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례를 '영생의 약'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제대위의 성사에서
사람이 받아 모시는 분이 '누군가'라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교회의 공로를 통해 자신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자기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영성체는
개인적인 차원이면서 교회의 차원이다.
교회는 거룩한 성체의 분배를 관장한다.
그리고 영성체가 합당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조건을 정한다.
성 크리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축일이 되면 사람들이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남들이 모두 가니까 떼 지어
주님의 식탁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이 서슴없이 그리고 되는 대로,
신중히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 오랫동안 주님의 식탁을 찾지 않습니다.
아주 습관적입니다."
세월이흐르는 동안 교회는
다른 잘못된 행동에서 우리를 보호해왔듯이
또 한 가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님의 식탁을 허용하는 조건을 밝혔다.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이 허용하는 조건을 밝혔다.
본질적으로 오늘날의 조건과 동일하다.
서기 150년 경,
순교자 유스티노는 사도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이렇게 썼다.
"이 양식을 받아먹는 것을 우리는 성체성사로 부른다.
우리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지키는 자로서
죄를 용서받고 다시 태어나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만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다.
왜냐면 보통의 빵과 보통의 포도주를 받아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례는 전체 조건이 되는 입문 성사이다.
그것은 주님과 성체성사적인 일치를 준비하는 정화의 목욕이다.
세례는 관문이다.
그것을 통과한 자는 성체성사 안에서
비로소 완전히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지체가 되고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체험한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
그들은 먼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고
세례수로써 그분께 봉헌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와 교회 가르침에 대한
신앙의 일치가 성체성사를 받기 위한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교회 공동체 안에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없다는 원칙이 드러난다.
죽을 위험과 같은 아주 드문 예외적 상황은 제외된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자는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실뿐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와 일치를 이룬다.
교회 앞을 지나는 길에 어쩌다 하는 영성체는
있어서도 안 되고 유익하지도 않다.
교회는 가톨릭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서의 영성체를 금지한다.
개신교 그리스도인이
가톨릭 미사에 와서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고자 한다면
자신이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한 가톨릭 신자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사는 것은
교회 내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여기 있다.
많은 가톨릭 신자가
주일에 거룩한 미사에 참례해야한다는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 미사에 올 때는
주님의 식탁에 참여할 필요를 아주 잘 느낀다.
그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이 무겁고 중대한 죄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사람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면서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
그것은 분명 성체성사를 세운 그리스도의 정신에 어긋나고
그러므로 당연히 유익하지 않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1코린11,27~29)
두 번째는 혼인 성사가
당면한 가장 다양하고 비정상적 상황이다.
일곱 성사는 각각의 성사와 분리 될 수 없고 서로 속하고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연관된다.
혼인성사와 성체성사에서 중요한 것은
두 인격체의 육체적인 봉헌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주는 것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마태19,5)은
교회 가르침에 따라 성사적 혼인 안에서만 행할 수 있다.
세례를 받은 교회의 지체는
혼인성사에 관한 한 그 어떤 중립 지대도 없다.
그리스도적 혼인 밖에서의 모든 성적 결합은
세례성사로써 우리가 맺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에 어긋난다.
혼인성사 없이
배우자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사람은
거룩한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확고한 믿음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그 믿음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초혼이든 재혼이든
혼인성사 외의 관계는
순전히 호적상의 결혼이며 동거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애는 고해성사를 통해 제거될 수 있다.
동거는
혼인성사를 통해 정상적으로 될 수 있고
이혼한 사람의 재혼일 경우
지금부터 하느님 앞에서 맺은 사람이 아니라면
한 몸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성체성사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지체들이 약함을 알고 있어서
가톨릭 신자에게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가능한 한 부활 시기에
고해성사로 준비하고 성체를 모셔야 한다.“(가톨릭 교리서 1389항)는
최소한의 의무를 부과한다.
고해성사의 재발견은
본질적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는 영성체가 되게 할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부활절의 의무”를 다할 수 없는 사람들은
거룩한 성체에 대한 동경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영원불멸의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을
그리스도께 청해야 한다.
거룩한 성체를 염원하며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그분을 성체성사적으로 모실 수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기도할 때
주님은 언제나 들어 주신 것이다.
영적인 영성체는 언제나 성사적이어야 한다.
마리아 104호에서
크리스토프 하이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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