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의 시작과 함께 고통은 시작되었다. 어디서 무엇을 잘 못 먹었는지 정확히 성주간 월요일부터 시작한 설사는 부활이 코앞에 다가오는 날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곧 괜찮아 지겠지’라는 생각에 한국에서 가져온 지사제 몇 알을 먹으면서 버텨보았지만 갈수록 증세가 악화되는 것 같았다. 낮에는 좀 덜했지만 밤만 되면 발열과 함께 오한이 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덜덜덜’ 떨면서 지내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십번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려야 했으니 탈수 증세가 갈수록 심해져서 물을 많이 마셔야만 했는데, 물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곧장 화장실에서 다 쏟아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애초 올 해 성삼일은 석가장 주교좌 성당에 가서 다른 중국신자들과 함께 신자석에 앉아 전례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먹는 것 하나도 없이 사흘을 보내고 났더니 도저히 성당까지 갈 엄두도 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 목요일쯤에는 증세가 가장 심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현기증이 심해서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성 금요일 오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을 때 집 주인 노부부가 지난 번 내가 부탁했던 커튼을 거는데 필요한 핀을 가지고 집을 방문했다. 노부부는 깜짝 놀라면서 어디서 어떻게 아픈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말할 기운도 없었고 목소리가 갈라져서 말도 잘 나오지 않는 상태라서 그런 물음들이 그저 귀찮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 표정에서 그런 무성의함이 읽혀졌는지 노부부는 조용히 앉아 있다가 곧 집을 떠났다.
잠시 후 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침대에서 문 앞까지 가는데 어찌나 한기가 느껴지던지 결국은 신경질이 나서 ‘도대체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다. 문 앞에는 집 주인 노부부가 미안한 표정이 가득한 채 서 있었다. 노부부는 중국인들의 민간요법에 따라 배탈설사에 좋은 흑설탕, 생강, 마늘, 좁쌀이며 실처럼 가는 국수 등을 한 아름 사와서 이건 어떻게 해서 먹으면 좋고, 저건 이렇게 해 먹어야 하고 등등 한참을 설명하셨다. 그분들의 정성에 감동한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이번 일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너무나 친절하신 두 분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 감동이 얼마나 컸던지 두 분의 딱딱하고 쭈글쭈글한 손을 만지면서 한참을 고맙다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성 토요일 아침, 금식하는 것만으로 다스릴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노부부가 사다주신 생강을 몇 조각 썰고 거기에 흑설탕을 듬뿍 넣어서 뜨거운 물에 녹여 마셨다. 그리고는 겨울 파카를 다시 꺼내 입고 집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너무나 화창한 봄 날씨에 반팔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차례를 기다려 진료를 받았다. 몇 가지 검사를 한 뒤에 세균성식중독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에 필요한 약을 받아 집에 돌아왔다. 좁쌀죽을 끓여 먹으면서 약을 복용하면서 증세는 바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일단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확연히 줄면서 체온 조절 기능이 회복되어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그리고 맞은 부활의 아침! 말 그대로 부활의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훨씬 초롱초롱해진 정신으로 부활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나니 이제는 정말 영혼마저 다시 살아난 느낌이 들었다. 아! 부활이란 좋은 것이구나! 상쾌한 것이구나! 따뜻한 것이구나!
부활! 부활의 아침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부활이지만 매년 부활을 맞이하는 마음은 항상 다르다. 올 해의 부활은 육체적으로 지극히 고통스런 성주간을 보내면서 맞이했기에 오히려 꼭 필요한 전례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묵상하면서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이 여느 때보다도 더 큰 것 같다. 주님의 부활은 언제나 현재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주님의 부활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주님의 부활은 결코 이천년 전의 과거에 유대인들의 땅에서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항상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재의 사건이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부활이 아니고 과거 이천년 전에 ‘있었던’, 혹은 우리가 이생을 마감한 이후에 ‘있을’ 부활 사건이라면 그것들은 우리들의 신앙의 영역에 해당할 수는 있지만 우리들의 존재의 영역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과거와 미래의 부활은 철저히 하느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신앙은 항상 삶 안에서 검증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가 부활은 믿는다면(신앙),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어야한다(존재). 주님은 이 땅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이 땅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이 땅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능성 역시 활짝 열어놓으셨다. 주님의 부활은 이 땅에서 죽었다가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길만을 열어놓으신 것이 결코 아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저절로 부활할 거라고? 천만에!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있는 부활은 우리들의 신앙적 노력을 철저히 요구한다. 마치 병을 낮기 위해서라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웅크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젖 먹던 힘을 내서라도 병원에까지 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병의 원인을 알고 그에 대한 합당한 처방약을 받을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의례 이맘때면 지내는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순 기간 동안 이래저래 극기하느라 고생했고, 특히 성주간은 성가 연습이다, 전례 연습이다 하여 많이 바쁘게 지냈으니까 받는 전례상의 선물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부활은 부활 주일이 지나자마자 이천 년 보다도 더 까맣게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좀 더 깊은 물음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다.
왜 당신은 부활을 기념하는가?
주님의 부활이 당신에게 던져주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아니,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이 당신에게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체험일까 한 번 상상해 보라. 내가 죽었는데, 혹은 내가 점점 죽어가고 있었는데 다시 살아났다! 세상에 이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인 체험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놀라운 부활의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꼭 한 가지 선행되는 조건이 있다. 죽어야 한다! 새 삶을 원한다면 옛 삶을 죽여야 한다. 그러니 지금의 내 삶 안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것들이 생생하게 고개를 들고 살아있는 한 나의 부활은 아직 요원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단 한 순간이라도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부활의 가르침을 깨닫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던져지는 부활의 의미를 붙잡기를 원한다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마음을 비춰봐서 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건강하게 살아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지, 무엇이 다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기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도 보지 못한다. 자신의 부활은 더더욱 보지 못한다.
좀 더 깊이 있는 부활 신앙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좀 더 생생하게 부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부활 달걀에 그림을 그리면서 빼앗기는 시간 대신에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눈을 감고 앉아라! 제발 고양이 색깔에 정신 팔지 말고 당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라!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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