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와 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주교와 사제, 부제, 남녀 봉헌 생활자와 모든 평신도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를 토대로 한 강의록
성체성사로 살아가는 교회
차 례
서론
제1장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
제2장 교회를 세우는 성체성사
제3장 성체성사의 사도 전래성
제4장 교회 친교의 원천이요 정점인 성체성사
제5장 성찬례 거행의 품위
제6장 ‘성찬의 여인’이신 성모님
결론
<강의록에 대하여...>
우리 광주 대교구는 작년 2007년에 교구설정 70주년을 지냈고, 그 후속 작업으로 특별기구인 ‘교구 사목기획 추진 위원회’는 70주년 준비위원회가 제안한 내용을 토대로 마련된 교구 발전 추진방향에 따른 <교구 발전 3개년 추진계획>을 세워 단계별로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쇄신과 발전을 위한 여정에 임하게 하였습니다. 그 첫 해인 금년 2008년은 “영성 심화深化의 해”로서, 사도직 활성화와 새로운 복음화를 이뤄내는 빛과 소금의 공동체로 쇄신하고 발전하기 위한 근본 바탕인 영성생활을 심화하고자 합니다.
교구장께서는 영성심화의 중심에 성체성사가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그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이 ‘살아 있는 빵’에서 자양분을 얻습니다. 그러니 우리 교구민들에게도 이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재촉함은 영성심화를 위하여 지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교구장께서는 우선 사제들의 쇄신과 영성의 심화를 위한 노력의 차원에서 “사제는 성찬례를 매일 거행하여야 하는가.”(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2003년)의 권고를 따라,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사제 직무의 중심인 성찬례를 정성스럽게 매일 거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봉사자인 사제 직무의 정체성을 심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록 촉구하셨으며, 다음으로 모든 교구민들이 성체성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그 안에서 영성생활의 힘을 충만히 얻게 하기 위하여 사목자들은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주님의 날”(1998년)과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2003년)를 읽히고 가르쳐 신자생활의 중심인 성찬례에 날마다 특히 주님의 날인 주일에 참례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 생활(섬김과 친교)을 심화하도록 이끌어 줄 것을 권고 하셨습니다.
이 강의록은 그 일환으로 마련된 것으로서, 성체성사 신비에 대하여 각 지구별로 이루어질 특강 자료용으로 그리고 각 본당에서 사목자들이 신자들을 교육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교서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교서 “주님의 날”에 대한 신부님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주님의 날’(주일)의 의미와 역사에 대한 자료를 <부록>에 첨부하였습니다.
또한 “신령성체”에 관한 자료도 <부록>에 첨부하였으니 교우들의 성체신심 지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올바른 자세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첨부하였습니다만, 더 상세한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그룹웨어에 별도로 올렸으니 신자들 교육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조영대 신부 -
서 론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vivit).” 이 진리는 교회의 신비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포한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1)입니다. 교회의 눈길은 언제나 제대의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향하며, 그 안에서 그분의 끝없는 사랑이 온전히 드러남을 발견합니다.(1항)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가 제정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들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마태 26,26; 루가 22,19; 1고린 11,24 참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마르 14,24; 루가 22,20; 1고린 11,25 참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말씀의 뜻은 성목요일 저녁에서 부활 아침에 이르는 성삼일 끝에 가서야 온전히 밝혀집니다. 성삼일은 파스카 신비를 품고 있으며, 또한 성체성사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2항)
파스카 신비에서 태어난 교회는 파스카 신비의 뛰어난 성사인 성체성사를 자신의 생활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사도 2,42)하였습니다.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은 성찬례를 뜻합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첫 모습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은 파스카 성삼일로, 곧 성목요일 저녁의 사건들, 최후의 만찬과 그 이후의 일들로 되돌아갑니다.(3항)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함께 거룩한 미사를 거행하는 모든 사제는 마음으로 그곳, 그 시간으로 되돌아갑니다.(4항)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나왔습니다.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으로써 태어나 세상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지만, 교회 형성의 결정적인 계기는 분명히 다락방의 성체성사 제정이었습니다. 교회의 토대와 근원은 파스카 성삼일 전체이지만, 이것이 이른바 영원히 통합되고 예시되고 집약되는 것은 성체성사 안에서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성체성사를 주심으로써 교회에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현존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성삼일과 세기의 흐름 사이에서 신비로운 ‘시간의 단일성’을 이루셨습니다.(5항)
교회는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그분께 양식을 얻고 그분으로 빛을 얻습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이며 동시에 “빛의 신비”2)입니다.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어느 면에서 신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겪은 일을 다시 체험합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루가 24,31).(6항)
교도권은 신자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현존이요 그 영적 양식이며 역사를 통한 여정에서 교회가 지닐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재산인 성체성사의 신비를 선포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3)(9항)
교도권의 노력에 발맞추어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내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전례 쇄신은 신자들이 제대의 거룩한 희생 제사에 더욱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분명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많은 곳에서 성체 조배는 일상의 중요한 신심 실천이 되고 또 성덕의 무한한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부 지역에서는 성체 조배 관습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4)(10항)
제1장 신앙의 신비
1. 신앙의 신비인 성찬례
미사 중에 “신앙의 신비여!”라는 사제의 선포에 대하여, 신자들이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으로 잘 표현되어 있듯이, 신앙의 신비인 성찬례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재현하는 십자가의 희생제사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는 성사입니다. 또한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체변화로써 성체 성혈 안에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현존하시는 지극히 감사하올 신비의 성사입니다.
1) “주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1고린 11,23) 당신의 몸과 피로써 성찬의 희생 제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시는 것이 당신의 몸과 피라고만 단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몸”, “너희와 모든 이들을 위하여 흘릴 피”라 하시어 그것이 지닌 희생 제사적 의미를 분명히 하셨으며,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곧 바쳐지게 될 당신의 희생 제사의 성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찬례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단순히 상기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성사적으로 재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치 그 자리에 함께했던 것처럼 그 희생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남겨 주신 것입니다. 성찬례는 진정 십자가의 희생 제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로써 우리에게 참으로 “극진한”(요한 13,1 참조)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11~12항)
2) 성찬례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는 성사입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는 구세주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뿐만 아니라 그분의 희생의 정점인 부활의 신비도 드러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새로 입교한 신자들에게 성체성사는 부활 사건을 그들의 삶에 적용시킨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5)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거룩한 신비에 동참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생명을 얻으셨음을 고백하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6)(14항)
3) 부활로써 그 정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미사에서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실체 변화’라는 매우 특별한 현존과 관계됩니다. “성체 안에서의 현존이 ‘실제적인 것’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심 없이 총체적으로 또 온전하게 하느님이며 인간으로서 현존하시게 되는 곧 본체적인 현존 방식입니다.”7) “빵과 포도주의 축성은 빵의 전 실체를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전 실체를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거룩한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적절하게 불러 왔습니다.”8) 참으로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거룩한 성사에 관한 교회 교부들의 교리에서 흔히 설명되듯이,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이며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수 있는 신비입니다.9)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Adoro te devote, latens Deitas).” 이러한 사랑의 신비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그 한계를 절감합니다.10)(15항)
2. 영성체와 성령
1) 희생 제사의 구원의 힘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에서 완전하게 실현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바로 그분을 받아 모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내어 주신 몸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마태 26,28) 피를 받아 모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힘으로 삽니다(요한 6,57).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 주시는 진정한 잔치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 이것은 비유적인 양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주님의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요한 6,55).(16항)
2)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에프렘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그 빵을 먹는 사람은 불과 성령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빵을 받아 먹으십시오. 그 빵으로 성령을 먹으십시오.”11) 교회는 성찬례의 성령 청원 기도로 다른 모든 예물의 원천인 이 거룩한 예물을 간청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거룩한 전례」(Divine Liturgy)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보게 됩니다. “주님께 간청하고 애원하고 청하오니, 저희와 이 예물 위에 주님의 성령을 보내 주십시오. …… 이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영혼이 깨끗해지고, 죄를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나누어 받을 것입니다.”12) 그리고, 「로마 미사 전례서」(Missale Romanum)에서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자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저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몸이 되게 하소서.”1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과 피를 주심으로써 당신 성령을 우리 안에 더욱 가득 부어 주십니다.(17항)
3. 성찬례의 종말론적 특성
1)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거행하는 성찬례(18항)
빵의 축성에 이어서 하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라는 신자들의 응답 속에는 성찬 예식의 특징인 주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1고린 11,26 참조)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어느 면에서는 천국의 선취이며, “후세 영광의 보증”14)입니다. 성찬례의 모든 것은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15) 확신을 갖고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는 사람들은 지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인간이 후세에 누리게 될 충만함의 첫 열매입니다.
