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해 뜨는 시간이 다시 조금씩 빨라져서 아침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 저쪽 동편 하늘이 신랑을 맞는 새색시의 볼 마냥 발갛게 물들어 있다. 나도 설레는 마음이 되어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동편을 향해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얼굴을 내밀 것 같았는데 꽤 오래 서 있었는데도 여전히 주위만 더 붉게 변해갈 뿐이었다. 이윽고 한 점 밝은 빛이 눈을 밝히자마자 커다란 태양은 순식간에 산을 넘어 내게로 다가왔다.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거룩하고 장엄한 감동을 안겨준다.
아침을 먹으려 발길을 돌리는데 반짝이는 전등으로 화려하게 장식이 된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밑의 자그만 베고니아 화분들이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서일까? 화분에 심어진 베고니아의 잎들이 하나같이 생기를 잃고 땅바닥을 향해 축 늘어져있었다. 손으로 다시 일으켜줘도 이내 푹 고개를 숙이고 마는 베고니아 화분들. ‘이걸 어쩌나, 이놈들이 왜 이렇게 힘을 잃었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모기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목마르다.”(요한19,28)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아! 너희들이 오랫동안 물을 못 마셔서 이렇게 힘을 잃은 게로구나?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기다려.”
나는 얼른 스프레이에 물을 담아다가 그 놈들의 목을 축여주었다. 축 처져 힘들어하던 그 놈들은 곧 생기를 얻었다.
“미안! 미안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에 가려서 못 봤어. 앞으로는 조심할게.”
하얗게 화장을 한 키 큰 아이 하나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항상 이래요. 나무를 잘라서 온갖 화려한 장식을 해 놓고 ‘성탄! 성탄! 성탄!’ 축하의 노래를 부르면서 즐거워하죠. 그런데 정작 우리들은 그 화려하게 장식된 죽은 나무에 가려져서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기 힘들어요. 사람들이 온통 크고 화려한 것에 정신이 팔려서 우리같이 바닥에 놓여있는 작은 화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게 우리들의 크리스마스죠. 힘들어요.”
성탄팔부 축제가 끝났다. 지난 성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절대영원의 하느님께서 스스로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인류의 역사 안으로 몸을 던지신 육화肉化의 신비를 기념하는 성탄절을 한 번 더 지낸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가? 아니, 그에 앞서 우리들은 거룩한聖 탄생誕의 의미를 깨닫고자 지난 성탄시기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육화된 신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온 마음을 기울여 물어보기라도 했었던가? 만약 아니라면 올 해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내년 성탄이 오기까지 또 다시 우리는 일 년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요한1,1) 계셨던 말씀 하느님은 영원하시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영원히 태어나시고, 영원히 돌아가시고, 또 그리하여 영원히 부활하신다. 영원이신 하느님 앞에서는 탄생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무런 순서를 가지지 않는다. 위와 같은 사건들의 순차적 배열은 오로지 인간들의 이해의 한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태어났다’라는 과거형 진술 역시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들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일 뿐이다. 하느님은 항상 ‘태어나신다’.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성탄이 과거 이천년 전, 고대 근동 지방에서 태어난 한 유태인 아기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태어나는 예수를 체험하지 못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태어나고 있는 예수를 체험하지 못하면 주님 탄생의 거룩한 뜻을 우리는 절대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모든 신앙의 물음들과 같이 성탄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은 말씀이신 분과 하나 되는 신앙의 체험에 달려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내가 직접 온 몸으로 경험해 보는 것! 그래서 우리들의 머리가 아닌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얻어내는 바, 바로 그것이야말로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될 것이다. 예수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이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바칠 수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내가 어떻게 체험해 볼 수 있냐고? 우선 크리스마스트리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장식들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 당신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는 잠들어 있는 당신의 의식을 깨워서 조용히 말구유에 담긴 초라하게 보이는 생명으로 다가가 그 앞에 앉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바램도 없이 그저 눈감고 조용히 앉아서 들려오는 외침을 들어라. 무엇을 들었는가? 그 쩌렁쩌렁한 외침을 따르면 된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로마13,9-11)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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