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하느님보다 앞서지 말기 - 최강 신부님

김레지나 2011. 7. 20. 21:16

소송법 시험을 치고 난 다음 날, 바로 이어서 교회법 일반 규범 시험을 치르게 됐다. 두꺼운 책 한 권 전체가 범위인 소송법을 치르느라 힘도 들었을 뿐 아니라, 일반 규범은 이미 두 차례나 시험을 치렀었고 그 결과도 만족스런 것이었기 때문에 밤 12시가 다 되도록 가야할 길이 아직 먼 일반 규범 책을 붙잡고는 슬그머니 잔꾀를 부리고 싶어졌다.

가만히 그간 몇 년에 걸쳐서 출제됐던 문제들의 경향을 정밀 분석해 본 결과 전년도에 출제됐던 문제들이 다음 해에 연달아 똑같이 출제됐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밝혀 낼 수 있었다. 나이 드신 신부님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터. 나는 미련 없이 작년에 출제됐던 내용은 한 번 쭉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나머지 내용에 온 신경을 쏟아 부었다.

작년에 출제된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책의 전체 내용을 그대로 다 외우다시피 했으니 얼마나 기세등등했을까. 항상 로만칼라가 아닌 넥타이에 정장을 하고 다니시는 신부님이 그날따라 더 멋있게 느껴졌다. 시험장에 들어오신 신부님이 나를 앞으로 부르셨다.

“어이, 최신부. 이 문제들 좀 칠판에 적지. 역시 글씨는 동양 학생들이 써야 알아보기가 쉬운 법이지. 암.”

“예, 제 기쁨입니다.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러나 호쾌했던 내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신부님으로부터 건네받은 종이를 펼쳐 들고 칠판에 멋지게 옮겨 쓰려는 찰나 현기증이 느껴져 하마터면 쓰러질 뻔 했다. 종이 위에는 작년에 출제된 문제와 단어 하나 안 틀린 똑같은 문제들이 출제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답안 작성을 마치고 힘없이 시험장을 나서는데 어느 드라마에선가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했다는 그 유명한 대사가 떠올라 쓴웃음이 뱉어졌다. “나 지금 떨고 있냐?”

하느님보다 앞서 나가지 말도록 하자. 이 세상에 초대된 순간부터 우리들은 모두 삶이라는 일종의 기나긴 시험을 치러야 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오늘’이라는 새하얀 백지 한 장을 받는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문제를 온 몸으로 풀어가며 그 백지를 채워가야 하는데 날마다 어떤 문제를 주실지 우리 중 그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간혹 내일, 모레 혹은 몇 달, 몇 년 앞의 문제까지를 미리 예상하고 정신없이 답을 써내려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중간에 자신들의 예상과 조금만 빗나가는 문제들이 주어지기만 해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큰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끝끝내 자기에게 주어진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뒤늦은 기도를 열심히 바친다.

하지만 이렇게 미리 앞서서 빗나가 있는 경우 아무리 기도를 한들 문제가 바뀌지도 저절로 풀리지도 않는다. 자신의 기도가 왜 그토록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만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생각해 볼 대목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이란 하느님으로부터 매 순간 주어지는 일상의 문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풀어가는 매우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보다 앞서서 문제들을 만들지 말 것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이상한 답을 써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저 매 순간 성실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하느님께서 던져주시는 삶의 문제들을 ‘말씀’대로 풀어가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살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자. 사실 우리는 앞으로 몇 장의 새로운 백지를 더 받게 될 것인지조차 모르고 살고 있지 않은가.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야고보4,14)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