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기억할 글

각계 전문가들 ‘나는 이렇게 힐링한다’

김레지나 2013. 1. 5. 20:26

일과 세상에 지친 그대여, 너 자신을 믿고 사랑하라

등록 : 2012.12.30 21:22수정 : 2012.12.30 22:47

각계 전문가들 ‘나는 이렇게 힐링한다’

다시 새해다. 오늘의 해와 내일의 해가 다를 게 없지만, 우리는 시간의 마디를 가는 해와 오는 해로 나누어 놓았다. 2012년의 고통과 고난이 2013년에는 사라졌으면 하는 게 우리 모두의 바람이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고, 삶의 고통과 고난도 계속되기 마련이다.

사소한 개인사부터 이웃과 사회에 대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새해를 맞는 우리 머릿속은 복잡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고통보다 절실하게 느끼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치유의 경험을 나눔으로써 위로와 위안을 얻게 되는 이유다.

각 분야에서 자신만의 성취를 이룬 이들에게 자신만의 ‘힐링(치유) 비법’을 물었다. 이들도 우리처럼 좌절하고 극복하고 또 희망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들의 이야기가 오늘의 고통을 덜고 내일의 희망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박현철 최유빈 기자 fkcool@hani.co.kr

고미숙 (고전평론가)
걷고 책 읽으며…이 또한 지나가리라

제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소통이 잘 안될 때 저는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아요. 스트레스를 당장 없애는 특별한 비법은 없어요. 그저 산책하고 책을 읽어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특별한 뭔가를 하기보다는 평소에 하던 일들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려요. 일상을 유지하면서 힘든 감정과 어려움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스레 해소되길 기다리는 거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열을 받는 거예요. 화가 위로 뜨는 거죠. 그럴 땐 화를 내리는 게 중요해요. 화를 내려 머리가 맑아져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요. 그런 면에선 걷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걸으면서 열을 아래로 내리고 마음도 진정시킬 수 있거든요.

힘들다고 술 마시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술을 먹거나 일탈적 행동을 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건 몸속 열기를 다른 것으로 바꿀 뿐이에요. 열을 열로 바꾸는 짓이죠. 당장은 해소된 것 같지만 더 쌓이는 거예요. 큰 병이 걸릴 수도 있어요.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문화, 즉 열을 부채질하는 문화밖에 없다는 게 우리 사회의 더 큰 문제예요. 그런 문화로는 사회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 주변에 ‘멘붕’을 겪는 사람이 많은 것일 수도 있어요.

자신의 욕망과 능력 사이의 간극이 클 때 닥쳐오는 게 ‘멘붕’인 거 같아요.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 간극이 더 커지죠. 욕망이 크다 보니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 ‘간극의 상황’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게 중요해요. 그런 상황으로 자신을 내몬 뒤엔 ‘멘붕’을 겪지 않으려고 노력해봐야 실패하기 쉽죠.

예전엔 저도 시련과 좌절을 많이 경험했지만, 이젠 ‘멘붕’에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이제 어지간해선 ‘간극의 상황’에 빠지지 않게 됐거든요. 새해가 오고 있어요. 찬찬히 걸으면서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 사이의 간극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문경란 (서울시 인권위원장)
“아픔 공감해줄 친구 만들길”

모든 사람과 사물은 각자의 역할이 있잖아요.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까지 힘들어지죠. 국가인권위원회가 제구실을 못할 때 많이 힘들었어요. 현병철 인권위원장 아래서 엄청 스트레스 받았거든요. 그럴 때 저는 몸을 움직여요. 적어도 한시간은 걸으면서 찬바람을 쐬는 거죠. 나무도 눈에 들어오고, 사람들도 보이고. 나를 지배하고 있던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어요. 절대적 절망감에 빠진 사람에겐 기댈 사람이 있는 게 중요하다고 해요. 다른 사람 죽을병보다 자기 고뿔(감기)이 더 중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을 상대가 하나라도 있으면 최악의 선택은 안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지금 여러분이 ‘멘붕’에 빠져 있다면, 스스로 그걸 해결하려 들기보다 다른 사람의 멘붕을 공감하고 위로해주세요.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도 치료가 되는 걸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제도적 해결보다 절실한 건 서로를 신뢰하고 공감하는 일이에요. 인권의 시초도 공감이거든요.



변영주 (영화감독)
“분노에 앞서 상황 분석부터”

새 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겁나고 무섭죠. 그런데 막상 안 좋은 결과를 맞닥뜨리면 ‘그래서 어쩔 건데’라고 생각해요. 잘 찾아보면 다 보이죠. 뭐가 안 좋았는지. 그래서 분석하고 또 분석해요. 총론부터 각론까지 꼼꼼히 살펴보면 무엇이 문제였나 찾을 수 있어요. 위험한 건 목표를 정해서 분노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패배의 이유가, 고통의 이유가 명백해야 한다고 착각하게 되면 조급해져요. 선거에 패한 뒤 ‘부정선거 때문이다’ ‘종편 때문이다’ ‘누구누구는 나쁘다’는 식으로 무엇인가를 증오하면 현실이 더 나아질 거라고 착각하는 것처럼요. 중요한 건 사태를 디테일하게 바라보는 거죠. 누구의 잘못인지 찾지 말고, 왜 그런 것인지 살피는 거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지지한 50대들 나쁘다’가 아니라 ‘왜 그들이 박근혜를 지지했을까’를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멘붕’을 겪으며 분노하는 건 한번만 치르는 게 좋아요. 초조해하면서 두렵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의 상황을 담담하게 들여다보며 분석해 보세요.



