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누가 물어도 - 차신부님의 책 <잊혀진 질문>에 대하여

김레지나 2012. 1. 1. 00:30

차동엽 신부님의 신나는 복음 묵상

나해 주님 공현 대축일 (2012.01.08) 소책자 p.46

 

1) 누가 물어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이윽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 위에 떠올랐습니다. 나의 영광, 너의 영광,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떠오른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곧 주님의 현현, 나아가 강림을 뜻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마다 구원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영광은 이제 우리의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영광을 먼저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죄와 죽음에서 건져저 이미 용서와 생명을 누리고 있는, 구원의 산 증인들인 것입니다.

 

  증인들의 마땅한 사명은 증언입니다. 우리는 증언을 통하여 이 구원의 빛을 세상에 비춥니다. 그러기에 오늘 제 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일어나 비추어라. 너희 빛이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비춰야하는 대상에는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죄인, 악인, 독재자, 권력자, 심지어 원수에게까지도 우리는 이 빛을 비춰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는 이념의 좌우, 체제의 남북, 계층의 빈부 등으로 편가르기에 익숙한 나머지, 주님의 빛을 비추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에 자꾸 경계선이 그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작년 12월 고 이병철 회장이 절두산 성당 박희봉 신부에게 보낸 신앙관련 물음에 대해 여차저차한 경위로 <잊혀진 질문>이라는 책으로 답변을 꾀했다는 내용의 묵상을 듣고 어느 교우가 장문의 피드백을 보내왔습니다. 그 중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복음 묵상을 듣고 있는 신자입니다. (....) 힘들었던 순간순간마다 복음말씀은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제게 큰 힘을 주었던 신부님과 복음 묵상 제작 Staff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 차 신부님이 언급하신 한 가지에 대하여 너무나 실망이 되어 며칠간 고민하다가 글을 씁니다. (...) 물론 신부님께서 이병철 씨나 삼성을 찬양하신 것도 옹호하신 것도 아닙니다만 삼성 그룹이 얼마나 정치에 밀착되어 있고 한국 사회에 그 막강한 힘을 불법적인 온갖 방법을 통해 휘두르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그 설립자가 제기한 종교 관련 문제에 대한 답변을 책으로 쓰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분노와 함께 너무나 실망스러운 감정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 성공의 예를 꼭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기존 보수의 패러다임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사회적으로 소외 받는 사람들을 위해 voice를 내고 사회에 울림을 준 분들로 확장시킨다면 더 많은 감동적인 story들을 발굴하시리라 믿습니다.

  뉴욕에서 권00 드림."

  저는 이 교우의 충심을 압니다. 그리고 공감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반론도 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론이 아니라 보완적인 관점을 전하는 것은 저의 의무일 듯 싶어 이 자리를 빌려 대신 답하고자 합니다.

 

  교우님의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성찰의 거울로 삼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런 측면도 있음을 말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임의로운 생각이 아니라, 사도들이 물려준 유훈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누가 물어도' 우리는 그에게 대답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사사건건 당신에게 태클을 걸었던, 당신의 반대자요 박해자 율법 학자들 가운데 '니코데모'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해 주셨던 것입니다. 한술 더 떠서 하느님께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처단하였던, 박해자 바오로를 회유하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이었습니다.

 

  '누가 물어도'. 여기에는 어떤 에외도 없습니다. 안 그러면 역차별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대학시절부터 외웠던 성구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주님의 명령으로 간직해 왔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누가 물어도' 성심성의껏 답변해 왔습니다. IMF사태 때 직격탄을 맞고 '우리는 이제 어쩌지요'를 물어온 절망한 영혼들을 위해 몇 년을 끙끙거리다 <무지개 원리>로 답변했습니다.

  뉴욕 맨해튼에서 불쑥 찾아온 어느 자매가 '주님의 기도'의 속 시원한 뜻풀이를 청해왔을 때, 1년이나 준비하여 <통하는 기도>라는 책으로 답변을 해 드렸습니다.

  어느 인터뷰 기회에 비신자인 한 기자가 '진복팔단'(참된 행복 8가지)을 가지고 1년 후 다시 인터뷰했으면 좋겠다는 청을 해와, 거기에도 성심성의껏 응했습니다. 그것이 책 <행복선언>으로 출간되고 TV특강으로 방영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한 개신교 신자가 '사도신경'의 해설 특강을 청해와 지금 성의껏 준비 중에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사양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을 사양하는 법은 제 사전에 없습니다.

 

  이번 <잊혀진 질문> 역시 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누가 물어도' 답변하려는 사명감에 저는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이데올로기도 없고, 편 가르기도 없습니다.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사제인 제 앞에는 오직 양떼만 있스비다.

 

 물론, 물론!

 정의, 중요합니다. 거룩함, 더욱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느 누구도 단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정의구현, 저도 응원합니다. 데모, 저도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제의 직무, 그것은 그 이상입니다.

 사제에게는 모든 영혼을 차별 없이 돌보아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명령인지 압니다. 그러기에 저는 북한의 김정일을 위시한 그 일당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꿈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마지막 꿈입니다.

 

  이러저러한 우려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가없는 사랑의 너비가 언젠가 그 우려를 안도로 바꾸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제 소명을 마쳤습니다만 이 글은 복음 묵상 회원 한 분 한 분을 위한 사신이기도 합니다. 부디 제 뜻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오늘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그대로 기도로 바치고 싶습니다.

 "나는 아무이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율법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합니다."(1코린 9,19-23)

  주님, 이 고백은 액면 그대로 제 고백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