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이수철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김레지나 2011. 4. 29. 21:4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4.27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사도3,1-10 루카24,13-35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요즘 계속되는 부활 축제에 잘 어울리는 주변 환경입니다.

 

신록의 초목들과 어울려 피어난

산 벚꽃 봄꽃들이 참 풍요롭게 느껴지는 불암산입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써놓은 ‘저 산의 깊이는 어디쯤 일까?’글입니다.

 

 

 

저 산(山)의

깊이는

어디쯤 일까?

각양각색 온갖

초목들을, 꽃들을

품에 안은 산!

저 산(山)의

깊이는

어디쯤 일까?

저 산 같은

사람이

공동체가 그립다.

 

 

 

산의 깊이가 상징하는바

사랑의 깊이, 침묵의 깊이, 인내의 깊이입니다.

온갖 초목들과 꽃들을 품에 안은

깊고 넓은 불암산에서 저는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내적으로 깊고 넓은 삶입니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건물을 지닌 교회라 해도

그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없어 깊이를 상실한 교회라면

그 교회는 참 공허한 무덤이나 감옥과 같을 것입니다.

 

반면 외관은 초라할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살아있는 교회라면

그 부활하신 주님의 깊이에서

끊임없이 기쁨과 평화가 샘솟고, 생명과 빛을 발산할 것입니다.

 

 

어제 ‘예수 없는 교회’라는 신문 칼럼을 읽으면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실종되고

예수님 그 자리에 CEO 성직자가 자리 잡고 있는,

예수님과 무관한 모습의 대형교회들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예수님 간판을 걸고 이권 챙기기에 급급한

장사꾼들 같고 사기꾼들 같은 성직자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신문 칼럼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부활절 설교를 마친 목사에게 아내가 묻는다.

“어쩜 그렇게 설교를 잘해요. 당신은 부활을 진짜로 믿나 보죠?”

목사의 대답이다.

“미쳤어? 그걸 믿게 내가 목사니까 설교했을 뿐이야.”

부활 신앙은 아무나 갖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교 예화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극시 ‘대심문과’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종교재판의 불길이 중세 유럽의 세빌리아에

예수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한다.

그리스도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소녀를 살리는 등 기적을 행한다.

이를 본 대심문관(추기경)이 부하를 시켜 예수를 찾아가 묻는다.

“네가 예수냐?”

아무 대답이 없자 대심문관은 혼잣말을 한다.

“네가 정말로 예수여도 상관없다.

  제발 너는 우리를 방해하면 안 된다.

  나는 내일 너를 화형 시킬 것이다.”

교회가 예수를 배척하는 것은 중세 때의 얘기만은 아니다.

십자가가 지천인 오늘날에도 예수가 필요 없는 교회는 많다.

시골교회집사였던 동화작가 권정생은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2000년 역사에서 예수님은 많이도 시달려 왔다.

십자군 군대의 앞에 서기도 하고,

…대한민국 기독교 100년 역사에서 반공이데올로기의 선봉장 노릇도 했다.

더러는 땅 투기꾼들에게, 더러는 출세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해 왔다.”-

 

 

예수 없는 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부정할 수 없는 글입니다.

무수히 당신 교회 안에서

버림받고, 배척당하고, 이용당하고, 소외되어온 예수님이요

오늘 날 호화로운 교회를 찾아오셔도

아마 예수님은 문전박대 당하실 것입니다.

뿌리 없이는 꽃도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뿌리’ 있어

예수님 부활 영광의 ‘꽃’입니다.

봄꽃들에 환호하기 전 여름, 가을, 겨울,

그 기나긴 인고의 날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배꽃이 피는 기간은 고작 일주일 정도지만,

이 일주일을 위해 358일 대부분의 날들을 기다려온 것입니다.

배꽃뿐 아니라 대분의 꽃들이 그러합니다.

늘 주님 부활과 더불어 십자가의 주님을 상기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 없이

‘부활의 주님’만 집착하기에

온갖 파생되는 문제들입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주님 수난의 여정에 동참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부활했고,

사도행전의 모태에서 불구자로 태어났던 사람 역시

고통의 시련 중에 사도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은도, 금도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 베드로가 정말 부자입니다.

믿는 이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태생 불구자는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면서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숙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워진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고난과 좌절로 어둠 짙은 인생여정 중에 있을 때 가만히 옆을 보십시오.

바로 빛으로 부활하신 우리의 영원한 길동무이신 주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두 제자들에 대한 묘사가 감동적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대로 미사 시 성찬전례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어 즉시 엠마오 도상에서 함께 해주셨던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바로 미사 시 말씀전례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처럼

우리는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생명과 빛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 중심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의 깊이에서 샘솟는 기쁨과 평화가

우리를 참 행복으로 이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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