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사도신경>- 천지의 창조주 - 창조경륜, 진리와 진리를 충돌하지 않는다.

김레지나 2012. 7. 4. 21:30

차동엽 신부님의 책 <사도신경> p.69

 

4. 천지의 창조주

 

*창조경륜

 

  창조경륜은 전능자 하느님의 지혜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 사랑의 파트너로 만드셨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만 알고 그분의 사랑을 잘 모른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사랑을 동시에 담고 있는 낱말이 바로 '경륜'이다. 경륜은 '경제'를 뜻하는 영어 '이코노미'(economy)를 넓게 우주적으로 적용하여 확장된 의미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경륜은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으로 나누어 언급된다.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은 현재도 같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경륜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녹아 있다.

 

 먼저 창조경륜을 보자.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랑이 충만할 때다. 사랑이 차고 넘치면 창조를 하게 되어 있다. 연긴이나 배우자에게 혹은 자녀에게 자꾸 이것저것 만들어 주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꾸 뭘 만들어 주고 싶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원인도 사랑이지만 창조의 목적도 사랑이다. 결국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가.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서다. 우리를 당신 사랑의 파트너로 만드신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의 위상은 하염없이 격상된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 앞에만 가면 종인 양 오그라든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한다. 특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아예 고개를 떨어뜨리고 들지를 못한다. 그런데 당신 앞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사랑의 하느님이 속삭이신다.

  "고개를 들어라. 내 눈을 바라보아라. 나는 네 눈을 쳐다보고 싶지 네 머리통을 보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너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서 너를 만들었단다."

  그러니 하느님한테 자꾸 머리통만 보여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그분께 무엇을 보여드려야 할까? 바로 눈이다. 무슨 눈? 사랑이 그윽한 눈, 그것도 애인을 바라보는 눈을 보여드려야 한다.

 

  실제로 이 영성을 깊이 이해한 2-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각자의 삶은 하느님과의 러브스토리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과 러브스토리를 쓰는 것이다. 언제 태어나, 언제 사귀어서, 언제 친해지고, 언제 토닥거리다, 언제 토라져, 언제 헤어졌다가, 언제 멀어졌다가, 언제 다시 재결합하고, 그렇게 다시 깨가 쏟아지고, 이제 둘이 아나가 되고..... 주님과의 이 관계가 더 드라마틱하고 아름다워진다면야!

 

 

 

*진리와 진리를 충돌하지 않는다.

 

  창조 이야기가 나올 때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 진화론이다. 다시 말해 과학과 신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인데, 나는 전작 <잊혀진 질문>에서 이미 몇 대목을 상세하게 풀어놓은 적이 있다. 여기서는 아주 기본적인 것만 보려 한다. 더 관심 있는 독자는 그 책을 읽어도 좋겠다.

 

  '과학'과 '창조 신앙'은 어떠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던 종교와 과학은 긴 세월의 우여곡절 끝에, 근래에 들어와서 , 화해 관계에 들어섰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해서 갈릴래오를 파문했던 교황청이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로써 교회는 과학의 성과에 대해서 존중해 준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사실로 받아들여진 우주에 대한 정보가 창조 신앙에 적대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해서 유명해진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뼈있는 말을 했다.

 "약간의 과학(a little science)이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더 많은 과학(more science)이 그를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같은 취지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이렇게 밝혔다.

  "모든 학문 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 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내용은 다 함께 하느님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36항)

 

  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와 합리성에 입각한 과학은 서로 보완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둘 다 진리라면 서로 일치하게 되어 있다. 다른 한쪽이 거짓일 경우에만 충돌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진리와 진리는 상충하지 않는다."라고 천명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다.

 

  과학도 신학도 모두가 하느님 안에 근거하고 있으며, 창조구며 구원자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것이다. 신학이 하는 일은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삼라만상, 곧 우주를 완성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최종적인 의미를 추출해 내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관심은 철저하게 '왜?'에 있었지 '어떻게?'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인은 주로 '왜?'를 물었다.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를 '히브리적 사유'라고 한다.

  반면에 그리스인은 '어떻게'를 물었다.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인간은 어떻게 구성된 존재인가? 국가를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 이를 '희랍적 사유'라고 한다.

 

  이 '어떻게'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면 자연과학이 발달한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자연과학이 생겨나, 피타고라스부터 시작해서 수학, 물리학 등이 그리스 철학자들을 통해서 인류의 자연과학 발달에 기여했다.

  그런데 '왜'라는 질문을 자꾸 던지면 철학이 발달하게 되고, 영성 쪽으로 초점이 가게 된다. 이 의미를 찾는 물음은 신앙으로 가게 되어 있다. 곧 하느님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고통이 왜 발생했느냐"는 삶의 문제고, 영성이고, 신앙이 된다.

 

  성경은 유다인에 의해 쓰여졌으므로 이 '왜'라는 질문으로 주로 기술이 됐다. 그래서 창세기 1장도 '어떻게'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라는 걸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주의 기원이 하느님의 창조에 있다는 사실만 선언할 뿐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라는 과학적 질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6일간의 창조에 대한 기록 역시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창조의 '질서' 곧 왜 인간이 창조계의 절정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