을 깨닫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여기서 '볼 수 없는 하느님 은총'이란 우리가 흔히 필요할 때 내게 꼭 맞는 맞춤형 선물꾸러미를 하느님이 주시는 그런 형태의 은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궁극적 완성에 이르는 길이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느끼고, 그분의 은총이 구체적으로 내 피부에 와 닿는 현실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하느님 은총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인 한 인물 나자렛 예수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 해 '볼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났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종교다.

  곧 인류의 죄악과 모순 속에서 실패나 끝처럼 보이는 예수의 죽음을 뛰어 넘는 부활사건을 통해 하느님 은총이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의 실존을 거는 신앙 공동체를 말한 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이러한 희망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신'(요한 14,9 참조) 예수님 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하느님 은총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성령) 의 도움으로 깨달았거나 깨닫고 싶어하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처럼, 교회를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를 세상에 드러내야 할 '표징이며 도구'(교회 1항)라고 선언했다.

  '표징이자 도구'로 자신을 이해한 가톨릭교회는 본성적으로 성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볼 수 있는 구조들, 예를 들어 교계제도, 전례행위, 공동체 삶,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구원과 희망이 이들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고백한다.

 

  가톨릭교회의 칠성사는 인간 구원을 향한 하느님 은총이 특별 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내리는 선물이 아니라, 개인과 온 인류의 삶의 여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곧 누구나 탄생하고(세례성사), 성장하여(견진성사), 먹고 살며(성체성사), 죄를 짓고 용서받으며(고해성사), 배우자를 만나 신뢰를 약속하거나(혼인성사), 교회 공동체를 위해 평생 헌신하기로 결심하고(성품성사), 질병의 고통과 죽음 속에 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병자성사) 생生의 모든 여정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성사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이 교회의 전례 행위 안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전달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말하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성사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때가 되면 받아야 하는 그런 형식적인 교회 예절이 아니다. 부모의 신앙 때문에, 남들처럼 첫영성체 나 견진을 받을 때가 되었으니까, 싫지만 신자의 의무니까 미 사에 참석하고 때가 되면 고백할 것이 없어도 판공성사라도 봐 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체를 모시면서도 그 준비나 느낌을 가질 겨를도 없이 살며, 때가 되어 성당에서 축복받는 결혼을 하 고 싶어 혼인면담을 청하는 그런 형식적인 가톨릭 신자의 관혼상제 예절이 아닌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사는 신자라면 누구나 '성사적인 삶'을 살아 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 은총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은총은 신비종교나 뉴에이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숨겨진, 그래서 '신비술 esoteric'을 통해서만 찾아낼 수 있는 자기 구원 능력과 평화 가 아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금은 희미하게 볼 수밖 에 없지만 세상에서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표징이나 사건 을 통해 느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자 열정으로 '체험體驗'할 수 있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거부하거나 도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숨 쉬고 살아계시며 끊임없이 자신을 선사하시는 자리이다. 그분은 우리 시대의 감각적인 다양한 영상매 체 안에서 즐기는 '볼거리'나 '들을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가까이 있지만 좀처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또 다른 '볼거리' 안에서 힘차게 말씀하시고 손을 내밀어 주신다.

  우리가 매주 성체를 모실 때, 성경 말씀을 들을 때, 나와 다르지만 내가 몰랐던 새로운 인생의 희망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바라볼 때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웅변처럼 다가오고 있음을 읽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 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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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병자성사의 특별한 은총은 무엇입니까?

첫째, 병자성사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강화함으로써 병이나 노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평화와 용기를 줍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병들고 노쇠한 이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만연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일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큰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시는데, 병자성사는 이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또한 죽음에 직면한 사람은 병자성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둘째,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자의 영신적인 구원에 적합한 경우에는 건강이 회복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그 목적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서 구원을 얻게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데 있었습니다. 모든 환자는 예외없이 자신의 병이 나아서 다시 건강해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은 그 사람의 구원에 유익이 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도 내에서 치유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열심히 기도한다고 모든 병이 반드시 다 치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청하였지만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는 대답만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육체적인 치유만을 바라고 병자성사를 반복해서 받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셋째, 병자성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병자 자신의 고통을 일치시키도록 돕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받으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감수하셨습니다. 병이 낫지 않더라도 열심히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합치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다"(골로 1,24)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통이 자신과 교회에 선익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넷째, 병자성사는 아직 남아 있는 죄를 용서하는 은혜를 베풉니다. 야고보 사도는 병자를 위한 기도와 도유가 "병자를 구할 것이고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실 것이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병자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야고 5,15 참조).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는 죄가 있다면 병자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게 됩니다.


