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안동 간고등어

김레지나 2012. 2. 18. 20:25

열흘 동안 상하이에서 열린 지부 회의와 연 피정을 마치고 스자좡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행기 시간이 약간 여유가 있어서 공항으로 가기 전에 한국 식품점에 잠깐 들렀다. ‘뭘 살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냉동 고등어가 눈에 띄자마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가끔 집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갈치와 조기 같은 바다 생선을 사다가 먹은 적은 있었지만, 지난 일 년 동안 고등어를 먹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무와 시래기를 함께 넣고 푹 조려낸 ‘어머니표 고등어조림’은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대번에 군침이 저절로 도는 최고의 추억의 음식 중의 하나이다. 빨간 국물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고등어를 한 점 떼어내서 시래기를 얹은 밥과 함께 먹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한 가지 문제점은 냉동고 속에 있는 고등어가 웬일인지 꽁꽁 얼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끝부분이 약간 물렁물렁할 정도의 상태로만 냉동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상하이에서 스자좡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시간은 약 한 시간 반, 거기다가 공항으로 이동하고 대기하는 시간, 또 집에까지 가는 시간까지 다 합하면 약 네 시간 정도 후에야 집에 도착해서 다시 냉동실에 넣을 수 있는데 과연 무더운 여름 날씨를 이 고등어가 버틸 수 있을까? 네 시간 정도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는 주인아주머니의 의견을 듣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다섯 손 정도의 ‘안동 간고등어’를 사서 배낭에 쑤셔 넣은 채 상하이 홍챠오 공항으로 향했다.

배낭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은 냉동 고등어가 해동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전광판에 쓰여 있는 ‘MU5685 DELAYED’는 상하이 발 스자좡 행 비행기가 지연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은 비행기 시간이 지연되거나 하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고 준비해간 책을 조용히 읽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날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런지 책을 펼 생각도 없이 연신 배낭 속에 손을 넣어 고등어가 얼마나 물러졌는지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원래 스케줄에 의하면 내가 타야하는 비행기보다 한참 뒤에 이륙하게 되어 있는 다른 비행기들이 다 떠난 뒤에야 스자좡 행 비행기의 탑승이 시작되었다. 탑승이 완료되고 나서도 기내식이 실리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 방송이 몇 차례 이어지는 약 30분 동안을 비행기는 여전히 활주로의 한 쪽 구석에서 계류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계류하는 동안 비행기의 내부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덥게 느껴졌다. 아! 내가 더운 것은 괜찮은데 저 선반 위에 실린 내 고등어는 어쩐다니?

결국 비행기는 예정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홍챠오 공항을 이륙했다. 그때 이미 고등어는 몸 전체가 물렁물렁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차가운 기운은 남아 있었다. 비행기가 스자좡 정딩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나는 제일 늦게 내리는 평소의 습관과는 달리 몸을 재빨리 움직여 제일 먼저 시내로 가는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나만 서두르면 뭐하냐고요? 공항버스는 빈자리가 다 채워진 뒤에야 슬금슬금 시내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이 모두 택시를 잡으려고 길에 죽 늘어서 있어서 나는 바로 포기하고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택시를 잡는 다거나 표를 끊거나 할 때 중국 친구들과의 눈치와 순발력 경쟁에서 나는 아직 한참 멀었기 때문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이란 말인가? 아무리 애를 써도 현관문이 열리지를 않는다. 열쇠가 잘 못 됐나싶어 집 근처 모처에 보관해 놓은 다른 열쇠로 시도를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서 열쇠 수리공을 찾는단 말인가. 할 수 없이 집 근처 파출소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당직 경찰관이 전화를 걸어서 열쇠 수리공을 집으로 보내 주었다. 배가 남산 만하게 부른 열쇠 수리공은 자물쇠가 너무 오래 되어 마모가 심해 더 이상 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자물쇠를 통째로 교환한 다음에서야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었다. 땀을 식힐 겨를도 없이 얼른 배낭을 풀어 고등어를 확인해 보니 진공 포장 속의 고등어에서는 허연 빛깔의 액체가 흘러내려 있었다. 허연 액체가 무엇인지, 아직 먹을 수는 있는 건지 이것저것 확인할 겨를도 없이 우선은 바로 냉동실에 고등어를 집어넣었다. 여장을 풀고 샤워를 하는데 물음 하나가 떠올랐다. “도대체 오늘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하루 종일 쫓기듯 살아야 했지?”

다른 때는 비행기가 더 긴 시간 지연됐는데도 아무 일 없는 듯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었는데 오늘따라 비행기가 지연된다는 안내 방송을 듣자마자 그토록 짜증이 났던 이유가 뭘까? 더 긴 시간 비행기에 탑승한 채 계류 중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오늘따라 비행기 안은 왜 그리도 덥게만 느껴졌을까? 항상 승객이 다 차야 출발을 하는 공항버스를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정해진 시간에 떠나지 않느냐며 화를 냈을까? 더 오래 기다린 사람이 옆에 있든지 말든지 빈 택시가 눈에 띄는 대로 타고 가버리는 중국 친구들이 오늘따라 왜 그리 싫게 느껴졌을까?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이곳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지가 않다는 말이 왜 그리도 혀끝을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을까? 도대체 오늘 하루는 왜 이리 조급하게 살아야 했지?

고등어! 안동 간고등어! 바로 네 놈이구나!
아니, 아니! 안동 간고등어가 들어앉은 내 마음! 바로 네 놈 탓이구나!

고등어를 산 내가 오늘 하루 내내 나 자신을 쫓고 있었다. 안동 간고등어를 소유한 내 마음이 하루 종일 이 세상을 급하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샤워를 하다 말고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참 이럴 때는 어이가 없다. 고등어 몇 손, 그게 뭐라고 오늘 하루를 온전히 그 놈에게 내어주고 말았는가 말이다. 날씨가 덥고, 비행기가 지연되고, 택시가 제때 잡히지 않아서 고등어가 상하고 버려야만 한다면 고등어를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고등어 때문에 먼저 자기를 잃어버리고, 친구도 잃어버리고, 세상도 다 잃어버린 다음 결국에 가서는 냄새나는 상한 고등어만 손에 쥐고 허탈해하면서 주저앉는다.

사람들은 세상이 자기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위해서 돌아가기를 바란다. 세상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존재와 소유를 완전히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기라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냉동 간고등어를 손에 쥔 사람은 세상이 자기가 손에 쥔 냉동 간고등어를 위해서 돌아가기를 바랄 테지만 세상은 언제나 무심하게 그저 그렇게 돌아갈 뿐이다. 영원과 절대의 하느님 섭리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 인간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저 ‘무심하게’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차라리 가깝다. 그렇게 우리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심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스스로의 존재’를 살짝 맛보기라도 원한다면 우리 역시 ‘무심하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 머물면서 아무 마음도 없이 그냥 있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공부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버릴 줄을 몰라서 그럴 것이다. 여전히 손에 쥔 것이 많은 탓일 게다. 여전히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욕심이 많은 탓일 게다. 상하는 것은 고등어일 진대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이 더 상해서 악취가 풍긴다. 고등어가 상했다면 고등어를 버리면 그만 인 것을, 그것을 지키려고 내 마음도 잃어버리고, 내 친구들도 잃어버리고, 오늘 하루도 잃어버리고, 인생도 잃어버리고, 세상도 잃어버린다. 상한 고등어 한 마리 끝까지 손에 쥐고 냄새 풍기면서 구원을 기도하고 있는 네 모습을 보라.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자는 아무 것도 손에 쥘 수가 없나니......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http://cafe.daum.net/frcho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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