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대축일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
저의 첫 기억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입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삶’보다는 ‘죽음’이 먼저였습니다. 그 이후로 어렸을 때부터 나도 언젠간 죽는다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면서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믿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순교자나 된 듯, 믿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신앙이 첫째가 되지 않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음은 이미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런 목표로 경영학을 전공하며 대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의 삶을 바꾸었던 책 한 권이 있었는데,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애벌레 하나가 경쟁 사회에 뛰어들었고, 거기에서 여자 애벌레와 사랑에 빠집니다. 얼마 뒤 남자 애벌레는 다시 경쟁 사회로 뛰어들었고 여자 애벌레는 남아서 누에고치가 됩니다. 남자 애벌레는 거의 정상까지 올라갔고 경쟁 사회의 끝은 ‘허무’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일단 그것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이 한 수고가 아까워서라도 다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가 자신에게 다가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랑스러운 촉촉한 눈빛, 애벌레는 무엇인가 깨달아 세상을 등지고 경쟁 사회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여자 친구가 벗어놓은 누에고치 옆에 자신의 누에고치를 만듭니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애벌레는 나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옆에 기다리고 있던 사랑하는 나비와 함께 이제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던 책입니다. 저는 애벌레처럼 내 자신이 바라는 것을 포기하고 죽지 않으면 결국 ‘허무’만을 만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은 때는 한참 대학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이었고 동시에 마음 안에서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도 일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저는 그 쓸 때 없는 생각을 누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고생해서 대학 등록금 내주시는 부모님과 주위의 예쁜 여자들을 생각하며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밀려들었고 저는 그것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사제의 생활이 자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계획대로 잘되어 가는데 왜 불러주시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혼자 살면서 절대 행복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외로워서 나중에 더 여자들을 찾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싫었고 일 년 동안을 주님의 부르심에 거부하고 반항하였습니다. 반항하면서 내 자신이 더 안 좋은 쪽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냥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말이 쉽지만 그 결정은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왔던 나의 신념과 모든 확신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니 조금 행복해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사실 신학교 생활을 하는 것보다 밖에 나와서 술 마시고 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기도의 맛을 알게 되었고 기도 안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는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게 사뭇 다른 것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게 저를 채워갔습니다. 행복을 찾아 헤맸기에 그 행복은 저의 결정에 한 번도 후회를 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들어가서 느꼈던 행복은 고등학교 때와 비교해서 행복했던 것이었지 참 행복은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참 행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체험한 가장 큰 부활입니다.
죽음과 부활은, 마치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된 것처럼 존재와 삶과 그 가치에 커다란 변화를 주게 됩니다. 마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죽어야만 변화된 삶으로의 다시 태어남, 즉 부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자신의 뜻을 죽이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성령님이 오셔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임으로써 얻게 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미리 보여졌습니다. 즉,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는데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란 물속에 자신의 죄를 남겨놓고 깨끗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이미 완전한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거부하는 세례자 요한을 설득시켜 세례를 받습니다. 즉,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고 죽이신 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님을 받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참 하느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하시며 처음으로 당신의 음성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들임을 선포하십니다. 자신을 죽였기 때문에 성령님을 주신 것이고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보여졌던 그대로 실제로 아들에게 고통을 받고 죽을 것을 원하십니다. 아들은 이번에는 조금 저항해 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당신 뜻을 버리고 아버지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희랍어 원본의 의미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는 말을 직역하면 ‘당신의 영을 보내셨다.’입니다. 당신의 영이란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생명이십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생명의 성령님을 다시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생명’을 보내셨으니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이후에 생명이 없는 상태였지만 비로소 아들에게 그 생명을 받음으로써 다시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생명의 성령님을 당신 혼자 차지하려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생명의 성령님을 보내시고 죽음의 골자기에 있던 아들은 그 성령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럼으로써 다시 살아나십니다. 이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가난해지고 부자가 되며, 죽고 사는 것을 반복하시며 성령님 안에서 한 몸이 되시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이렇게 이미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죽이지 못하여 끝까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별해가며 따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부활의 행복도 완전하게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시리아 장군 나아만이 나옵니다.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고 집에 있는 이스라엘 여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찾아갑니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사 예언자의 집에 다다릅니다. 엘리사는 문 밖에서 기다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나병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울화가 치밀어서 그냥 가려합니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문둥병을 고쳐 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다마스커스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물보다도 더 좋은 아바나강과 발바르강이 있다. 여기에서 된다면, 거기에 가서 씻어도 깨끗해 지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크게 노하여 발길을 옮겨 집으로 돌아가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막아서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이 예언자가 더 어려운 일을 장군께 시켰더라면 장군께서는 그 일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장군께 몸이나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에 설득을 당한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일곱 번 자신의 몸을 담그면서 자아를 깨끗이 씻어버립니다. 그랬더니 정말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뜻을 죽임으로써 얻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천주교는 죽음을 너무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어쩌면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죽은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죽음은 내가 그 은총을 받기 위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약 끝까지 자신의 뜻을 고집하고 꺾지 않는다면 부활은 평생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축하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 부활로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음’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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