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개구멍에도 영성이 살아있다.

김레지나 2012. 2. 13. 20:49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중국의 한 제약 회사 사원 아파트가 모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그 제약 회사에서 현재 일하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과거에 그곳에서 일했던 은퇴자들이 대부분이다. 원래 우리 동네로 통하는 출입구는 사방으로 많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 군데만 빼놓고는 모두 철문을 굳게 닫아 놓아 출입을 할 수 없게 해 놓았다. 하지만 누가 그랬는지 곳곳에 닫힌 철문마다 두 세 칸의 쇠창살을 쇠톱으로 잘라서 개구멍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우리 동네 사람들은 멀리 돌아 정문으로 다니지 않고 주로 그 개구멍을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매일 이동하는 동선 중의 개구멍 두 곳이 연속으로 폐쇄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두 곳 모두 옆 동네를 통하여 큰 길로 나가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깔끔한 용접 기술로 아직 녹이 채 슬지도 않은 반짝거리는 새 창살을 써서 그 곳을 봉쇄해 버린 것이다.

요긴하게 사용되던 지름길을 놔두고 먼 길을 돌아 정문으로 출입을 하는 수고를 할 때마다 입이 한 치는 튀어 나와서 불평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사람들의 발걸음이 다시 개구멍 쪽으로 이어진다 싶어서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오, 마이 갓!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직도 세상 곳곳에는 많은 의인들이 살아서 활동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 의인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깔끔한 용접 기술을 능가하는 더 깔끔한 쇠톱 솜씨로 쇠창살 한 칸씩을 잘라서 다시 개구멍을 뚫어 놓은 것이었다. 아무리 모질고 각박한 세상이라고들 말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몇몇 의인들에 의해서 ‘편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나는 다시 뚫린 개구멍으로 분주하게 드나들었다. 그런데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일까? 자꾸 출입을 하다 보니까 쇠창살을 한 칸 씩만 잘라서 뚫어 놓은 새 ‘출입구’는 두 칸을 잘라 놓았던 예전의 것에 비해 폭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법 날씬함을 자랑하는 내가 몸을 세로로 해서 간신히 빠져 나갈 정도이다 보니 배가 많이 나온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먼 곳을 돌아 여전히 정문으로 출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역시 의인들은 섬세한 배려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어느 날 아침, 우리들의 새로운 출입구는 예전 솜씨에 비하면 약간은 거친 쇠톱 절단 솜씨를 가진 의인에 의해 창살 한 칸 씩이 더 잘라져서 폭이 두 배로 넓혀져 있었다. 그 정도면 아무리 뚱뚱한 몸매를 가진 아저씨, 아줌마라도 숨을 가득 들여 마신 채 뱃살을 위로 살짝 들어주기만 하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급격히 늘어난 통행량만 놓고 봐도 결과는 만족, 대만족인 듯 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또 한 가지 새로운 문제가 눈에 띄었다. 두 번째 의인의 쇠톱 솜씨가 썩 훌륭하지 않았는지 두 번째로 잘라진 창살의 위쪽 절단면이 너무 튀어나와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빠져나가다가는 영락없이 머리를 다칠 수도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나 역시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지나다닐 때마다 머리를 잔뜩 숙이고 조심해서 통과를 해야만 했으니까. 그런 수고는 어느 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허리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지나갔는데도 내 머리 높이에는 간발의 차로 닿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역시 표준이라는 것은 참 편리하고 안정적이다. 하지만 나보다 조금만 키가 큰 사람이 부주의하게 지나다보면 영락없이 큰 상처를 입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생각했다. “저 문제는 꼭 내가 해결을 해서 그 동안 다른 의인들에게 입었던 은혜에 보답도 하고,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이름 없는 의인 반열에 올라야지!” 하지만 나는 끝내 의인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생각만으로는 결코 의인이 될 수 없다. 어느 날 오후, 이제 막 날이 어둑어둑해져 갈 무렵이 되어 집에 돌아오는데 연세가 많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내가 꼭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셨다. 키가 나보다 훨씬 작은 할아버지는 날카롭게 절단된 면에 두꺼운 상자 종이를 몇 겹 겹쳐놓고 헝겊으로 묶는 작업을 하고 계셨다. 부인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작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옆에서 연신 잔소리를 하면서 작업 지시를 하고 계셨다. 나는 그 작업이 다 끝날 때까지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작업을 마치고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가시는 것을 볼 때까지 나는 그곳에 계속 서 있었다. 두 분의 뒷모습과 비록 거친 솜씨지만 두꺼운 종이와 헝겊으로 두툼하고 안전하게 감싸져 있는 개구멍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살아있군요!”

‘살아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사망은 호흡과 심장 박동이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정지하고, 뇌 기능이 멈춰서 개체로서의 생명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를 일컫고, 이러한 ‘개체사’ (individual death)를 법의학에서는 법적인 한 개인의 사망으로 진단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생물학적이고 법의학적인 차원의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단순히 우리들이 아직 숨을 쉬고 있고, 심장이 뛰어 온 몸이 아직 따뜻하고, 그리고 뇌가 아직 살아있어서 동공의 조리개가 빛에 반응을 하고 있다는 신체의 상태에 대해 말하기 보다는 우리들의 생명이 신앙적인 차원에서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에 대해 더욱 관심이 쏠려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삶과 죽음은 단순한 ‘신체의 상태’이기보다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얼마든지 사망으로 진단될 수도 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그 분이 어디에 계시기에 우리는 그 분을 통하여, 그 분과 함께, 그 분 안에서 살 수 있는가? 그 분은 교회 안에서만, 미사를 드릴 때만, 혹은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만 살아계시는가? 아니다! 그 분은 영원과 절대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분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그 분이 살아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심지어 개구멍에도 그분의 영성은 살아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인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들의 삶의 영성이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 분의 가르침이 우리들의 삶 안에서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있느냐?’ 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물음이 우리들 신앙인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호흡이고, 맥박이며 눈동자의 움직임이다.

우리들의 삶의 내용이 어떠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들의 어떻게 신앙인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불평 한 마디 없이 미사포를 착실히 쓴 채 미사에 열심히 참여했기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기 때문에, 봉헌금도 남 못지않게 많이 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당연히 당신은 ‘신앙인으로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기를 부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수도자이고 사제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은 빨리 버려야 한다. 신앙인으로서의 생명은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우리들의 몸짓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들의 생각이나 말 속에만 갇혀 있을 뿐, 우리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삶 안에서는 생생하게 살아나지 못하고 다른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의 작은 몸짓을 통해서 힘들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생각 다르고,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우리들의 위선적인 신앙의 이중성 때문에 그리스도는 숨 가쁜 호흡을 하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한 의지를 품고 세상과 이웃을 향해 바치는 우리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 작은 몸짓 하나가 그리스도를 살리고 우리들 스스로를 살릴 수 있다. 정말 그렇게 몸뚱이를 움직이며 생생하게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매번 마음에서 몸까지는 참으로 멀고도 먼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만 있다. 날은 벌써 어두워지는데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기쁜 마음으로 부지런히 우리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걸어가자.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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