2) 천상 교회와 친교를 이루는 성찬례(20항)
성찬례로 고조되는 종말론적 긴장은 우리가 천상 교회와 이루는 친교를 표현하고 강화합니다.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천상 ‘전례’에 결합됩니다. 성찬례는 사실 지상에 나타난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입니다. 성찬례는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꿰뚫고 우리의 여정을 비추어 주는 천상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한 줄기 빛입니다.
3) 현대 세계에 대한 책임의식을 증대시켜주는 성찬례(21항)
성찬례에 내재한 종말론적 긴장이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은 성찬례가 역사를 통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에 힘을 실어 주고, 우리 앞에 놓인 일과에 전념하게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에 대한 기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현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 의식33)을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시민으로서 완수하여야 할 임무에 어느 때보다 충실하여야 할 의무를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복음의 빛으로 더욱 인간다운 세상, 하느님의 계획에 온전히 일치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이바지할 임무가 있습니다.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시대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정의와 연대라는 굳건한 전제 위에 민족 간의 관계를 세우며, 임신[受精]에서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명을 수호하여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약하고 가장 힘없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거의 잃어버린 듯한, ‘세계화된’ 세상의 온갖 모순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할 곳은 바로 이러한 세상입니다. 또한 그러한 까닭에 주님께서는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자 하셨으며, 음식과 희생 제사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인류가 당신 사랑으로 새로워질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요한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성체성사 제정의 심오한 뜻을 밝히는 한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친교와 봉사의 스승이심을 보여 주는 ‘세족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요한 13,1-20 참조). 또한 바오로 사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분열되어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1고린 11,17-22; 27-34 참조).16)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고린 11,26)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찬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그 삶이 어떤 면에서 완전히 ‘성찬례적인’ 것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찬 예식과 그리스도인 삶 전체에 내재된 종말론적 긴장을 훌륭하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된 삶의 결과와 복음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제2장 교회를 세우는 성체성사
1. 친교를 이루는 성찬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찬례 거행이 교회의 성장 과정의 중심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공의회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 희생되신’(1고린 5,7)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며, 동시에 성찬의 빵을 나누는 성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1고린 10,7 참조) 신자들의 일치가 표현되고 실현된다.”17)(21항)
1) 영성체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성사적 친교(22항)
성체성사는 교회의 기원 자체에 영향을 미친 원인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은 새 계약의 백성인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다락방에서 “받아 먹어라.”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마태 26,26-27)고 하신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임으로써 처음으로 예수님과 성사적으로 일치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 교회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25; 루가 22,19 참조) 하신 주님의 명에 따라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성사적 일치를 이룸으로써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이루는 결합은 성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특히 성사적 친교에 완전히 참여하는 영성체로써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강화됩니다.18) 영성체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삽니다(요한 6,57). 성찬례의 친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가 서로 안에 ‘머물러 있음’을 탁월하게 드러냅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요한 15,4).
한편 그리스도의 사명의 연장선(요한 20,21)에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마태 5,13-16 참조) 되어야 하는 교회는 십자가의 영원한 희생 제사의 재현인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결합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모든 복음화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19)
2) 영성체로 이루어지는 형제적 친교(23~24항)
성찬례의 친교는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일치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바오로 성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찬례 참여가 지니는 이러한 일치의 힘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6-17).20)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인 그리스도와 이루는 결합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몸인 교회의 일치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영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인간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형제적 일치에 대한 염원이 충만히 실현되는 동시에, 같은 성찬의 식탁에 동참함으로써 느끼는 형제애가 더욱 고양되어, 단순히 음식을 나눌 때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친교를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친교를 이룸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그리스도 안의 성사,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21)가 됩니다. 일상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죄의 결과로서 인류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불일치의 씨앗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닌 일치를 이루는 힘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바로 교회를 자라나게 함으로써 인간 공동체를 건설합니다.
3)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위한 미사 밖 성체 공경(25항)22)
미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체 공경은 교회 생활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합니다. 미사가 끝난 후 남겨둔 거룩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남아 있는 동안 그 현존은 계속됩니다.23) ─ 희생 제사의 거행에서 비롯되며, 성사적이며 영적인 친교를 지향합니다.24) 목자들은 성체조배와 특히 성체 현시, 그리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계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흠숭 기도를 장려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25)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품에 바싹 기대어(요한 13,25 참조) 그분 마음속의 끝없는 사랑을 느끼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기도의 특성”26)으로 두드러지려면,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나누는 영적 대화와 그분 앞에서 드리는 침묵 조배, 그리고 그분께 대한 진실한 사랑 안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교도권이 수없이 칭송하고 권장한 이러한 신심 실천은27) 수많은 성인들의 모범으로 뒷받침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뛰어난 분은 알폰소 데 리구오리 성인으로서,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신심 가운데,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사에 이은 가장 뛰어난 신심이며,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도움을 주는 신심입니다.”28)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만 아니라 미사 밖에서도 성체 앞에서 기도드림으로써 은총의 원천 자체에 가 닿을 수 있습니다.
제3장 성체성사와 교회의 사도 전래성
1. 성찬례의 사도 전래성(26~28항)
성체성사는 교회를 이루고 교회는 성체성사를 이루는 만큼, 교회와 성체성사의 관계는 너무도 심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는 신앙 고백을 성체성사의 신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도 하나이고 보편되며,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선교에 파견하신 증인들인 ‘사도들의 기초’(에페 2,20) 위에 세워졌습니다.”29) 성체성사도 사도들에게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셨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 내려 왔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사도들이 실천한 바를 이어 받아, 예부터 줄곧 성찬례를 거행해 왔습니다. “교회는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고귀한 유산, 사도들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보존하고 전합니다.”30) 마찬가지로 성체성사도 사도들의 신앙에 따라 거행되기 때문에 사도적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품성사를 받아 사도들의 사목직을 이어받아 그들을 계승한 사람들, 곧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회의 최고 목자와 하나 되어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이 명령을 수행하는’ 주교단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지도를 받습니다.”31)
성찬례도 이러한 사도 전래성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치듯이, “신자들은 자신의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32)하지만, “참으로 그가 지닌 거룩한 힘으로 사제다운 백성을 모으고 다스리며, 성찬의 희생 제사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거행하고 온 백성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33) 사람은 성품 사제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로마 미사 전례서」는 사제만이 감사기도를 드려야 하며, 그러는 가운데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말없이 동참하여야 한다고 규정합니다.34)
2. 성찬례와 직무 사제직(29~33항)
1) “직무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합니다.”35) “그리스도를 대신한다”(in persona Christi)는 문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봉헌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대신하다’라는 말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 희생 제사의 창시자이시며 근본 주체이신 영원하신 대사제와 성사를 통하여 특별하게 일치한다는 의미입니다.”36) 즉 직무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로서’ 미사성제를 거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들의 직무는 그들이 거행하는 성찬례가 회중의 힘을 근본적으로 초월하는 은총이며, 모든 경우에 성찬 축성문을 십자가의 희생 제사와 최후 만찬에 유효하게 연결시키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명백히 해 줍니다.
성찬 거행을 위하여 모인 신자들의 모임이 진정한 성찬 모임이 되려면, 그 모임을 주재하는 성품 사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공동체는 스스로 성품 사제를 낼 수 없습니다. 교역자는 신자들이 사도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주교직의 계승으로써 얻는 선물입니다. 성품성사를 통하여 새로운 사제를 만들고 그에게 성찬례를 봉헌할 권한을 주는 사람은 주교입니다. 따라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명백히 가르치듯이, 성품 사제 외에는 어떠한 공동체에서도 성찬례를 거행할 수 없습니다.”37)
충분한 구성원과 다양한 신자들이 본당을 이루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라 할지라도, 그 공동체를 이끌 사제가 없는 본당 공동체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정상적이겠는가? 본당은 무엇보다도 성찬의 희생 제사의 거행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확인하는 세례 받은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사제가 있어야 합니다. 사제만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찬례를 거행할 자격이 있습니다.38)
2) 성찬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정점이라면, 그것은 또한 사제 직무의 중심이며 정점이기도 합니다. 성찬례는 “성체성사 제정 때에 유효하게 생겨난 성품성사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존재 이유”39)입니다.
