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성지순례 4 - 천사

김레지나 2011. 12. 17. 11:02

당신은 천사의 존재를 믿는가? 나는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당신의 천사가 될 수 있음을, 또한 당신이 나의 천사가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전날 성모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셨다고 전해지는 생가 터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일정을 바꾼 터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에페소 유적지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이미 며칠 동안 한밤중에 호텔에 도착하고 새벽 5시에 기상하는 힘든 일정이 계속되어 왔기에 순례 가족 중에 연세가 드신 분들께는 다소 무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세도 많으신 데다 무릎까지 좋지 않으신 카타리나 할머니께서 에페소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데 무척 힘들어 하셨다. 일행 중에 아무런 가족도 없이 혼자오신 할머니는 일행으로부터 점점 떨어지는 것이 눈치가 보이셨는지 열심히 걸으셨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할머니께 다가가 배낭을 낚아채듯 빼앗아 내 어깨에 걸고는 할머니의 손을 꽉 붙잡으면서 말씀드렸다.
“어머니, 오늘은 저하고 데이트 좀 하시죠.”“아이고, 신부님. 다 늙어빠진 할망구하고 데이트하면 신부님이 힘들어서 못써요.”

할머니는 몇 번이나 괜찮다고 하시다가는 결국 내 손을 꼭 붙잡고 걷기 시작하셨다. 앞선 일행이 중요한 자리에서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기 위해 멈추면 우리는 부지런히 거리를 좁히면서 뒤를 따라갔고 그 동안 할머니는 마흔 셋에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 이야기부터 중국인 며느리와 이탈리안 사위를 얻게 된 이야기 등, 당신이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어서 혼자가 된 뒤 캐나다 땅에서 일남 사녀 자식들을 키우면서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인생을 들려주셨다.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그 어느 스승의 강론보다도 훨씬 진한 감동으로 내 마음에 다가왔다. 에페소 유적지 방문이 다 끝이 날 때까지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는 반도 채 끝나지 않았지만 우리의 데이트는 아쉬움을 남긴 채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 날, 할머니는 반듯하고 힘있는 글씨로 써 내려간 연애편지를 내게 건네 주셨다.

“주님의 평화!
최 강 스테파노 신부님, 이번 순례를 통해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음을 먼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가 집을 떠나면서부터 많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무릎 때문에 행여 동지 순례자들께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주님께서 나를 또 한 번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에게 휠 체어가 필요할 때마다 거룩한 한 분의 천사를 보내주시어 저의 다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스테파노 신부님께서 힘이 되어 주실 때마다 저는 고마운 마음을 말씀드리지는 못하고 침묵 속에서 푸른 하늘만 쳐다 볼 뿐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아름다운 일들을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심을 믿으며 진정 주님은 나를 잊지 않고 늘 살피고 계신다는 생각에 하느님과 신부님께 오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매일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천사의 존재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천사입니다’라고 말해 주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의 존재를 믿기보다 훨씬 쉽고 간단한 일이 스스로 다른 사람의 천사가 되어주는 일이다. 천사가 되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흰 옷을 입지 않고도, 머리 위에 둥그런 고리가 없이도, 더군다나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고도 우리는 천사가 될 수 있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다가가 손 한 번 내밀어 주는 것, 바로 그 단순한 손짓 하나로 당신은 상대방의 천사가 된다. 믿어지지 않는가? 못 믿겠거든 지금 당장 당신 주위에서 가장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손 한 번 내밀어 보시라. 바로 그 순간 당신은 그들의 천사가 되어 있을 테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11,28)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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