병자성사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병자성사의 은혜는

첫째, 생명의 은총을 증가시키고

둘째, 병자를 위로하고 유혹에 강하도록 하고

셋째, 경한 죄를 사면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고

넷째, 구원에 유익하다면 육체의 건강을 줍니다.


병자성사를 받으면

첫째, 상존의 은총(성화은총)을 더해 주고

둘째, 죄와 벌이 사해집니다.

셋째, 육신의 병을 낫게 해주고 병자의 영혼을 견고하게 하여 악의 세력과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서 굳세집니다.

넷째,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갖게 되고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병자성사로서 중죄가 사해질 수 있습니까?

병자성사는 병자가 고백할 수 없더하도 그가 통회하면 중죄가 사해집니다.


생전에 몇 번이나 받을 수 있나요?

병자성사는 반복해서 여러 번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병이 들었을 때마다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으며,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를 잘 받고, 신망애 삼덕을 발하고, 기도하며 특별히 만사를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1)우선 병자로 하여금 신망애 삼덕의 정을 일으키도록 하여주고, 자기 죄를 성찰하여 통회를 발하게끔 하고, 타인과 불목한 일이 있으면 용서케 하고, 채무관계라든가 기타 병자로 하여금 심적 부담이 없게끔 해야합니다.

(2)육신의 준비 : 성유를 바를 부분(이마와 두손바닥)을 깨끗이 합니다.

(3)가족의 할 일 : 방을 깨끗이 하고, 조그만 탁자위에 십자고상, 초, 성수, 깨끗한 물을 담을 그릇 하나, 수저 하나를 준비합니다.



어떻게 청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병자의 상태가 위급하지 않은 경우에는 본당 사무실이나 구역 책임자에게 신청해서 신부님과 시간을 맞춰 약속하면 됩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경우에는 병원의 원목 신부님에게 청하거나, 원목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경우에는 소속 본당 신부님이나 그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계시는 신부님에게 청하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도 병자성사는 죽기 전에 받는 성사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성사를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병자성사를 청해서 받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성사는 공동체의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환자의 가족이나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병자성사가 집전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병고를 겪어야 하는 것은 환자 자신이지만, 가족이나 신자들이 함께하면서 관심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면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병자성사 예식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병자성사는 말씀 전례로 시작해서 성사의 핵심 부분인 안수, 도유로 이어집니다. 이는 말씀과 성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좀더 자세히 얘기하면, 사제는 성호경으로 예식을 시작하고 통회의 기도에 이어서 성경 말씀을 읽고 간단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구하는 호칭기도를 바칩니다.

말씀 전례에 이어서 사제는 말없이 병자에게 안수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교가 ?善뵉? 성유를 병자의 이마와 두 손에 바르면서 다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그리고는 마침 기도를 바칩니다.


죽음에 직면한 환자는 병자성사 외에도(아직 의식이 있으면) 성체를 영하게 됩니다.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 영하는 성체를 노자성체(路資聖體)라고 합니다. 먼 길을 떠날 때 노자를 지니고 가듯이 천상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노자로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함께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병자가 지은 죄가 있으면 병자성사를 받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마땅 합니다. 그러나 병자성사 중에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병자성사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 곧 이어서 병자성사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두가지 성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 때에는 함께 있던 가족들이나 신자들은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신부님께만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사제, 즉 신부와 주교만이 이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의 집권자는 사제입니다. 특별히 본당신부는 그 본당 신자에게 성사를 줄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성경에 병자성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마르코 복음 (6,13 참조)에는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를 받을 사람과 병자성사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원로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이렇게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예시되고 야고보 사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병자성사입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