사제들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목 활동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목자다운 사랑에서, 사제의 생활과 활동을 통합시켜 주는 끈을 보았습니다. 이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나오며, 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40)이라고 공의회는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들이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하라는 공의회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 사제의 영성 생활과 교회와 세계의 선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신자들이 참석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교회의 행위입니다.”41) 그렇게 되면 제 생활과 교역의 참된 중심인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사제들은 중심을 잃게 하는 일상의 긴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다양한 사목 직무를 다룰 때에 필요한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일상 활동은 진정한 성찬례가 될 것입니다.
3) 사제 생활과 교역에서 성찬례가 차지하는 중심 자리는 사제 성소를 사목적으로 장려할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찬 교역을 수행하는 사제들의 성실함은 신자들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이며 충실한 성찬례 참여와 함께, 젊은이들에게 훌륭한 본보기를 보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 없이 응답하려는 동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사제 성소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자 흔히 사제의 열렬한 목자다운 사랑의 모범을 이용하십니다.
제4장 성체성사와 교회 친교
1. 교회 친교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체성사
‘친교의 교회론’의 개념이야말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의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사상입니다. 교회는 지상 순례 동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 또 신자들 간의 친교를 유지하고 증진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말씀과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생명을 얻고 자라나며,”42) 성체성사 안에서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 교회에게 있어서 성체성사는 당연히 교회 친교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
1) 성체성사는 친교의 정점(34항)
성체성사를 모든 성사의 정점이라 하는 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외아드님과 일치됨으로써 우리가 성부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완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 곧 우리가 하느님께 이르고, 하느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결합으로 우리와 일치를 이루시는 탁월하고 완벽한 친교의 장입니다.43)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 마음 안에 성체성사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키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영성체를 하지 못하고, 미사에도 참례할 수 없을 때에는, 신령성체를 하십시오. 이는 지극히 유익한 것으로서, 우리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44)
성체성사의 연장선에서 주님과의 깊은 친교를 위해 대단히 유익한 신령성체를 권장합니다. 신령성체(神領聖體)란 실제로는 성체를 모시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구하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셨습니다. 그렇듯이 성체의 형상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갈망하는 간절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그 사람 안에 임하십니다. 이렇게 실제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주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여 영성체를 한 것과 같은 은총, 곧 주님과의 깊은 친교를 이루게 되는 것이 신령성체입니다.45)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알퐁소 리구오리가 가르쳤듯이, 신령성체는 우리의 의향의 깊이에 따라서 성사적인 영성체와 비슷한 효과를 가져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기를 열절히 원할수록, 예수님을 사랑으로 모셔 들일수록 그러합니다.
가톨릭 전례는 미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큰 행사 중에는 신자의 숫자를 정확히 헤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병(祭餠, 성체를 만들 제물)의 수를 맞추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에 보통 넉넉한 숫자를 봉헌하지만 때로 모자라기도 하는데, 성체의 숫자가 모자라는 경우에 성체를 영하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령성체로 주님과 깊은 친교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령성체는 미사 시간 이외에 성체조배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며, 특히 본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공소에서는 공소 예절 때 신령성체를 적극 권장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주님의 현존을 묵상하면서 신령성체를 자주 하면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2) 교회의 비가시적, 가시적 친교를 보존 성장시키는 성체성사(35~39항)
성찬례 거행은 이미 존재하는 친교를 전제로 하며, 친교를 공고히 하고 완전하게 합니다. 합법적인 성찬례 거행과 진정한 성찬례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활동으로써 우리를 성부 하느님과 또 우리 서로와 결합시켜 주는 비가시적(非可視的) 친교의 유대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사들과 교회의 위계질서를 통한 가시적(可視的) 친교의 유대를 전제로 하여야 합니다.46) 따라서 성찬례에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성찬례가 친교 안에서 거행되고, 특히 그러한 친교의 다양한 유대를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1) 교회의 비가시적 친교의 유대를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은총 생활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은총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은 사람”(2베드 1,4)이 되고,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덕목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참된 친교를 나누게 됩니다.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화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인내하며,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교회의 품안에 머물러야 합니다.47)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성찬례에 온전히 참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비가시적인 이러한 친교의 유대를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것은 특별하게 주어져 있는 윤리적 의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의무에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1고린 11,28).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감동적인 말로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저 역시 어느 누구도 더럽고 부패한 양심을 가지고 이 거룩한 식탁에 다가오지 않기를 소리 높여 간청하고 부탁하고 애원합니다. 사실 그러한 행위는, 우리가 주님의 몸을 수천 번 받아 모신다 하더라도 결코 ‘친교’라고 부를 수 없으며, 오히려 ‘단죄’이고 ‘고문’이며 ‘징벌의 증대’입니다.”48) “중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시려면 “먼저 자기 죄를 고백하여야 한다.”49)
사실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는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찬례는 십자가의 구원의 희생 제사를 보여 주고 성사적으로 영속시키기 때문에, 바오로 성인이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 5,20)라고 한 호소에 개인적으로 응답할 필요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느끼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중죄의 부담을 느낀다면, 성찬의 희생 제사에 온전히 참여하고자 먼저 고해성사로써 참회하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한편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한 개인의 양심 성찰의 문제 외에 중대하고 명백하며 확고하게 도덕규범에 위배되는 외적인 행위의 경우에, 교회는 공동체의 올바른 질서에 대한 사목적 관심과 성사에 대한 존중심에서 우러나는 직접적인 관여의 책임을 지닙니다. 「교회법전」에서는 올바르고 도덕적인 마음의 준비가 명백히 결여된 상황과 관련하여, “분명한 중죄 중에 완강히 머물러 있는 자들”50)에게는 영성체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2) 교회의 가시적 친교는 공의회가 열거하는 다음과 같은 ‘유대’를 통하여 표현됩니다. “교회의 모임에 완전히 합체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모든 수단을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됩니다. 곧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로 결합됩니다.”51)
교회 안에서 이루는 친교의 지고한 성사적 표현인 성찬례는 외적인 친교의 유대 또한 손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행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체성사는 “말하자면 영성 생활의 정점이며 모든 성사의 목표”52)이므로 성사들, 특히 세례성사와 사제 서품을 통하여 실재하는 친교의 유대를 요구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거나 성찬의 신비에 대한 신앙의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성체를 줄 수는 없습니다.
성찬례의 친교성을 이야기하면서 교회의 보편적 친교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는 언제나 하나의 개별 공동체 안에서 봉헌되긴 해도 결코 그 공동체 단독의 거행이 아닙니다.”53) 따라서, 참된 성찬의 공동체는 마치 자급자족이라도 하듯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다른 모든 가톨릭 공동체와 꾸준히 화합하여야 합니다.
성찬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친교는 자기 주교와 교황과 이루는 친교입니다.54) 그러므로 교회 일치의 탁월한 성사가 주교와 참된 친교를 이루지 못한 채 거행되는 것은 큰 모순일 것입니다.55) 따라서 전례는 위대한 진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성찬 거행은 주교와의 일치뿐 아니라 교황과 주교단, 모든 사제와 전 그리스도교 백성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며 …… 모든 유효한 성찬 거행은 베드로와 온 교회와 이루는 보편적 친교를 표현합니다.”56)
3) 성찬례와 형제적 친교
성찬례는 당연히 형제적 친교를 전제로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찬 모임에서 드러난 고린토 교회의 분열이 그들이 거행하는 주님의 만찬과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설명한 후 형제적 친교의 정신을 되찾으려면 성찬례의 참된 실재를 묵상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1고린 11,17-34 참조).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식탁에서 우리의 평화와 일치의 신비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평화의 유대를 보존하지 않고 일치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신비가 아니라 자신을 거스르는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57)(40항)
4) 성찬례의 친교성과 ‘주일 미사’의 중요성
친교의 증진에서 성찬례가 지니는 특별한 효과는 ‘주일 미사’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자들은 심각한 장애가 없는 한 주일 미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으며, 그에 상응하여 목자들도 모든 신자가 이 계명을 실질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58) “주일 미사는 끊임없이 친교를 선포하고 교육하는 특별한 자리입니다. 다름 아닌 미사 참례를 통하여 주님의 날은 교회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날 교회는 일치의 성사인 자기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59)(41항)
* 주일 미사의 의미(교황 요한 바오로의 교서 「주님의 날」; <부록> 참조)
* 성체성사를 교회 친교의 성사로 생각할 때, 성체성사와 교회 일치 운동의 관계도 그 중요성 때문에 간과해서는 안 될 주제이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부록>으로 첨부하겠습니다.
