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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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친한 사람에게 실망하면 떠난다.
혹은 평소에 친하다가 그 사람이 성에 안차면 욕한다. 요즈음 부쩍 그런다.
그 이유를 나는 3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이기주의 나만 생각하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 공동체 의식 결여이다.
핵가족 사회 맞벌이 부부의 자녀로 태어난 자녀들은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
.
둘째
편의주의이다.
편한것이 선이고 삶의 자연스런 삶의 목적이 되었다.
잠시라도 불편하면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의 가치에 우선한다.
윤리나 가치보다 즉각적 반응으로 편한것만을 쫓는다.
자살의 커다란 증가에는
이렇게 삶을 편의주의적으로 인식하는 생각이 깊게 뿌리 박혀있다.
셋째는
사랑이나 봉사에 대한 경험 미숙이다.
사랑이나 봉사같은 보편적 가치는
현재의 나의 몫이나 의무가 아닌 미래
즉 내가 돈있고 시간이 있어야 하는 미래의 여가 활동중 하나이다.
위의 3가지 이유는 소통의 부재 즉 대화의 단절에서 나온다.
주님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자신이 파라오며 우상이며 절대가치이다.
우리는 그러한 에집트에서 탈출해야 한다.
비록 척박한 광야라지만
가나안으로 하루만에 갈수 없듯이 결코 안락한 노예생활
즉 힘들지만 따뜻하고 배곯지 않는 에집트 생활의 유혹이 올수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아 떠나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모세는 우리가 배워야할 우리 삶의 리더쉽의 교과서이다.
모세는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에 편에 선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당신 마음에 든다면
이 목시 뻣뻣한 백성을 당신의 것으로 삼아 달라고!
모세는 사랑할 줄 아는 지도자 였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씀은 부활 하신 예수님만 하신 인사가 아니었다.
이 인사를 우린 미사때 여러차례 듣게 된다.
미사를 시작할때
그리고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는 감사송 시작에서
그리고 미사가 끝날때 강복할 때, 그리고 평상시 사제가 강복할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이 표어는
성서에 나오는 모든 예언자의 정신이며 목적이다.
특히 모세에 있어서 그러하다.
모세는 오늘 말했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모세의 이 말앞에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이란
문장이 있음을 우린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앞에서
이러한 조건문을 말할수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얼마나 행복할까?
이 말씀은 하느님과 이미 가까운 사람인 것을 증명한다.
현대를 사는 사제들이 늘 미사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선포하고 강복하면서 이 문장을 염하지만
우리 사제들은 마음속으로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이라는
모세의 조건문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제는 점점 목이 뻣뻣해지면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사제인 자신이면 되는 것이다.
사제인 자신이 어떠한가를 성찰치 못하면 모세가 말한 목이 뻣뻣한 백성!
이스라엘을 어떻게 에집트 땅에서 불러 내셨는지를 잊어버린 백성 꼴이 난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이말을 하기 위해선 하느님과 나의 관계성이 어떠해야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성찰하게 된다.
모세에게 배우는 또하나의 모습은 이것이다.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아뢰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백성의 잘못때문에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아뢴다.
어린시절 어머니는
나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하면
"얼른 잘못을 뉘우치리과 하셨다."
자신의 잘못을 "얼른" 뉘우치는 것은
어린 나에게 참 어렵고 내 소견으로는 억울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그런 어머니의 "어른"미션때문에 훈련이 되어
나는 친구들과 다투면 먼저 사과하는 성품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의 '얼른'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함께 모시고 사는 시어머니께 주저하지 않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얼른 당신 탓으로 돌리시고 시어머니께 용서를 청했다.
집안의 모든 잘못된 것을 당신 탓으로 돌리셨다.
어린 나는
어떨때는 친 할머니께
그렇게 대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할머니가 밉기도 했다.
내가 잘못해도 어머니는
당신의 시어머니께 무릎 꿇는 것에 지체하지 않으셨다.
가정은
늘 평화로웠고
어머니는 그렇게 모세처럼 백발이 되었다.
내가
나이 불혹의 나이인 40이 되어어야
어머니의 마음과 처세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모세는 오늘 부터 나의 스승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어머니라는 모세를 40년간 모시고
삶의 광야를 굶주림과 목마름 없이 나아갔다.
모세인 어머니는
나를 40년간 이끄셨고
나는 나의 완성에 있어서 아직도 가나안 땅이라는 완성에 이르기도 전에
사제직에 불림받아 모세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나는
완성되지 못한
아직도 가나안에 가지 못한
이스라엘 벡성이며 동시에 모세이다.
오늘 아침
기도하고 강론을 쓰면서
앞으로 모세에 관한 글을 많이 묵상하고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강론을 모세인 모든 가정의 어머니들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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