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김레지나 2014. 3. 28. 14:27

차동엽 신부님의 <신나는 복음 묵상> CD

가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 부록 책자 P.19

 

 

2) 그날 그 시각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마태 21,3)

 

 

 오늘 당신의 마지막 사명을 다하러 예루살렘에 입성할 준비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문득 저의 지난날을 떠올려 봅니다.

 당신께서 '필요하셨던' 어린 나귀 한 마리, 그렇게 예수님의 두 발이 되어드린 나귀처럼, 당신의 부르심에 결국 응답할 수밖에 없었던 저의 젊은 날을요.

 

 

 가끔씩 이런 저런 기회에, 제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드려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더 세세하게 그 소중한 기억을 복음 묵상 가족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대학 진학 후, 당시는 제 5공화국 독재가 서슬 퍼렇던 때로 온 나라가 곳곳에서 시위와 탄압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1980냔, 5.18이 터지고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정릉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에서 서인석 신부의 예언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사회 불의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 예언자를 불러 토설하시는 불같은 말씀들, 호소와 협박, 회유를 반복하며 당신 백성을 희망의 미래로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야훼의 한결 같은 사랑, 불림 받은 예언자들의 기구한 운명들..... , 점점 고조되던 신부님의 강의는 절망과 좌절에 빠진 당시 정치적 현실에서 분명 빛이었습니다.

 

 정릉 언덕을 내려오던 저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싶어서 가슴을 만져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 뜨거움이 저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기계설계학이라는 전공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어지러운 이 나라에 도움이 되길 희망했습니다. 신부 아니면 변호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고 군에 입대하여, 해군 중위 계급을 단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은 1982년 11월쯤, 저는 결국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임관된 후 얼마 안 되어 조카가 생겼는데, 확신 없이 우선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할 즈음 조카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인 모를 고열로 생사를 오락가락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곧 소문을 듣고 온 자매들로 기도모임이 구성되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조카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토요일 오후 퇴근하고 나서야 그들과 합류할 수 있었듭니다. 바로 그날 기도 중에 그 모임의 한 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라!"

  생전 처음 보는 분이 저에게 그런 직언을 날리리 머릿속이 아찔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저의 내면에 이러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너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고 있었단다."

  이 말씀은 아시다시피 복음서에 나오는 구절로 하느님께서 우리 하나하나를 다 알아 주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인생 진로를 놓고 기도해 왔던 지난 5년 동안의 고뇌에 응답이 내린 순간이었습니다. 사제가 되라는 암시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승부수를 던진 것이, 성경을 임으로 펼쳤을 때 첫 번째로 눈에 띈 말씀을 하느님 말씀으로 알겠다고 기도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받은 말씀이 바로 루카 복음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구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성전을 보고 통곡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저는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쏟는 예수님, 오늘날 이 시대를 향해서 눈물을 흘리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성경 구절이 제 마음에 들어오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였습니다.

  "네가 지금 이런 내 심정을 알지 않니? 그렇다면 이 마음을 나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거라."

  저는 그 자리에서 "예"하고 응답하였고, 그러면서 평생 흘린 눈물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렸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스무 세 해, 저 말씀은 생생하게 제 기억에 살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마태 21,3)

 무릇 사제들이 그러할 것입니다만,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주님께서 불러 주신 그 운명의 날이 떠오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누가 이 말을 비켜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누가 이 말을 못들은 척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저희 복음 묵상 가족 각자가 그 부르심의 음성을 들은 그날 그 시각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