제5장 성찬례 거행의 품위
1. 성찬례의 외적 형식의 중요성(47-51항)
성체성사는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장엄하게’ 제정되었습니다. 베다니아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처럼, 교회는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바쳐 성찬례라는 탁월한 선물 앞에서 놀라움과 흠숭을 표현하였습니다. 교회는 ‘큰 이층방’을 준비할 임무를 맡은 최초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수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문화들과 만나면서 참으로 위대한 신비에 걸맞은 환경에서 성찬례를 거행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성찬의 신비에 대한 교회의 신앙은 역사적으로 내적 헌신의 자세뿐만 아니라 기념되고 있는 사건의 위대함을 상기시키고 강조하기 위한 외적인 형식으로도 표현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교회 전통들을 마땅히 존중하면서, 성찬 전례를 규정하는 특별한 형식이 점차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 풍부한 예술적 유산도 발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비로 고취된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등은 직접 간접으로 성찬례를 위대한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성당 건축, 성당 안의 제대와 감실의 설계, 성찬례 거행에 사용되는 성당 기물들과 전례복, 교회 음악 등은 흔히 예술적 영감뿐만 아니라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확실한 이해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성찬례는 교회와 교회의 정신을 형성함과 동시에, ‘문화’ 특히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식적 심미적 차원에서 이해한 성찬례의 신비를 흠숭하려는 노력에서, 서방 그리스도인들과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일종의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리스-비잔틴 전통과, 지리적으로 슬라브 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지역의 훌륭한 건축물과 예술 작품들이 그리스도교 예술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하여 어찌 주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방의 종교 예술은 놀랄 만큼 강한 신비 의식을 간직해 왔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예술가들이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단순히 그들 자신의 재능의 표현으로만 보지 않고, 신앙에 대한 참된 봉사로 보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술가들은 단순한 기술적 재능을 뛰어넘어, 성령의 영감에 순순히 자신을 맡기는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한편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례의 의미를 그 모든 요소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이러한 예술작업에는 종교 건물의 건축과 장식을 규제하는 규범들에 대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교회는 항상 예술가들에게 창의력의 여지를 충분히 남겨져 있습니다.60) 그러나 종교 예술은, 교회의 충만한 신앙 안에서 그리고 관할 권위가 적절히 정한 사목 지침에 따라 받아들인 신비를 충분히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이는 조형 미술과 종교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교구는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여 교구 내 제반 건축에 대하여 지도 관리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는 변화하는 시간과 장소의 조건에 적응(토착화)하면서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자양분을 제공하고, 그리스도교의 영감을 받는 문화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적응 작업은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보화’는 너무도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라서 관할 교회 권위자들의 신중한 심사를 거치지 않고 도입된 실험이나 실습을 통하여 빈약해지거나 더렵혀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성찬 신비의 중심성은 그러한 심사가 사도좌와 긴밀한 결합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협력이 매우 중요한 것은, 거룩한 전례는 온 교회의 유산이며 모든 사람이 고백한 유일한 신앙을 표현하고 거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보편 교회와 관련 없이 별도로 지역 교회들이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61)
2. 성찬례의 외적 형식에 대한 사제들의 책임(52항)
성찬례를 거행함에 있어서 그 외적 형식상 교회의 규범을 준수하는 것은 사제들의 막중한 책임입니다. 사제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찬례를 거행하고, 거기에 직접 참여하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성찬례의 한 부분인 보편 교회를 위해서도 친교를 증언하고 친교에 봉사할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이 뒤따랐던 시기에 창의성과 적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던 수많은 남용이 있었음은 애석한 일입니다. ‘형식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특히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교회의 위대한 전례 전통과 교도권이 정한 ‘형식들’을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 흔히 전혀 부적절한 독단적 쇄신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찬례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다루거나 그 거룩함과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전례는 전례의 집전자나 신비가 거행되는 공동체 그 어느 쪽의 사적 소유도 아닙니다.62) 그러므로 사제는 성찬례 거행에 있어 보편 교회의 전례 규범을 매우 충실히 준수해야 합니다. 전례 규범들은 성찬례의 진정한 교회적 본질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점이 규범들의 가장 심오한 의미입니다.
제6장 ‘성찬의 여인’이신 성모님의 학교에서 배운다
1. ‘성찬의 여인’이신 성모님(53~57항)
우리가 교회와 성체성사의 깊고 풍요로운 관계를 재발견하고자 한다면,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모범이신 성모님을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지극히 거룩한 성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 거룩한 성사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첫 공동체에서 “마음을 모아”(사도 1,14) 기도하던 사도들 가운데 성모님께서 계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빵을 나누어 먹는 일에 전념한”(사도 2,42)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성찬례 거행에 분명히 함께 계셨습니다.(53항)
그러나 성모님께서 성찬의 잔치에 참석하신 일 외에도, 우리는 성모님의 내적 자세에서 성모님과 성체성사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하여 ‘성체성사의 여인’이십니다. 성모님을 모범으로 삼고 의지하는 교회는 성모님께서 이 지극히 거룩한 신비와 맺고 계시는 관계에서도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체성사가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기를 요구할 정도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신앙의 신비라면,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갖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은 성모님 밖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행하신 것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또한 주저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고 하시며 그분께 순명하라시는 성모님의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 주신 어머니다운 관심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내 아들의 말을 믿어라. 그가 물을 술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빵과 포도주도 그의 몸과 피가 되게 하고, 이 신비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부활의 생생한 기억을 전해 줌으로써 ‘생명의 빵’이 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54항)
어떤 의미에서 성모님께서는 순결한 당신의 태를 하느님 말씀의 강생을 위하여 바치심으로써 성체성사 제정 이전에 이미 성체성사의 신앙을 실천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또한 강생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 때에 성모님께서는 몸과 피라는 육체적 실재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성모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모든 신자 안에 성사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당신 안에서 선취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천사에게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말씀하신 것과 모든 신자가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실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도록 요청받으셨습니다(루가 1,30-35 참조). 동정 성모님의 신앙과 일치하여, 우리도 성체성사의 신비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성모님의 아드님이시기도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그분의 완전한 인성과 신성으로 현존하심을 믿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성모님께서는 또한 강생의 신비로써 교회의 성체성사 신앙을 선취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성모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되신 말씀을 잉태하고 계셨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현존하신 역사상 최초의 ‘감실’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태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나, 말하자면 성모님의 눈과 목소리를 통하여 당신의 빛을 비추심으로써 엘리사벳의 흠숭을 받으셨습니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를 품안에 안고 들여다보시는 성모님의 기쁨에 넘치는 그 눈길이야말로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비할 데 없는 사랑의 모범이 아니겠습니까?(55항)
성모님께서는 해골산에서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예수님 곁에 계시면서 성찬의 희생 제사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가셨을 때(루가 2,22) 늙은 시므온은 성모님께 이 아기가 장차 “반대의 표적”이 되고 예리한 칼이 성모님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루가 2,34-35 참조).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형의 비극은 이렇게 예고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십자가 아래 서 계신 고통의 성모님(Stabat Mater)도 예시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날마다 해골산을 준비하면서 일종의 ‘선취된 성찬례’를 경험하셨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일치함으로써 절정에 달하고 부활 뒤에 사도들이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거행한 성찬례에 참례함으로써 드러나게 될 갈망과 봉헌의 ‘영적 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다른 사도들의 입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가 22,19)라는 최후 만찬 때의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성모님의 느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시고 성사적 표징 아래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몸은 바로 성모님께서 당신의 태중에 잉태하셨던 그 몸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신의 심장과 하나 되어 고동친 그 심장을 당신의 태중에 다시 받아들이고, 십자가 아래서 겪으신 일을 다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입니다.(56항)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여라”(루가 22.19).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성취하신 모든 것이 해골산의 ‘기념제’ 안에 현존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어머니께 해 드린 모든 것도 현존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성모님께 맡기셨으며, 그 제자를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맡기셨습니다. 성모님께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참조).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은 이러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요한처럼, 우리의 어머니로 새롭게 우리에게 맡겨지신 분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셔 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화되고자 노력하는 여정에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학교에 들어가 그분을 우리의 동반자로 모셔 들인다는 것이니 얼마나 감사로운 일입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교회와 함께 계시며 교회의 어머니로서 현존하십니다. 교회와 성찬례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면, 성모님과 성찬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모님을 기념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서방과 동방 교회의 성찬 거행의 변함없는 일부가 되어 왔던 것입니다.(57항)
2. 성찬례의 관점에 본 ‘성모 찬송’
교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 제사에 완전히 결합되며, 성모님의 정신을 교회의 정신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성찬례의 관점에서 ‘성모 찬송’(Magnificat)를 다시 읽을 때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성모 찬송’처럼 무엇보다도 찬미와 감사입니다. 성모님께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라고 외치셨을 때 이미 태중에 예수님을 잉태하고 계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시고, 또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찬의 태도’입니다.
