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접어든 요즘에는 오후 네 시만 넘어도 벌써 깜깜해지기 시작한다. 저녁 시간이 짧아지다보니 저녁 식사 후에 천천히 걸으면서 즐기던 산책이 집 근처 공원까지 뛰는 것으로 바뀌었다. 로마의 밤거리는 너무 어두워서 위험하므로 거리를 뛸 때는 꼭 주황색 바탕에 은색 야광띠가 붙어있는 조끼를 운동복 바깥에 입는다.
하루는 집에서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해 있는 중국식당에 약속이 있어서 그 조끼를 입고 식당까지 뛰어갔는데 내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그건 또 웬 거요?”
“응, 이거? 뛸 때 국가대표 축구선수처럼 멋있게 보이려고. 선수들 연습할 때 보면 꼭 이런 조끼 하나씩 걸치고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선수? 완전히 국가대표 환경미화원처럼 보이는데? 하하하하하하”
나는 사실은 그 조끼를 입고 뛸 때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자들의 눈에 잘 띄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게 그 조끼를 입는 나의 목적이고 조끼가 가진 본래의 성질이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과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서는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가 살았던 삶의 양식대로 살아감)을 통해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구원을 체험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을 따르는 사랑의 실천’이고 이러한 믿음(삶)과 회개(변화)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일차적으로는 우리들 삶의 내면적인 차원에서 먼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들이다.
가끔씩 외적으로 드러난 신앙생활에 너무 치중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제들의 로만칼라나 수도자들의 어둔 색깔의 수도복은 그들의 사제로서의, 혹은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는 있지만 개인적이고 내밀한 차원에서 완성되어가는 삶 자체에 비교하자면 그것들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전반적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혹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신앙생활의 목적과 본질에는 깊이 다다를 수가 없다. 기도를 하면 시끄럽고, 선행을 하면 요란하고, 희생도 이왕이면 화려하게 한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교회를 닮아갈 필요는 없는 데도 말이다.
마치 한밤에 야광조끼를 입고 뛰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무 외적으로 드러나는데 치중하고 있는 내 신앙생활이 참으로 한심해서 하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좀 더 은밀하게 만나자고 나를 초대하고 계시는데 나는 야광띠 같은 로만칼라까지 한 채로 사람들의 조명을 받기 위해 안달하고 있는 것 같다. 주님께서 너무 답답하고 안타깝다고 하신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3-4)
하루는 집에서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해 있는 중국식당에 약속이 있어서 그 조끼를 입고 식당까지 뛰어갔는데 내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그건 또 웬 거요?”
“응, 이거? 뛸 때 국가대표 축구선수처럼 멋있게 보이려고. 선수들 연습할 때 보면 꼭 이런 조끼 하나씩 걸치고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선수? 완전히 국가대표 환경미화원처럼 보이는데? 하하하하하하”
나는 사실은 그 조끼를 입고 뛸 때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자들의 눈에 잘 띄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게 그 조끼를 입는 나의 목적이고 조끼가 가진 본래의 성질이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과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서는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가 살았던 삶의 양식대로 살아감)을 통해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구원을 체험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을 따르는 사랑의 실천’이고 이러한 믿음(삶)과 회개(변화)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일차적으로는 우리들 삶의 내면적인 차원에서 먼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들이다.
가끔씩 외적으로 드러난 신앙생활에 너무 치중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제들의 로만칼라나 수도자들의 어둔 색깔의 수도복은 그들의 사제로서의, 혹은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는 있지만 개인적이고 내밀한 차원에서 완성되어가는 삶 자체에 비교하자면 그것들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전반적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혹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신앙생활의 목적과 본질에는 깊이 다다를 수가 없다. 기도를 하면 시끄럽고, 선행을 하면 요란하고, 희생도 이왕이면 화려하게 한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교회를 닮아갈 필요는 없는 데도 말이다.
마치 한밤에 야광조끼를 입고 뛰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무 외적으로 드러나는데 치중하고 있는 내 신앙생활이 참으로 한심해서 하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좀 더 은밀하게 만나자고 나를 초대하고 계시는데 나는 야광띠 같은 로만칼라까지 한 채로 사람들의 조명을 받기 위해 안달하고 있는 것 같다. 주님께서 너무 답답하고 안타깝다고 하신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3-4)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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