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열받은 예수님 - 최강신부님

김레지나 2011. 8. 5. 22:29

예수님의 거룩함은 그 분이 하느님과 똑같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오히려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는데서 우리들 마음 속에 분명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가축상들과

환전상들이 득실거리는 성전 마당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뒤엎어버리는

'열받은 예수님'에게서 나는 그 분의 인간적 매력과 함께 거룩함을 느낀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성전 마당에 가축상들이 있음으로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오는 사람들은

먼 곳에서부터 가축을 몰고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얼굴이 세겨진 동전을 유다인들이 사용하는 세겔화로 바꿔야만

성전세를 바칠 수 있다는 규정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의 수호에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 뒤에 숨어있는 것들은 결국 상인들의 이윤창출과 그 이윤 가운데

얼마를 챙길 수 있는 사제들의 탐욕이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서는 저 호세아 예언자의 말씀이 타올랐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6,6)

성전 마당에서 조차 하느님의 마음을 그토록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은 어떤 절망감과 함께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만하는

운명을 감지했을 것이다. 인간 예수에게 그것은 분명 열받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이런 짓을 하느냐며

기적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신 스스로를 두고 성전이라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 못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1고린 3,16)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서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뒤엎었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으로서의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스스로 채찍을 휘드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화되지 않은 마음 속의 감정들을 뒤엎어야 한다.

그런 정화의 노력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아냐 하며 그러한 내적 정화의 외적인 표현은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성전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제물이 되어야만 하는 예수님의 운명과 또같은 운명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의 왜곡된 자아를 허물지 못하는 우리로 인하여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허문다. 저 십자가 위에서 오늘도

철저하게 허물어지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이다."(1고린 3,17)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우리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다.

온갖 상인들이 난무하는 우리들의 정화되지 않은 마음 성전을 허물고 하느님이

그 토록 고대하시는 사랑의 제물로 가득찬 성전을 그 분께서 안배하시는 '사흘' 안에 다시 세워보자.

오늘도 예수님만 허물어진다.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