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침대 발치 쪽에는 구입한지 일 년 정도 된 소형냉장고가 하나 있었다. 뜨거운 여름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에 더위를 식히는 데는 무엇보다도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은 데다 또 가끔씩 한국에서 순례를 나온 신자 분들이 남기고 가는 한국 음식을 보관하려는 용도로 구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냉장고를 구입해서 사용하다 보니까 공동생활을 하는 내게 개인 냉장고는 그리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 대부분 물은 끓여서 마치게 되고 가끔씩 관광객들로부터 받은 단무지나 깻잎과 같은 밑반찬 알루미늄 용기가 고작 한두 개에다 치즈가 몇 조각 들어있는 정도이다 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그 소형냉장고가 방의 한 모서리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가지고 있자니 그 냉장고가 차지하고 있는 모서리 공간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고 그렇다고 남을 주자니 혹시 치즈 한 조각이라도 보관해야 할 일이 생기면 당장 아쉬울 것 같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찰라, 내 방을 방문한 어느 신부님이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아, 너무 낡아서 그런지 요즘 제 방에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못잘 지경이에요.”
“그래? 허 참! 임자는 이렇게 따로 있었구먼. 저거 가져다 쓰시게.”“조그맣고 너무 좋아 보이는데 형님도 필요하시잖아요.”
“나 보다는 아우님에게 더 사랑받으면서 요긴하게 쓰일 놈인 것 같은데......”
그 날 이리 닦이고 저리 닦여서 산뜻해진 조그만 냉장고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 자기와 잘 어울리는 책상 옆에 자리를 잡고 경쾌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신부님은 또 그 신부님 나름대로 소음이 거의 없고 깔끔한 모양을 한 그 냉장고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하면서 좋아했다. 나는 어땠을까? 나는 그 소형 냉장고가 빠져 나가고 남은 텅 빈 공간에 서서 창밖을 보다가 환호성을 지를 뻔 했다.
“이야! 공간을 채우지 않고 그냥 텅 비어있는 그 상태 그대로 놓아두는 일이 이토록 큰 즐거움이었구나!”
나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소형냉장고가 자기의 자리를 찾아 떠난 뒤 생긴 빈 공간을 보면서 마냥 흐뭇해하고 있다. 공간空間을 무엇인가로 가득 채우지 않고 그냥 그대로 비워두는(空, 虛, 無)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를 통감하면서 말이다. 나는 원래 짐이 생기는 것을 지독히 싫어한다. 게다가 내게 하나 주어진 방은 결코 큰 방이 아니다. 화장실이 차지하는 공간을 빼고 나면 사방 3미터 정도나 될까? 그 공간에 또 침대와 책상 그리고 침대 맡에 머릿장 하나가 자리하고 있으니 사실 빈 공간은 그리 넓지가 않다. 그 좁은 공간 중에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던 소형 냉장고 하나가 빠져나가고 생긴 빈자리. 그 빈자리를 쳐다보고 앉아서 얻는 깨달음이 크다. 사실 내게 필요한 것은 냉장고가 아니라 그 방의 빈 공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나 채우는 일에만 급급한 채 살아왔다. 채우는 것이 좋은 것善 이라만 생각해 왔다. 그래서 집도 가구로 채우고, 지갑도 돈으로 채우고, 머리도 지식으로 채우고, 심지어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무엇을 더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욕심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얼마나 바빴던가? 그렇게 바쁘게, 바쁘게 채우는 일만 하면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던가?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어떤 일인가를 해야만 한다. 방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가구들을 사서 들여야 하고 냉장고, 오디오 시스템, 대형 벽걸이 티비 등등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어디 저절로 내 손에 쥐어지던가. 그런 가구들을 사서 방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돈이 되는 일을 해야만 했다. 아니, 돈이 되는 일만 해야 했다.
하지만 비우는 일은 그냥 그 빈 공간을 왔다갔다 서성이기를 즐겨하면 될 뿐이다. 도대체 비우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해야만 하는 일이 없다. 그냥 ‘비었구나’ 하는 느낌만으로 족하다. 그곳이 비어있다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큰 불편함이 있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비어있어야 할 그 곳은 빈 채로 그냥 놔두는 것이 편하고 기쁘고 즐겁다. 사람들은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토록 잘못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더 자유롭고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다 가지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지금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 집도 좀 비게 하여 사람이 편하게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방도 좀 비워내서 원래의 방의 용도대로 사람이 편하게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머리도 좀 비워서 쓸데없는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고 마음도 최대한 비워내어 허심자虛心者로서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한 편안함이 있겠는가.
비우자! 채우고 채워서 죽을 때까지 쌓아두려 하지 말고 제발 좀 나누면서 베풀면서 비우면서 살아가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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