아울러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전에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에 따라 구원 역사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상기시키시고(루가 1,55 참조),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놀라운 일, 곧 구원의 강생을 선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모의 노래는 성체성사의 종말론적 긴장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빵과 포도주라는 ‘보잘것없는’ 성사적 표징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신”(루가 1,52 참조) 새로운 역사의 씨앗이 세상에 뿌리를 내립니다. 성모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성찬례 안에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계획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습니다.
성모의 노래(Manificat)는 성모님의 영성을 드러내며, 성체성사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데에 이보다 더 탁월한 것은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삶이 성모님의 삶처럼 완전한 찬미와 감사의 노래가 되도록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결 론
성체와 성작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합쳐지고’ 해골산의 비극이 생생하게 재현됨으로써, 그 비극의 신비로운 ‘동시대성’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날마다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며 그들의 눈을 새로운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새 희망으로 열어 주셨던 천상의 나그네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루가 24,13-35 참조).
동정 마리아께 나신 주님,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수난하시고 희생되셨나이다! 여기에 교회의 보화, 세상의 심장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갈망하는 성취에 대한 보증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위대하고 초월적인 신비이며, 우리 마음이 현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도록 요구하는 신비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감각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가 천주 성자 예수 흠숭하나이다(Adoro Te devote)의 노랫말처럼 보고 만지는 것으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아는 데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그리스도의 말씀에 뿌리박은 신앙만으로 충분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끝에 베드로가 한 신앙 고백을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 드리도록 합시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59항)
제삼천년기를 맞아 교회의 자녀인 우리는 새로운 열정으로 그리스도인 삶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 여정을 위해 이미 마련되어 있는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계획은 복음과 살아 있는 성전(聖傳)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그 계획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본받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삼위일체의 삶을 영위하며, 천상 예루살렘에서 역사가 완성되기까지 그분과 함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63)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러한 새롭고 추진력 있는 계획의 실행은 성체성사로써 이루어집니다.
성덕에 대한 모든 노력, 교회 사명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 모든 사목 계획에 필요한 힘은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이끌어 내야 하며, 또한 그 정점인 신비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의 희생 제사, 그분의 부활, 성령의 은사, 성부께 대한 흠숭과 순명과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경시한다면 우리의 결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60항)
희생 제사이고 현존이며 잔치인 성체성사의 신비는 축소나 남용을 불허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성찬례 거행 때에 그리고 영성체 후나 미사와는 별도의 기도와 성체 조배 시간에 예수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 안에서 온전히 체험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간들은 교회가 굳건히 세워지는 시간들이며, 교회의 참모습, 곧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 하느님의 백성이고 성전이며 가족인 교회, 성령에게서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인 교회, 구원의 보편적 성사, 교계적으로 구성된 친교인 교회의 모습이 명확해지는 때입니다.(61항)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성체성사 신심의 위대한 해석자들인 성인들의 학교에 우리도 자리를 잡읍시다. 그들 안에서 성체성사 신학은 생생한 실재의 빛을 얻습니다. 이 빛은 ‘전염’되며, 이를테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특히, 그 누구보다도 성체성사의 신비가 빛의 신비로 드러나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귀 기울이도록 합시다.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 있는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게 됩니다. 성모님 안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새로워진 세상을 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하늘에 들어가신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이 지상에서 성체성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며, 어떤 면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선취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Veni, Domine Iesu! 묵시 22,20)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의 소박한 표징 안에서, 우리 여정의 힘과 양식이 되시어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신비 앞에서 이성은 한계를 느끼지만, 성령의 은총으로 빛을 받은 마음은 요청된 응답을 명확히 이해하고, 무한한 사랑과 흠숭에 빠져듭니다. 탁월한 신학자이며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노래한 정열적인 시인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희망을 가지고, 기쁨과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 마음의 목적지를 바라봅시다.(62항)
"착하신 목자, 참된 빵이신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오소서, 천상의 빵이시며 착한 목자, 저희에게 자비의 표지를 보여 주소서. 저희를 길러 주시고 지켜 주시어, 불멸의 나라에서 당신의 빛나는 영광을 보게 하소서.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현세의 양식이시며 후세의 안식이신 주님, 오셔서 저희가 주님의 초대된 손님, 주님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과 사는 성인들과 함께 영복을 누리는 벗이 되게 하소서."
<부록>
※ 성찬례와 교회 일치운동
1. 성찬례에 있어서 교회 일치운동의 소명과 장애
우리는 최근 몇십 년 동안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과 다른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의 형제자매들을 교회 일치 운동의 길로 들어서도록 이끌어 주신 삼위일체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64)(43항)
세례 받은 모든 신자는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ut unum sint, 요한 17,11)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께 응답하도록 요청받았음을 잊지 맙시다.(61항)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소명과 그 갈망은 우리를 더욱 성체성사에 의지하게 만듭니다. 성체성사는 일치를 적절히 드러내고 그러한 일치의 탁월한 원천이므로 하느님 백성의 가장 뛰어난 일치의 성사입니다.65) 교회는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며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내려 주심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66)(44항)
물론 이 길은 멀고,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커다란 장애물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예언자 엘리야가 들었던 그 말씀을 마치 우리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듣게 됩니다.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1열왕 19,7). 주님께서 우리 앞에 놓아 주신 성체성사의 보화는 공동의 세례를 통하여 결합된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온전히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하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61항)
그러나 이 보화를 함부로 쓰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 보화가 ‘신앙과 사도직의 계승을 통한 일치’의 성사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요구를 존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체성사에 합당한 탁월함을 부여하고, 성체성사의 모든 차원과 요구를 축소하지 않도록 조심함으로써, 우리가 이 선물의 위대함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초세기부터 이 ‘보화’를 수호하려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속적인 전통에 따라 이 보화의 위대함을 인식하도록 촉구받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고무된 교회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관한 교회의 신앙과 가르침을 온전히 미래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지나칠 위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사 안에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가 요약되어 있기”104) 때문입니다.(61항)
2. 갈라진 그리스도교와의 친교 문제
로마에서 갈라진 그리스도교들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이 유효하게 성찬 거행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친교가 객관적으로 요구됩니다.”67) 성찬례가 이루는 교회 일치는, 신앙 고백과 성사들 그리고 교회 통치의 유대 안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친교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이 유대가 완전하게 회복되기 전까지는 같은 성찬의 전례를 함께 거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거행은 유효한 수단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가 그러한 목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에 대한 의식을 약화시키고, 이런 저런 신앙의 진리들에 대하여 모호성을 끌어들이거나 심화시킴으로써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68)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의 유일한 성찬례를 함께 거행하려는 뜨거운 열망이 있습니다. 이 열망 자체가 이미 공동의 찬미 기도요 동일한 탄원 기도입니다. 우리는 갈수록 더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로 향합니다.”69)
3. 동방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45~46항)
한편 선의의 동방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에서처럼,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교회나 교회 공동체들의 개별 신자들에게 특별한 상황에서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게 예외적으로 허락하는 것은 개별 신자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중대한 영적 필요성을 충족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지, 교회 친교의 가시적인 유대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다른 교파 신자들 간의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접근법으로, 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진 선의의 동방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는 않지만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받기를 크게 갈망하고 자유로이 이를 요청하며, 이들 성사 안에서 가톨릭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을 표명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톨릭 성직자들이 특별한 경우에 성사를 집전할 수 있게 허락하였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들 역시, 특수한 경우와 특별한 상황에서, 이 성사들을 유효하게 집전하는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이러한 성사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70)
그러나 특수하고 개별적인 경우들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면제도 받을 수 없는 조건들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합니다. 이들 성사에 관한 하나 이상의 신앙의 진리와, 또 그 가운데서도 이들 성사의 유효성을 위하여 직무 사제직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성사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일 적절한 자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그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들도 유효한 성품성사가 없는 공동체에서는 성체를 받을 수 없습니다.71)
※ 신자들의 능동적 미사참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이 가르침에 따르면,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는 ‘인간성화와 하느님 찬양의 완전한 효과를 위해’, ‘전례자체의 본질에서 요구되기에’ 그리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정신을 제공하는 샘이기에’ 필요하다. 그리고 능동적 참여는 ‘그 권리와 의무가 세례성사의 힘에서 나오며’, ‘신자들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미사의 각 부분에 충실한 것이 능동적 참여’를 구현하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능동적 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예식서의 개정 단계부터 능동적 참여를 고려해야 하고’, ‘신자들의 전례교육을 받도록 배려하고’, ‘성직자들도 전례의 스승이 되도록 교육하여’ 능동적 참여를 촉진시킨다.
