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바닥 저 구석에 하얀 솜처럼 뭉쳐진 먼지를 주워 고개를 드는 찰라 백주白晝에 뜬 별을 가득 보았다. 열어 놓은 창문 모서리에 머리를 찧은 것이다.
혼자라 소용도 없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얼른 손을 가져다 대보니 다행히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서너 걸음 떨어진 침대에 가서 누워 있었는데 거의 잊혀졌던 어릴 적 추억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 참기 힘든 고통이 얼마나 서서히 사라지는지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
여섯 살 때였던가? 아랫집에 사는 나보다 두 살 많은 ‘핸수’(본명은 현수였는데 시골 할머니들은 다들 그렇게 불렀다.)가 던진 돌에 맞아서 머리가 깨진 적이 있었다. 아니 그때 표현 그대로 ‘박 터졌다’는 말이 훨씬 실감나게 들릴지도 모른다.
돌에 딱 맞았을 때는 사실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하지만 손에 묻은 피를 보고는 기겁을 하여 동네가 떠내려가라고 울면서 엄마한테 가서 일렀다. 처음에 조금 놀라신 듯한 엄마는 상처가 그리 심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더니 나를 껴안으시면서 무릎 위에 눕히고 머리를 꼭 눌러주셨다.
신기하게도 아픔은 곧 씻은 듯이 사라졌다. 울음을 그치고 간절한 눈빛으로 ‘핸수’를 어떻게든지 처리해 달라고 호소하는 나에게 엄마는 그때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로 달래주셨다.
“괜찮아, 괜찮아. 작년 쥐불놀이 때 형이 깡통 돌리다가 현수 머리 깼을 때 현수도 많이 아팠을 거야. 형이 미리 혼내준 셈이지. 그러니까 괜찮지?”
그때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엄마가 당장 달려가서 ‘핸수’를 몇 대 쥐어박는 복수라도 해주셨다면 모를까 작년에 형 때문에 일어났던 ‘핸수’의 고통이 오늘 나의 고통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괜찮다. 엄마가 그때 당장 달려가서 복수를 해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더욱 괜찮다. 만약 그렇게 하셔서 어른 싸움으로 커지기라도 했다면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어 창문 모서리에 머리를 찐 오늘 같은 날 온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예리한 고통 속에서도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만약 지금 지극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어서 하느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청하는데도 여전히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하고 계시는 하느님, 혹은 그 분의 이해할 수 없는 응답 때문에 신앙에 의문과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의문과 회의가 바로 우리들의 신앙이라고 말을 해 주고 싶다. 완전한 분은 하느님이지 우리들이 아니다.
어찌 불완전한 우리가 아무런 의문도 회의도 없이 절대와 완전을 신앙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아무런 의문도 회의도 없는 신앙을 인간들의 신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런 의문과 회의의 신앙 안에서 투정하는 우리들에게 엄마처럼 끊임없이 위로해 주시는 분이다.
“괜찮아, 괜찮아. 어제의 웃음이 지나가서 오늘은 울고 있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오늘 울음이 또 지나가면 내일은 다시 웃게 될 거야. 그러니까 괜찮지?”
흐르는 강물이 바다를 보고 싶어 한다고 바다가 강물에 빠질 수는 없다.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다보면 바다를 만나게 되는 거겠지......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암만 생각해봐도 엄마와 하느님은 참 많이 닮았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바로 그 상심이 여러분에게 이루어 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2고린7,11)
혼자라 소용도 없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얼른 손을 가져다 대보니 다행히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서너 걸음 떨어진 침대에 가서 누워 있었는데 거의 잊혀졌던 어릴 적 추억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 참기 힘든 고통이 얼마나 서서히 사라지는지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
여섯 살 때였던가? 아랫집에 사는 나보다 두 살 많은 ‘핸수’(본명은 현수였는데 시골 할머니들은 다들 그렇게 불렀다.)가 던진 돌에 맞아서 머리가 깨진 적이 있었다. 아니 그때 표현 그대로 ‘박 터졌다’는 말이 훨씬 실감나게 들릴지도 모른다.
돌에 딱 맞았을 때는 사실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하지만 손에 묻은 피를 보고는 기겁을 하여 동네가 떠내려가라고 울면서 엄마한테 가서 일렀다. 처음에 조금 놀라신 듯한 엄마는 상처가 그리 심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더니 나를 껴안으시면서 무릎 위에 눕히고 머리를 꼭 눌러주셨다.
신기하게도 아픔은 곧 씻은 듯이 사라졌다. 울음을 그치고 간절한 눈빛으로 ‘핸수’를 어떻게든지 처리해 달라고 호소하는 나에게 엄마는 그때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로 달래주셨다.
“괜찮아, 괜찮아. 작년 쥐불놀이 때 형이 깡통 돌리다가 현수 머리 깼을 때 현수도 많이 아팠을 거야. 형이 미리 혼내준 셈이지. 그러니까 괜찮지?”
그때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엄마가 당장 달려가서 ‘핸수’를 몇 대 쥐어박는 복수라도 해주셨다면 모를까 작년에 형 때문에 일어났던 ‘핸수’의 고통이 오늘 나의 고통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괜찮다. 엄마가 그때 당장 달려가서 복수를 해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더욱 괜찮다. 만약 그렇게 하셔서 어른 싸움으로 커지기라도 했다면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어 창문 모서리에 머리를 찐 오늘 같은 날 온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예리한 고통 속에서도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만약 지금 지극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어서 하느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청하는데도 여전히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하고 계시는 하느님, 혹은 그 분의 이해할 수 없는 응답 때문에 신앙에 의문과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의문과 회의가 바로 우리들의 신앙이라고 말을 해 주고 싶다. 완전한 분은 하느님이지 우리들이 아니다.
어찌 불완전한 우리가 아무런 의문도 회의도 없이 절대와 완전을 신앙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아무런 의문도 회의도 없는 신앙을 인간들의 신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런 의문과 회의의 신앙 안에서 투정하는 우리들에게 엄마처럼 끊임없이 위로해 주시는 분이다.
“괜찮아, 괜찮아. 어제의 웃음이 지나가서 오늘은 울고 있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오늘 울음이 또 지나가면 내일은 다시 웃게 될 거야. 그러니까 괜찮지?”
흐르는 강물이 바다를 보고 싶어 한다고 바다가 강물에 빠질 수는 없다.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다보면 바다를 만나게 되는 거겠지......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암만 생각해봐도 엄마와 하느님은 참 많이 닮았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바로 그 상심이 여러분에게 이루어 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2고린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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