전유성 (개그맨)
“삶보다 더 어려운 책 읽어요”

저는 골치 아픈 일에 맞닥뜨리면 평소 읽고 싶었던 어려운 책들을 읽어요. 어려운 한자말이 많거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심오한 고전 같은 책이죠. 가볍게 넘어가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들을 읽다 보면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공연은 ‘대박’을 터뜨리겠구나 생각했는데 ‘쪽박’을 찬 적이 있어요. 투자했던 돈을 다 날리고 완전 거덜났어요. 정말 죽고 싶었죠. 그때 골방에 들어가 책을 읽었어요. 이상의 단편문학선을 보는데 뜻도 모른 채 그냥 읽었어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땐 사전 찾아 가면서 읽었죠. 그렇게 골몰하면서 빠져들다 보면 조금씩 잊게 돼요. 힘든 현실을. “내가 지금 멘붕이다”라고 온갖 사람들한테 말하기도 해요.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위로의 말을 해주는데 그중에 딱 뇌리에 꽂히는 게 있어요. 그 말이 기운을 주지요.



강신주 (철학자)
“지금 겪는 고통은 순간이다”

칼럼을 쓰고 나면 공격성 댓글들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저도 상처받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강연과 칼럼 쓰기로 지쳐 있을 땐 더욱 그런 비판에 민감해지고 스트레스가 심해집니다. 그럴 때 저는 산에 오릅니다. 왕복 8시간 코스를 5~6시간 안에 주파합니다. 일부러 더 힘들게 산행을 하는 거죠. 몸은 엄청 힘든데, 그럴수록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마음은 더 편해집니다. 내가 받은 고통과 상처가 별거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는 더 커져 있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 힘든 줄 압니다. 관계의 범위가 좁으면 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와 연대가 중요합니다. 예컨대 자식을 잃은 부모에겐 ‘내 아이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혼자 생각에 빠지는 것보다, 전쟁에서 자식 여러명을 잃은 할머니가 잡아주는 손이 더 큰 위로가 됩니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거나 더 큰 고통을 겪었던 사람을 만나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진종오 (사격선수)
“피할 수 없으면 즐기세요”

사격은 총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운동입니다. 올림픽처럼 큰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매우 힘듭니다. 체력도 바닥나고 정신적으로 힘든데, 문제는 그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럴 땐 지금의 상황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지난 런던올림픽에선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로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대처하라’는 유의 심리학 책을 읽었습니다. 평소엔 취미 삼아 낚시를 합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지고,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취미활동은 여유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시간은 만들지 않으니까 없는 겁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합니다. 직장 상사가 나를 미워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적어도 나를 미워할 만큼은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이구나’라고요.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나부터 냉소적 인간 되지 않기”

저는 사실 ‘멘붕’을 겪지 않아요. 항상 친구가 많았고, 나를 내세우지 않을수록 나는 물론 이 사회가 더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학생들에게도 “항상 친구를 사귀고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요. “그런 공간을 만들어 그런 공간에 있으려고 노력하라”고 말하죠. 최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공황상태에 가까운 혼란은 마땅히 기댈 만한 친구가 없고, 주변이 대부분 적대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친구가 있다면 이 정도의 혼란이 오진 않죠. 지금 우리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어요. 과거엔 아무리 궁핍하고 힘들어도 서로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런 관계들이 실종되고 ‘무연사회’, 연고가 없는 사회가 돼버렸어요. 혹시 내가 경쟁과 적대의 인간이 아닌지, 냉소적 인간은 아닌지 스스로 따져묻고 그런 인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해요. 경쟁과 적대감에 사로잡혀 탈락의 공포와 불안 속에서 혼자 견디려다 보면 멘붕이 오는 거예요.



윤태호 (만화가)
“힘든 순간 그 속에서 답 찾아야”

우리 모두 지금은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몸이나 마음이나 시간에 맡겨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상황에 적응할 때까지 무리하지 않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상태를 지켜보는 거지요. 최근에 우리 모두 무언가를 많이 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잖아요? 그렇게 애써 왔으니 이젠 가만히 놔두고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예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날 때까지 무리하지 않으려고 애쓰죠. 내 작품을 기다리는 팬들 때문에 시간에 쫓길 때도 있고, 가족들의 생계도 이어가야 하니까 일을 하긴 해야겠죠. 그래도 억지로 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물론 밥벌이의 고통은 가만히 내버려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슬럼프에 빠지더라도 작품은 내놓아야 하고 연재는 해야 하니까요. 그럴 땐 별수 없어요. 책상 앞에 어쨌건 붙어앉아서 해결해야죠. 일이니까. 연재가 시작되면 그 고통을 절대 피하지 않아요. 그 속에서 답을 찾아야 지금의 고통과 고난이 사라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