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죽기 전에 사랑하기

김레지나 2012. 1. 30. 20:18

6월 6일,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이 지구상의 셀 수 없이 많았던 전쟁터에서 숨겨간 젊은 군인들의 영혼을 위한 위령미사가 정성스레 바쳐진다. 미사를 바치다보면 언젠가 읽었던 책의 한 부분이 꼭 머릿속에 떠오른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때 어느 이름모를 젊은 학도병 하나가 총에 맞아 죽기 직전에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내뱉던 말이라고 한다.

“사내로 태어나 사랑하는 여인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는 것이 너무 억울해.”

기말시험을 치르는 친구들을 위해 간식이라도 준비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 대형 편의점에 갔다. 과자 몇 상자를 사서 계산대로 가는 도중에 작은 화분들이 진열된 곳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었다. 벌써 몇 번째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한참 동안 그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아담한 놈으로 하나 골라서 창가에 놓고 키우면 방 안이 한결 생기가 돌 텐데 하나 살까?”

여러 차례 손이 화분에 뻗쳐졌지만 결국은 오늘도 사는 것을 포기하고 뒤 돌아섰다. 몇 해 전에 키우던 단풍나무 분재를 아는 수녀님께 맡기고 한 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바짝 말라 죽어있던 그 놈들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던 이후로 난 한 번도 화분을 키워본 적이 없다.

집에 돌아와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한 마리가 어디 풀숲을 그리도 싸돌아다녔는지 온 몸에 가시가 박히고 상처가 나서 그 염증 치료하느라 고생을 하고 있는데 한 이탈리아 친구가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그 놈에게 주사를 놓고 있었다. 천성이 참 착한 친구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말 못하는 짐승을 다루는 손길만 봐도 그게 틀린 것이 아니란 것을 금방 알겠다.

나도 퍽이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십 여 년 전, 집에서 기르던 잡종견 진실이가 차에 치여 죽은 뒤로는 한 번도 애완동물을 키워 본 적도, 정을 줘 본 적도 없다.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마음까지도 쏙 빼앗을 정도로 예쁜 짓을 하던 진실이가 그렇게 떠난 뒤로는 가끔씩 인터넷을 떠도는 강아지 사진들을 찾아보는 것이 내 강아지 사랑의 전부가 돼 버렸다.

그 동안은 애써 인연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애완동물이나 식물 키우는 일에 무관심한 태도를 합리화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문득 내가 참 어리석은 사람이자 참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처가 두려워서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 이별이 너무 아파서 인연조차 멀리하는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독한 사람이 있을까. 아니, 상처가 두렵다고 거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까? 이별이 너무 아프다고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인연일까?

젊은 시절 한 사람을 사랑하다가 그 사랑의 열정 때문에 잠 못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이 떠나가고 그 냉정한 이별의 고통을 잊으려 독주를 마시던 적도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간 지금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가끔씩 웃음을 짓기도 하지만, 그 짧았던 이별의 순간에 이르면 이내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떠나신 뒤 벌써 열 두 해가 지났다. 당신이 돌아가시던 날 내리던 봄비를 맞는 것도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났을까? 나는 다시 아버지의 죽음 이전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사람들과 다시 사랑에 빠져들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나의 사랑은 아직 이별조차 넘지 못하고 죽음보다 결코 강하지 못하다. 문득 땅 끝까지 가서 생면부지生面不知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몸소 실천하면서 살겠다는 나의 열정이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피해 숨을 곳을 찾는 도망자의 허울 좋은 기만처럼 느껴지는 오늘 같은 날이면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님이 내게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성체 앞에 앉아 묻는다.

“두려움이 사랑을 막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막아주지.”

“왜 저는 두렵습니까?”
“온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지.”

“온전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이 없는 사랑!”

“하지만 사랑하면 죽음이 다시 두려워 질 것입니다.”
“사랑 없이 죽는 것을 두려워해야지”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이 행복했나요?”
“죽을 만큼 사랑한 것이 행복했지.”

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만 불행이라 생각하는가?
죽을 만큼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가 더 불행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왜 사랑하다 죽을 것만을 두려워하는가?
사랑 없이 죽는 것이 더 큰 두려움인 것을 왜 모르는가?

사랑하는 여인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었던 어느 이름모를 젊은 군인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행복하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사랑할 시간이라도 주어지지 않았는가. 창가에 화분도 다시 놓고 강아지도 한 마리 키우고 싶다. 그래, 사랑없이 죽느니 차라리 사랑하다 죽는 쪽이 백배 더 낫겠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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