신자들이 미사에 올바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잘 알고(scienter)’, ‘의식적으로(conscie)’, ‘경건하게(pia)’, ‘내적 외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actuosam internam et externam)’, ‘온전하고 완전하게(plena)’ 그리고 ‘효과적으로(fructuose)’ 참여해야 한다. ‘잘 알고(scienter)’ 참여한다는 것은 전례, 표징, 성사, 미사(성체성사), 미사의 각 부분 등에 대해 이해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conscie)’ 참여한다는 것은 의식, 관심, 정성, 청명한 정신, 새로운 마음 등을 갖춘 참여이다. ‘경건하게(pia)’ 참여한다는 것은 공경심을 갖추어, 깊이 삼가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는 참여이다. ‘내적 외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actuosam internam et externam)’ 참여한다는 것은 환호/응답, 노래와 성가, 회중의 전례문, 동작과 자세, 침묵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참여이다. ‘온전하고 완전하게(plena)’ 참여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각하거나 일찍 자리를 뜨지 않는 참여를 말하고, 더나가 ‘온전하고 완전한(plena) 참여’는 영성체까지 나아가는 참여를 말한다. 끝으로 ‘효과적으로(fructuose)’ 참여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나 응답 기도나 성가를 통하여 거기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그 말씀이나 기도나 가사에서 위로를 얻으며, 생활개선의 결심을 하고, 이웃사랑의 결심을 하는 것을 말하고, 더 나아가 ‘효과적으로(fructuose)’ 참여한다는 것은 영성체의 효과(참조. 가톨릭교회교리서 1416항)를 내는 참여를 말한다.
전례행위는 “교회의 몸 전체에 관련되고 그 몸을 드러내며 영향을 끼친다. 교회의 각 지체는 위계와 임무와 실제 참여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관여한다.”(전례헌장 26ㄴ항: 가톨릭교회교리서 1140항) 그리고 “전례 거행에서는 누구나 교역자든 신자든 각자 자기 임무를 수행하며 예식의 성격과 전례 규범에 따라 자기에게 딸린 모든 부분을 또 그것만을 하여야 한다.”(전례헌장 28항: 가톨릭교회교리서 1144항) 그래서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는 다른 특별한 직무들이 있는데, 성품성사로 축성되지 않는 복사, 독서자, 해설자, 성가대, 예물봉헌자, 성체분배자 등의 전례 봉사 직무들은 전례 전통과 사목적 필요에 따라 주교가 정한다(참조. 전례헌장 29항: 가톨릭교회교리서 1143항, 1348항). 그러나 또한 “‘아멘’으로 참여를 표현하는 전체 회중은 각자 나름대로 전례 거행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48항) 그리고 바로 이때 “온 회중은 모든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으로 하나 되어’ 각자의 임무에 따라 ‘전례거행자’(liturgus)가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144항)
※ ‘주님의 날’(주일)에 대하여
1. 주일의 기원 및 역사
1) 성서의 증언
그리스도교의 주일에 대한 첫 증언은 신약성서, 특히 4복음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부터 주일신학의 기초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루가 24,13-35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내용은 주일의 기본 구조를 잘 드러내준다. 즉 제자들과 함께 걸으며 말씀을 나누고 빵을 나누셨듯이, 주일 날 신자들이 함게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례를 거행하는 주일의 기본 구조를 보여준다.
* 요한 20,26-29 (예수의 발현과 토마의 신앙고백)
이 구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집회) 주님이 나타나셨고(주님의 현존) 그로인해 토마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신앙고백을 발하고 있다. 즉 “집회 - 주님의 현존 - 신앙고백”이라는 주일의 의미를 잘 드러내 준다.
* 1고린 16,2-3 (헌금의 유래)
여기서 바울로 사도는 주간 첫날(주일)마다 각자 형편대로 저축하도록 권고하며, 자신이 갔을 때 별도의 모금없이 그 성금을 예루살렘 교회로 가져가겠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주일 헌금의 유래가 되며, 주일이 애덕을 완성하기 위해 있음을 알려준다.
* 사도 20,7 (빵을 나눔)
여기서는 “안식일 다음날 우리가 빵을 떼기 위해 모였을 때”라고 시작되는데, 이는 주님의 날인 주일에 신자들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는 성찬례를 거행했음을 의미한다.
* 신약성서에 나타난 주일의 의미
예수가 부활하신 날이며, 부활하신 예수가 공동체에 발현한 날이다.
애덕을 기억하는 날이다.
여기서 주일신학이 발전하게 된다.
2) 교부들의 전승
* 디다케에서는 주님의 날에 집회(성찬례)를 갖는데, 성찬례 전에 각자는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전한다.
* 여러 교부들에게 주일이 기쁨의 날이요 새로운 창조의 날임이 강조되고 있다.
* 히뽈리뚜스의 “사도전승”에서는 주일의 전례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즉 이 날 그리스도교의 입문성사가 거행되고, 주교서품도 주일에 이루어졌다.
3)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증언에 나타난 주일의 의미
그리스도교 집회의 날
자유스런 날
새로운 창조의 첫째 날
그리스도교 입문성사를 위한 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례를 거행하는 날
주교서품을 위한 날
화해를 위한 날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있어서 기쁨의 날
4) 주일의 역사적 변천
매 주간마다 돌아오는 주일은 초대 교회에서 매년 특별한 축일로서 거행되던 부활 축일보다 먼저 지내온 관습이었다. 알꾸인(Alcuinus) 때부터 미사 경본에는 주일뿐 아니라 주간 각 요일에도 고유한 미사 양식이 제시되어 있으며 성무일도에는 매주간마다 시편 전체를 읊고 끝맺도록 했다.
주간의 생활 율동은 셈족 문화권에서 기인된다. 이는 십계명중 제 삼계에도 제시되어 있으며 창세기 첫 장에도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주간은 셈족으로부터 알렉산드리아를 거처 희랍 문화권에 도입되었다. 이때부터 주간의 7일이 7개의 성좌들(5개의 성좌들과 태양과 달)과 연관되었고 그 당시 이 성좌들에게 신적 경배를 드렸음으로 신들의 이름으로 표기했다: 화성의 날(로마의 군신),수성의 날(로마의 상업신, 도둑신, 희랍:Hermes),목성의 날(로마의 주신:Juoiter, 희랍:Zeus),금성의 날(로마 미와 사랑의 여신=Venus,희랍:Aphrodite),토성의 날(로마의 농업신=Saturnus:Jupiter의 아버지, 희랍:Kronos)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주간과 그 주간 요일 명칭도 유다교에서 받아들였다: 주간 요일들을 단순히 서열 숫자로 표기하였다. 로마 라틴 민족만 ‘주간의 첫째 날(마태 28,1 참조),둘째 날.... 대신에 주간 1일...(feria I,II,....)로 표기했다. 훼리아(feria)라는 말은 그 본래의 뜻인 축일이나 휴식일 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주간일 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 신자들은 처음에는 사바트(토요일)도 계속 지켜 왔지만 그리스도교의 주일인 일요일을 사바트 축제를 하루 뒤로 물려 지내는 양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일요일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구원 사업을 완성하신 것을 기억하며 미사 성제를 거행하던 날이었다. 일요일에 육신 일을 하지 않고 휴식을 해야한다는 것은 수세기 동안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일요일을 구약의 사바트의 계속 이행이나 대신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 신자들은 없었다. 이는 교부들이 십계의 삼계를 설명함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무도 일요일에 휴식을 함으로써 주일의 계명을 이행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사바트 날 쉬신 것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통하여 죄악의 행위에서 쉬고 착한 양심으로써 항구한 마음의 사바트(sabbatum cordis)를 지켜 제3 계명을 이행한다 고 교부들은 설명하고 있다.72)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일요일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 당시 그 날을 지칭하던 명칭에서도 잘 드러난다. 요한 묵시록에는(1,7) 일요일을 ‘주님의 날(κυριαχὴ ἠμἐρα)’이라 하였고 그때부터 희랍인들은 단순히 Κυριαχἠ(주님의 것), 라틴어로는 Dominica(주의 날)라 불렀다. 이로써 일요일을 하느님께 속한 날로서 하느님께 영광과 공경을 드려야하는 날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날로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사도 바오로는 당신 서간에서 여러 차례 고백하고 있다. 어떠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였는지 하는 것은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축일에서 한 강론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자들 중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소생시킴으로써 그를 주님(Κὐριος)과 메시아로 삼으셨다”(사행 2,36). 그리스도는 당신의 부활의 영광으로써 완전한 의미의 당신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님이 되셨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퀴리오스(Κὐριος)나 퀴리아케(Κυριαχἠ)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가 당신의 부활로써 획득하신 왕권과 영광중에 계신 주님을 생각했다. 이 용어는 그 당시 활용되던 뜻에도 부합하였다. 퀴리오스는 로마 황제를 칭하는 존칭어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로 황제 자신에게 이 칭호를 부친 것은 네로 황제 때부터였다. 이 칭호는 동방의 왕족 숭배 사상에서 기인되었고 종교적 경배를 황제가 요구함으로써 통치자의 숭배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스미르나의 주교 뽈리까르보는 황제에게 퀴리오스 케이사르(Κὐριος κεἰσαρ)라고 호칭했다면 화형장에서 죽음을 모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였다(Mart.Polyc.,8,2). 이러한 배경 하에서 퀴리아케나 도미니까라는 말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귀에도 황제의 날 혹은 왕의 날로 귀하게 들렸다.
