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골목에 시장이 하나 있는데 정말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삼척동자도 한 번만 와서 구경하면 금방 그 뜻을 알 수 있을 만큼 오만가지 종류를 늘어놓고 파는 곳이다. 족히 일 킬로미터는 될 것 같은 골목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양편으로 상인들이 늘어서 물건을 팔고 있으니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쉽게 연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잉어와 같은 커다란 민물고기를 산 채로 비늘을 벗겨 팔고 있는 어물전. 그 앞을 지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방으로 튀는 엄지 손톱만한 잉어 비늘을 계급장처럼 머리에 달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채소를 파는 채소가게 아저씨는 업종과 맞지 않게 갈 때마다 웃통을 벗고 있는데 배가 남산만하다. 하긴 채소를 팔고 난 돈으로 고기를 많이 사먹으면 그리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산달을 맞은 임신부의 배처럼 커다란 채소가게 아저씨의 배와 진열된 채소들을 번갈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아이러니’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반면 돼지고기, 양고기를 파는 푸줏간 집 젊은 청년은 뼈만 앙상한 채 두툼한 비계가 붙은 고기를 연신 ‘스윽슥’ 썰어내고 있다. 몸매를 보면 아마 주인은 아닌 것 같고 그 집에 고용된 일꾼인 듯하다. 내가 단골로 이용하는 과일가게는 많은 다른 과일가게에 비해서 엄청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 집 아가씨가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주 고객층은 나와 같은 남자들이다.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세상의 이치니까......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양과자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유혹에 빠진다. “반 근만 살까? 아니야, 그냥 가. 틀림없이 지난번처럼 사다가는 먹지도 않고 버릴 거야.”
그 밖에도 국수집, 어린이 옷가게, 길거리 물빨래 세탁소, 신발가게, 휴대폰가게, 계란 파는 집 등등 골목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한 바퀴만 돌아봐도 금세 두세 시간이 홀랑 지나가 버린다. 다른 책에도 몇 차례 쓴 적이 있듯이 나는 어릴 적부터 시장 구경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시장 구경에 나설 때마다 나는 온통 신기한 물건들과 그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시장의 활기찬 분위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갔다. 지금도 시장에 갈 때마다 그때의 설렘과 그때의 재미가 온전히 남아 있어서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싼 시장 물건을 사는 일이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재미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인생의 재미라는 것을 뒤따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 재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값싼 물건을 구입하는 재미를 즐기다보면 가끔씩 그 값싼 물건의 ‘싼티’ 때문에 금방 실망을 하거나 황당한 일을 겪게 될 때가 있다.
며칠 전에도 시장에 나가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시장의 거의 끝부분까지 깊숙이 들어가 보니 만물상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 중에서 몇 집은 고장 난 선풍기를 고쳐서 중고로 되팔고 있었다. 꽤 괜찮아 보이는 선풍기가 한 대 있어서 얼마냐니까 40위안이란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선풍기는 작고 볼품없는 것도 백 몇 십 위안씩 하는데 비해 40위안이라면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이다. 마침 선풍기도 한 대 필요했던 터라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얼른 그 선풍기를 샀다. 집에 돌아와서 작동을 시켜보니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간다. 그런데 한 가지, 프로펠러 색깔도 청색이라서 시원한 느낌이 더하다는 장점까지는 좋은데 그 프로펠러의 재질과 두께가 아무래도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이 선풍기는 성능을 너무 잘 고쳐놓아서 그런 것인지 일단을 틀어놓아도 보통 선풍기의 삼단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영 불안하기도 했다.
선풍기를 산지 사흘 째 되는 날 밤, 40위안에 아주 ‘성능이 좋은’ 선풍기를 샀다는 인생의 재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요즘 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고 방안 온도가 30도에 다다르다보니 나같이 더위에 약하면서 잠자는 데에는 한없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밤이 무섭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될 정도다. 할 수 없이 침대 옆에 소파를 끌어다 놓고 그 위에다 선풍기를 틀어놓으니 좀 살 것 같았다. 타이머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몇 번을 확인한 다음에야 겨우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잠시 후, ‘우당탕’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스탠드 불을 켜보니 프로펠러가 산산조각이 나서 깨진 채 선풍기는 방바닥에 처박혀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아닌 밤중의 홍두깨람? 한 밤중에 산산조각이 나서 방바닥 이곳저곳을 뒹구는 프로펠러 조각을 치우고 있으려니 참 기가 막혔다. 선풍기를 확인해 보니 아직 모터가 작동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 프로펠러가 오랜 시간 빠른 속도로 돌다가 점점 헐거워져서 빠져버린 듯했다. 프로펠러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한참 동안 켰다 끄기를 반복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선풍기의 가장 중요한 부품이라고 할 수 있는 모터가 생생하게 돌아가는 데도 프로펠러가 없는 선풍기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는 바람이 와 닿지를 못했다. 하나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그럼 그게 아직도 선풍기인가? 아니면 선풍기 아닌 다른 무엇인가?
프로펠러 없는 선풍기! 그 밤에 땀 뻘뻘 흘리면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혹시 이런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봤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기도와 성사 생활이다. 이것은 선풍기의 핵심 부품인 모터와도 같아서 모터가 없이는 선풍기가 바람을 일으키기는커녕 아예 선풍기로서의 기능을 할 수조차 없듯이, 기도와 성사 생활을 제외하고 우리는 결코 신앙인으로서의 존재를 논할 수도 없다. 몇 년 동안 기도와 성사 생활에의 참여가 전혀 없는데도 ‘나는 여전히 가톨릭교회의 신자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면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이 그들을 교회 밖의 신자로 만들고 말았을까?
기도와 성사 생활이 선풍기의 모터에 해당된다면 ‘신앙인으로서의 행동’은 선풍기의 프로펠러와 같이 신앙인을 신앙인으로 불리게 하는 존재의 이유 (Raison D'Etre)에 해당된다. 기도와 성사 생활이 신앙인들의 삶에 있어서 내면적인 필수 요건이라면 신앙인으로서의 행동은 외면적인 필수 요건이 된다. 모터가 열심히 돌아가는데도 프로펠러가 없으니 나는 조금도 시원함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아직도 선풍기인가? 아닌가? 기도와 성사 생활에 열심한 많은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신자 분들에게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교회 안에는 기도와 노동만을 그들만의 특별한 은사로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분들의 기도와 노동은 그것이 은사이기에 또한 행동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도와 성사 생활에 충실한 것 이외에 좀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신앙인으로서의 행동이 요구된다. 기도와 성사 생활에는 열심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신앙인으로서의 행동이 함께 따르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은 아직도 온갖 차별 속에서 병들고 굶주리며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를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직도 수많은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마태25,44)고 모른 채 외면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 할까?
모터는 그저 무심하게 돌면서 프로펠러를 움직이게 한다. 바람은 프로펠러의 끝에서 나온다. 시장에서 싸게 구입한 프로펠러 없는 선풍기 앞에 땀을 뻘뻘 흘리고 앉아서 나는 그 날 밤 그런 생각들로 또 하루의 ‘스자좡에서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바람을 내고 싶다. 땀 흘리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을 시원하게 하는 바람나는 인생을 살고 싶다. 우리들의 바람난 인생! 어쩌면 그것이 우리 스승 예수의 마지막 바람이었을 것이다. 우리들 인생! 우리들 신앙! 바람 좀 내보자!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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