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레지나의 메모

기적을 청할만큼의 믿음을 가졌다면

김레지나 2008. 10. 13. 17:06

기적을 청할 만큼의 믿음을 가졌다면, 십자가를 안고 갈 믿음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건데.....사람들은 그 당연한 이치를 잊고 산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고마운 벗들이 내게 말했다.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항암치료 안 받고 암이 나을 수 있을 텐데.... 안타깝다."라고....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냥 빙그레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었으니, 내 믿음의 나무는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내 안에는 가장 초자연적이고 강력한 표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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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순간들>, 체칠리아 벤투라 지음, 김홍래 옮김 p.168에서 옮김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내 고통스런 정점에 와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내게 전적인 의탁을 요구하셨다. 눈 위에 진흙을 바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그분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요한 2,5참조). 길게 이유를 열거하며 하느님을 원망하던 욥처럼 나는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의 요구에 저항했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드린 나의 '네'라는 응답과 불평 속에는 욥과 마찬가지로 신뢰의 외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욥처럼 투쟁과 어둔 밤을 지나는 사람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신앙으로 탄원의 기도를 올리는 그런 신뢰였다.(창세 32,26참조)

내가 실명한 날부터 부모님과 동료 수녀님과 친구들은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시력을 주님께서 기적으로 되돌려 주시라고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러나 나는 기적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와 꼭 같은 신뢰로써 하느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에 함께하지 못했다. 기적을 청할 만한 믿음을 가졌다면 평생을 장님에 귀머거리로 살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육체의 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분의 속삭임에는 더욱 민감해지던 그 시기까지, 나는 주님께 시력을 되돌려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대신 '나에게 눈을 돌려주소서. 눈이 부시어 쳐다볼 수 없나이다.'(아가 6,5)라는 기도만을 되풀이했다. 육체의 귀가 들리지 않는 지금 신랑의 소리를 반가워하는 신부의 노래가 귓전에 집요하게 맴도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소리.

담 밖에 서서

창 틈으로 기웃거리며

살창 틈으로 훔쳐보며 속삭이는 소리(아가 2,8-9)

 

내 노래에 응답하듯 그분의 음성이 귓가에 들여오고 있었다.

 

바위 틈에 숨은 나의 비둘기여.

벼랑에 몸을 숨긴 비둘기여.

모습 좀 보여줘요. 목소리 좀 들려줘요.(아가 2,14)

 

때는 이미 무르익어 있었다. 청각을 잃게 된 충격과 수녀님, 부모님, 친구들의 사랑으로 내면에 갈등을 일으키던 그분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으로 증폭되어 울리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천천히 내 작은 배의 밧줄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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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인간 사이

 

-김정대 신부님 묵상-

"그때에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29-­32)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그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신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어리석거나 아직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나 그 기도의 내용은 많은 경우 자신의 필요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인간 언어의 한계상 어쩔 수 없이 청원기도밖에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느님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만일 그 기도가 이루지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은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생존의 지혜를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세상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를 알려주신 분이다. 또 우리의 나약함과 인간 조건을 어떻게 대면하고 끌어안아야 하는지를 역설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느님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결국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만이 가장 인간적임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 조건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느님다움이 드러날 것이다. 이로써 인간관계가 편안해지고 폭력이 없어진다. 이런 변화가 바로 기적이고 표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