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기억할 글

소설가 최인호, 진자 사랑 깨닫게 해준 하느님 곁으로

김레지나 2013. 10. 11. 17:44

소설가 최인호, 진짜 사랑 깨닫게 해준 하느님 곁으로

몸과 마음으로 신앙 증거


 
▲ 최인호씨와 정진석 추기경이 2006년 3월 추기경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암 투병 중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고인은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천생 작가였다.
사진은 2004년 경기여고에서 강연하는 모습.
 

마지막 순간까지 작가로 살다 간 최인호(베드로) 작가의 장례미사가 9월 2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전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봉헌됐다. 이날 미사에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와 전 의정부교구장 이한택 주교 등을 비롯한 사제단과 유가족, 고인을 사랑했던 지인과 독자 등 600여 명이 참례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정 추기경은 장례미사 강론에서 "최인호 선생의 선종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면서 "단순히 말이 아니라 당신의 몸과 마음 전체로 가르침을 보여주며 특히 암 투병을 통해 신앙을 증거하셨다"고 추모했다. 또 고인에게 마지막 병자성사를 줬던 이야기를 꺼내며 "병자성사를 마친 베드로 형제님은 활짝 웃으시며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거칠고 험한 삶 속에서도 위로와 희망을 건네시던 형제님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을 감출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별예식을 집전한 염수정 대주교는 고인이 잠든 관에 성수를 뿌리고 분향을 하며, 고인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했다. 고별사는 영화배우 안성기(요한 사도)씨가 맡았다. 고인을 "인호 형님"이라 부른 안씨는 "주님의 부름이라 어쩔 수 없겠지만 서두른 발걸음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다"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단편소설 '벽구멍'으로 문단에 깜짝 등단한 뒤,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겨울 나그네」 「깊고 푸른 밤」 등을 선보이며 산업화와 권위주의 시대에 방황하던 청춘들과 호흡을 같이했다.

 '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린 그는 지난 50년간 100여 권의 책을 쓰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해왔다. 특히 1987년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한 후엔 「상도」 「해신」 「길 없는 길」 등 종교와 역사를 다룬 소설로 작가 세계의 폭을 넓혀갔다. 평론가들은 고인의 작품세계가 고인이 천주교 신자가 된 뒤부터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 자신도 세례를 받은 뒤 소설가로서 제2기의 삶이 시작됐다고 했다. 생전 "소설가 최고의 꿈은 사랑"이라고 말한 고인은 평화방송 TV에 출연해 가톨릭 신자가 된 뒤에야 비로소 진짜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2008년 침샘암 선고를 받고 글쓰기를 중단했던 고인은 2011년 항암치료로 인해 손톱이 빠지는 고통을 이겨내며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올해 초엔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을 펴내며 마지막까지 그토록 원하던 작가로서 삶을 살아냈다. 글쓰기에 타고난 천재적 감각은 그에게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동리문학상 등 숱한 문학상을 안겨줬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같은 고인의 공적을 기려 9월 28일 고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천생 작가였다. 암 투병으로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지고, 먹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음에는 그를 괴롭게 하는 건 암이 주는 육신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는 "5년에 걸친 투병 생활 중에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글을 쓸 수 없는 허기였다"고 했다. 작가가 아니라 환자라는 것이 제일 슬펐고, 그래서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는 않다"며 성모상을 붙들고 살려 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펴낸 「최인호의 인생」에서 "내 방 탁자 위에는 1987년 여름, 영세할 때 선물로 받은 키 60센티미터 정도의 '파티마' 성모상이 있다. 나는 매일 막무가내식 '떼' 기도를 올릴 때마다 성모상을 두 팔로 껴안고 합장하여 모은 성모님의 손에 머리를 들이댄 공격적 자세로 묵주기도를 올렸다"고 썼다.

 고인은 지난해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에 투병생활을 공개했는데, 극심한 고통 앞에서 울고 불며 하느님께 떼쓸 수밖에 없는 현실과 그 현실을 통해 체험한 신앙을 솔직하게 고백한 글은 세간에 화제가 됐고 특히 고인 같은 암환자에게 큰 희망과 감동을 줬다.

 성체조배와 피정을 즐기던 그는 가톨릭 문인들에게 신앙 모범이기도 했다. 고인이 다니던 서울 서초동본당 주임을 지낸 임병헌(서울대교구 사무처장) 신부는 "아픈 와중에도 매주 미사에 빠지지 않고 꼭 성체조배를 하고 갔다"면서 "어느 날인가는 성체조배 중에 찾아와 '신부님 성체가 고픕니다'고 말씀하셔서 성체를 모시게 해드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고인의 장례미사를 공동집전한 이한택 주교는 "(최인호 작가와는) 피정 때 종종 만났다"면서 "30일 이냐시오 영신수련피정을 지도하기도 했었는데, 훌륭한 작가기도 하지만 훌륭한 신자이기도 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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