도미니까(Dominica)라는 용어는 일요일을 지칭하는 말로 로마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활용하고 있는 반면에 게르만 계통의 언어에서는 ‘태양의 날(Sonntag,Sunday)'이라는 외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적 명칭을 사용한 근거는 무엇일가? 이미 순교자 유스띠노는 외교인들에게 한 그의 첫 호교론에서 이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소위 태양의 날”에 함께 모인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외교적 태양 숭배에서 전승되는 이 명칭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 태양‘이라는 생각과 결부시킨 때문이다. 이 명칭의 배후에는 부활 전야의 빛의 상징과 부활 축일의 참 빛의 상징을 생각하는 사상이 숨어있다. 이러한 사상은 불멸의 태양으로서 높이 평가된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축일을 거행하게끔 했다. 떠오르는 태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시킨 것이다. 4세기부터 태양의 날인 일요일을 ’부활의 날(Ἀναστἀσιμος ἠμερα)‘이라고 할만큼 부활의 사상과 밀접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부활의 날이라는 명칭은 로서아에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Wosskressenje). 서방 교회에서도 카롤링거 시대까지 일요일을 부활의 날로 불렀다(dies resurectionis).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일요일을 주간 첫날이 아니라 주간 마지막 날인 ‘8일째 날’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일요일을 주간의 첫 날이 아니라 맺음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성서의 계산법 때문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상 역시 이중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우선 주일 전 요일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날들이요 새 생명으로 소생한 부활 날은 그 종착점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또 다른 사상은 일요일은 사바트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주일인 일요일은 사바트를 능가한다는 것이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창조 사업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당신 사업을 계속하시어 새로운 창조의 기초를 만드신 날이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8이라는 수는 종말의 휴식을 뜻하는 내용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세상의 종말도 부활과 함께 이미 시작된 것이다. 교부들도 주일인 일요일을 8일째 날로 생각하고 이 날과 부활을 결부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그들이 성서를 비유적으로 주해하면서 8이라는 수가 언급될 때는 언제나(노아의 방주 안에 8명의 식구가 있었다는 것, 예수 탄생 후 8일째 날에 할례를 받으심 등) 신약의 은총의 질서를 예시하는 것으로 풀이 하고 있다. 이러한 명칭은 순서를 따라 계산하는 유아교의 주간일 들의 계산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들은 월요일을 주간 둘째 날로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중세기에 그리스도교로 입교한 슬라브 민족, 항가리 민족, 발트 민족인 동 구라파의 신생 민족들은 주간의 명칭을 서열 숫자로 표기할 때 월요일을 주간 첫 날로 시작하도록 했다는 것은 특기 할만하다(소련 연방이던 리뚜아니아에서는 주간 일들을 연속적으로 세는데 월요일을 주간 '첫날=primadienis'로 계산하고 있다).
일요일은 주님의 날로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였지만 주님의 날을 기점으로 그 전날들에도 주님의 수난을 기념해야 된다는 생각이 주간 주기를 형성케 했다. 수난 사상을 회상하고 기념하기 위한 날들로 처음 감안된 요일들이 수요일과 금요일이었다. 이 요일들은 유다교의 축제 날들인 월요일과 목요일을 대신하는 그리스도교의 주간 축제로 이미 디다케(Didache c.8)에 언급되고 있다. 떼르뚜리아노는 이 요일들을 반 단식의 날들(semijejunium)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이 요일들에는 ‘오후 3시까지만’ 단식을 하도록 한 때문이다. 또한 이 요일들은 순회 미사요일(dies stationis)들이며 이 명칭은 단식과 서서하던 기도와 결부된 데서 기인한다. 이들 요일들의 단식이 초대 그리스도 말기에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애란에서는 목요일을 ‘두 단식 사이에 있는 날’이고도 하였다.
초기부터는 아니지만 늦어도 3세기부터는 이 요일들의 단식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는 금요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정사하신 날이요 수요일은 유다스가 예수를 배반한 날이었기 때문이다(마태 26,2). 이 점에 있어서도 전에 교회력 안에 고난 시기가 설정된 것과 같이 구원의 사건을 하나의 드라마로 개념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난의 드라마는 물리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원수의 힘이 개입되어 시작되었다는 사상이 표출되고 있다.
로마 교회와 서방 여러 교회들은 수요일과 금요일 단식 외에 토요일을 주간 단식일에 삽입시켰다. 이 토요일 단식은 일반적인 통상 단식의 ‘덤(Superpositio)'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근거 하에 구 교회법전에는 사순시기 토요일과 사계의 토요일을 단식일로 정했다고 볼 수 있다(구 교회법전 1252). 교황 인노첸시오 1세의(+417) 한 편지에서 전해주는 것과 같이 매주간 토요일을 성 토요일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이 날은 주님께서 죽음의 노획물로 무덤에 묻히셨던 날이며 사도들이 수심에 깊이 잠겨있던 날이다. 구원의 사건을 주제로 하였던 주간의 사상이나 주일인 일요일을 주간의 마지막 날로 생각한 것은 초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 후 주일은 모든 신비의 총화라는 사상이 전파되기 시작될 때 주간 개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미 카롤링거 시대에 전례 해설가들은 부활과 성령 강림 함께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의 날도 일요일에 지내야한다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주일은 모든 신비의 총화로서 거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다른 사상은 중요한 신비들은 모두 성삼위의 신비 안에 총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13세기부터 성삼 감사송이 주일 감사송으로 사용되었다. 로마에서는 1759년 교황 끌레멘스 7세 때 주일에 성삼 감사송이 활용되도록 했다.
이러한 주일에 대한 사상의 새로운 요소는 주일이 주간의 마침이며 정점으로 생각하는 관점에 큰 비중을 두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 전승되는 주간의 계산법이 재귀 되었다: 일요일이 다시 주간 첫 날이 되었다. 이러한 주간의 계산법을 뒷받침한 것은 실질적으로 대림절이나 사순시기등 새로운 축제 시기가 주일로 시작되도록 했다는 데도 있다. 이러한 사상은 주간 요일들을 해석하는데도 영향을 주었다. 일요일을 육화의 날로 생각하는 사상은 월요일을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화요일을 예수의 세례 기념일로 연관을 짓게끔 했다(12세기 Honorius Augustodinensis).
다른 지역에서는 주일을 성삼의 날로 생각하는 주간의 날들에 성 삼위를 분배하여 기념하기도 했다. 예컨데 일요일을 성부께, 월요일을 성자께(신적 지혜에 대한 미사 양식으로),화요일을 성령께(성령에 상응하는 미사 양식으로) 봉헌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각 위를 따로 특별히 공경하는 미사 양식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비오 5세의 미사 경본에는 삽입되지 않았다. 교황 비오 10세 때 월요일에만 성삼 허원미사를 봉헌하게 했다.
