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참새의 하루

김레지나 2011. 9. 24. 17:16

참새의 하루

                                                        

 

 


   옛날 수원의 신학원에서 살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 저는 혼자 지하 체육실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프리카의 어느 초원을 달리고 있을 모某 신부님이 옆 보일러실에서 용접을 하다가 말고 “운동은 그렇게 하는 게 아녜요. 운동하면 또 나 아니요. 나! 나!.” 하면서 슬쩍 끼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 옛날에 용접 좀 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운동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래, 뭘 잘하는데?”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뭔가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던지 그 신부님은 갑자기 프로권투 선수의 폼으로 줄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줄을 양 손에 쥔 것이 아니라 한 손으로 두 쪽을 다 잡고 엄청 빠른 속도로 줄넘기를 하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모른 척하고 오히려 한 마디 거들었지요. “와... 진짜 선수네. 선수! 완전히 록키 같은데? 와...”


   그 부추김에 그 신부님은 우쭐해져서 좀 더 무언가를 보여주려 했던지 이제는 줄넘기 줄을 현란한 솜씨로 허공을 향해 ‘휙휙’ 돌리는가 싶더니 결국 ‘악’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평소에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그 신부님은 땅바닥에 쓰러져서도 “형님,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용접 불똥이 튀었다고 그래요.”라는 부탁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 신부님, 무리 한다 싶더니 그만 줄넘기 줄 끝에 왼쪽 눈을 맞아 실명 위기까지 가서 한참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에 다녀오는 그 신부님을 보고 다시 장난을 걸었습니다.


   “아니, 옛날에 운동 좀 했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소싯적에 운동을 했으니 이 정도로 끝났지 일반 사람 같았으면 실명했어. 실명!”


   끝까지 권투 선수 폼을 하면서 큰소리를 치던 그 신부님 때문에 한참 웃었던 옛날 추억이 왜 갑자기 떠올랐을까요? 오늘 아침에 샤워를 다 마치고 밖에 걸어둔 수건을 향해 한 쪽 다리로 까치발을 선 채로 ‘주욱’ 손을 뻗치다가, 바닥에 비누 기운이 남아 있었던지 그만 와장창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콰당’하고 넘어지면서 순간적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물론 누가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창피하던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혼잣말로 “뭐 이 정도쯤이야... 옛날에 운동 좀 했잖아! 응? 괜찮아!. 괜찮아!”하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정말 왕년에 운동을 좀 했으니 망정이지 넘어지면서 부딪힌 팔꿈치며 손목, 그리고 엉덩이뼈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넘어지면서 거울을 쳤을 때 그 거울이 깨지기라도 했다면..., 뒤로 넘어지면서 벽에 심하게 머리를 부딪치기라고 했다면... 미사를 드리는 내내 팔꿈치며 손목, 엉덩이가 욱신거리는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벅차도록 ‘감사’라는 단어가 제 맘속에 충만해졌습니다. 매일 매일 잠에서 깨어나 또 다른 하루를 선물로 받아 사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요즘의 무뎌진 중국 생활 안에서 오늘 아침과 같은 가벼운 육체적 충격은 제 영적 생활에 얼마나 큰 자극이 되고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미사 중에 이어지는 오늘의 두 번째 영적 충격 역시 제게는 너무나 감미롭게 다가오는 복음 말씀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습니다.”(마태 23,3)


   머리와 가슴, 생각과 말 그리고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 그 사이에는 바다가 존재해 있는 듯 멀게만 느껴지는 요즘의 생활이지만 적어도 제 몸에 통증이 남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아니 오늘 하루 만이라도 그 둘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일에 다시 힘을 쏟는 사람이 되라는 부탁 말씀이십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을 때, 글을 쓸 때, 팔꿈치 관절을 움직일 때 살짝 살짝 느껴지는 통증이 마치 살아계신 주님의 생생한 손길인양 간지러워 내내 미소 지을 수 있는 은총의 하루였습니다. 이렇듯 살아있는 주님을 느낄 수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녁에는 어느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어깨 뒤편에 파스를 붙이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고생했다고 농담 삼아 말씀드렸더니, 그 분이 좋은 방법이라고 한 가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베개를 바닥에 깔고 적당한 위치에 준비한 파스를 놓은 다음 잘 조준해서 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아마 그렇게 해 보신 경험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파스를 붙이고 나면 나도 모르게 막 슬퍼지는 게 차라리 좀 고생이 되더라도 팔을 더 뽑아서 손으로 붙여야 심적으로 안정도 되고 아픈 곳도 더 빨리 낳는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해봤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분이 알려주신 방식으로 한 바탕 ‘쇼’를 하고 나면 기분이 괜히 우울해지고 가끔씩은 ‘내가 지금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지?’라는 정체성의 혼란까지도 옵니다.


   며칠 전부터는 자꾸 등이 가려운 데도 그 부위가 아무리 팔을 뽑아도 닿지 않기에 창문이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문틀에 대고 비벼대곤 하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별로입니다. 전화 통화를 했던 그 분은 제게 ‘그렇다면 차라리 자연에 나가 산림욕을 하듯이 나무에 대고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등이 가려울 때마다 귀찮게 5분씩 걸어 나가서 다른 사람들 눈치 보면서 털갈이하는 동물친구들처럼 나무에 대고 해결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숲에서 살지 않는 우리는 나무에 가 닿기도 전에 가려워서 죽을 위험도 있습니다. 이 곳 중국에 와서 살다보니 이제야 왜 연세 드신 신부님들의 사제관에는 부엌이며 거실 그 밖의 모든 방마다 ‘효자손’이 걸려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럴 때면 간혹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허니(honey), 내 등을 좀 쓰다듬어 줄래요?” 한마디면 해결 될 테니까요. 아닌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뿐입니다. 결혼을 해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이어가고 한 가장으로서 충분한 책임을 다 하기에는 제가 너무나 많이 부족하고 덜 성숙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선교사제로 불러 세워주신 그 뜻을 잘 헤아리며 그 뜻하신 바대로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를 이 삶에 초대해주시고 매일 매일을 선물로 안겨주시는 참으로 고마운 그 분의 세상이 올 때까지, 마치 등불을 밝히고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요즘처럼 이렇게 자꾸 등이 가려운 것은 아마도 제 기도와 말과 행동을 좀 더 당신의 섭리에 맞춰 살아달라는 주님의 간절한 요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효자손’을 사거나 자주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면서 나무에 기대서 털갈이 하는 동물친구들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문틀이나 가구 모서리에 기대어서서 조금 슬퍼하면서라도 주님의 간절한 요청을 좀 더 간절한 심정으로 받아들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로 살면서 좀 더 간절한 마음으로 내 영혼의 신랑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기다려야겠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참새의 하루같이 소박한 선교사의 하루가 흘러갑니다. 이렇게 웃고 울면서 한 작은 선교사의 한 생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오지 않을 여러분의 소중한 생도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잘 사십시오.


   “하늘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25 1,13.)

 

                   ▒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