새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의 사상이 새롭게 발전되면서 월요일에 연령들을 특별히 기억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중세기에는 아직도 정화되어야 하는 연령들도 주일에 주님의 부활의 기쁨에 참여했다가 월요일에는 다시 연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이 널리 전파되었다. 그래서 월요일에 고통에로 다시 돌아가는 그들을 기억하며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는 이러한 사상을 공식적으로 인주하지 않았지만, 다른 축일이 지정되지 않은 월요일에는 미사 중 위령을 위한 기도를 첨부 하여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관습은 교회의 오랜 규범이었다. 이 관습은 1955년 전례 규범 쇄신으로 페지되었다.
옛부터 전승되는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월요일을 불상한 영혼들의 특별한 위로자요 동반자로 생각한 천사들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기도 했다. 또한 월요일에 천사들을 기념하는 것과 함께 위대한 성인들에게도 주간의 요일들을 봉헌하기도 했다. 비오 5세의 미사 경본에는 사도들의 허원 미사를 수요일에 지내도록 했고 비오 10세 교황 때는 성 요셉의 허원 미사를 지내도록 했다.
주간 요일들에 천사나 성인들의 허원 미사를 허용했지만 주간의 옛 사상은 지속되었고 중세기에는 더욱 발전되었다. 이와 같이 비오 5세의 미사 경본에는 금요일에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십자가 허원 미사를 드리게 하였고 목요일에는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의 설정을 기념하는 허원 미사를 드리도록 했다. 오지리와 남부 독일 지역에서는 근자에까지도 목요일에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의 허원 미사를 장엄하게 지냈다. 옛 주간의 사상에서 토요일도 새로운 뜻을 지니게 되었다. 토요일은 동정 마리아께 봉헌된 날로서 근자에까지도 특정된 급수의 축일이 없으면 동정녀 마리아의 허원 미사뿐 아니라 성무일도도 하였다. 토요일을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는 사상은 알꾸이누스 때부터 시작되었다. 약간 후대에 마리아께 봉헌된 토요일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설을 우리는 들을 수 있다: ‘주님께서 무덤에 묻히셨던 날에도 굳은 신앙을 갖고 있던 유일한 사람은 마리아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날 특별히 공경을 받으셔야 한다.’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 주일은 양면으로 그 분기점을 이루는 정점이다:‘부활의 날로서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날이며 다시 주간을 여는 날이다.
주님의 날인 주일 축제는 구원된 공동체인 교회가 구원의 은총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로 최대의 공경을 드리는 날로 존속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초창기부터 그리스도 신자들이 미사 성제를 공동체적으로 거행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기를 소망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313년 그리스도교 종교 자유 칙령이전 박해 중에 개최됐던 스페인 엘비라의 지방 주교회의는 시내에 살면서도 계속 3주일 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는 신자들에게 벌칙 규정을 처음으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신자들은 속죄자들 사이에서 얼마 동안 지내야 한다고 했다’. 초세기에는 주일 미사 성제를 아침 새벽녘에 지냈다. 4세기부터는 일상의 일들로 붐비기 시작하는 ‘3과시’인 오전 9시에 주일 단체 미사를 지냈다. 1000년 이상 그리스도 신자들은 주일 단체 미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14세기부터 비로소 이 원칙이 차츰 수월해졌다.
일요일 아침 단체 미사에 신자들이 참여하기 위하여 이 시간 동안 일상 일에서 휴업을 해야했다. 이미 꼰스딴틴 대제는 이 미사 참여를 위해 군인들에게도 자유를 주었다. 광대 놀이,연극 공연,법정 재판도 주일에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주일 온 종일 휴식을 해야한다는 규정은 6세기에야 비로서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휴식에 영향을 준 것은 구약의 사바트 휴식이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영향을 준 또 하나의 풍습은 축제를 휴식과 결부시켰던 게르만 민족의 관습이었다. 538년 오르레앙 지방 주교회의는 주일에는 말이나 소를 타고 다녀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것은 미신으로 배척해야 한다고 주지시키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주일의 휴식은 일반적 관습이 되었고 그 후 법적 규정이 되었다.
주일 축제의 내용을 주제별로 개괄하여 본다면 주일은 부활과 동일한 신비를 경축한다. 우리 인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되어 영원한 생명에로 부림을 받았다는 의식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의 미사 성제는 모든 주일 축제의 핵심이며 따라서 교회법으로 미사에 참여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수세기를 거처 오면서 주일에는 서서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과 기쁨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래서 주일 미사 전례에는 ‘무룹을 꿇읍시다(flectamus genua)'하는 기도가 없다. 초대 그리스도교 말기에 여러 전례 형태 안에는(에루살렘, 남부 불란서 등) 주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복음을 봉독했다. 중세기 초기에는 로마-불란서적 전례서들 안에는 구원의 시비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주일 감사송들이 많이 실려 있다. 후대에 대 영광소과 신경은 부활의 기쁨의 표현으로 주일 미사 성제와 밀접히 결부되었다. 주일 성무일도의 특히 야과경과 아침찬미의 시작 시편들과 저녁기도의 시작 시편들은(Dixit Dominus....) 그리스도의 개선을 노래하고 있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일’ 이해
*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며 부활 기념일로서의 주일의 원초적 의미가 점차 약화되었다. 그래서 주일의 본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 106항을 통해 주일의 기원과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 그 내용을 살펴보면
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에 그 기원을 둔 사도시대의 전통을 따라, 교회는 여덟째 날마다 빠스카의 신비를 경축한다.
② 이 때문에 이 날을 합당하게 주의 날 또는 주일이라 부른다.
③ 이 날 신자들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 예수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④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킴으로써 인류 구원의 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1베드 1,3).
⑤ 그러므로 주일은 근원적인 축일로, 신자들의 신심을 일깨워, 이 날이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강조해야 한다.
⑥ 이런 이유로 주일은 전례주년 전체의 기초요 핵심이다.
*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이 주일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 것은
① 그리스도교 집회(in unum convenire)
②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Verbum Dei audientes)
③ 성찬례 거행(Eucharistiam participantes)이다.
이러한 전례헌장의 강조점을 통해 주일의 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례를 나누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집회가 열리는 주일은, 역사적 변천과정 속에서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하고 하나의 법규정 내지는 의무규정으로 왜곡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경향을 거슬러 다시금 성서와 교부들의 증언을 토대로 주일의 본 의미를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주일신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주일신학이란 바로 전례주년 전체의 기초요 핵심을 이루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 존재 이유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주일의 올바른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노력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일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증거하는 것은 주일을 지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본연의 사명이라 할 수 있겠다.
3. 교서「주님의 날」(DIES DOMINI)이 가르치는 ‘주일’
- 주님의 날(Dies Domini) : 창조주의 위업에 대한 경축
- 그리스도의 날(Dies Christi) :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며 성령을 선물로 주신 날
- 교회의 날(Dies Ecclesiae) : 성찬 모임 - 주일의 핵심
- 인간의 날(Dies Hominis) : 주일 - 기쁨, 휴식, 연대의 날
- 날 중의 날(Dies Dierum) : 주일 - 시간의 의미를 알려 주는 근원적인 축일
신령성체(神領聖體)73)
- 보나벤투라 블라트만 O.F.M 신부-
신령성체는 성체의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항상 가까이할 수 있는 성체적 생명과 사랑의 저수지이다. 신령성체를 통하여, 우리 영혼의 배우자이신 예수닙과 일치하고자 하는 사랑의 원의가 채워질 수 있다. 신령성체는 우리 영혼과 성체의 예수님 사이의 사랑의 결합이다. 이 결합은 영적인 것이지만,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결합되어 있는 것보다 더 실제적인 결합이다.
신령성체를 한다는 것은 감실 안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심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성사적인 영성체를 원한다는 것을 전제하며 이 성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이 성 알퐁소의 기도문 안에 단순하고도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다.
"나의 예수님, 저는 당신께서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심을 믿습니다. 저는 당신을 모든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제 영혼 안에 모시기를 갈망합니다. 지금 제가 당신을 성사적으로 모실 수가 없으므로, 최소한 제 마음에 영적으로 오시기를 청합니다. (잠시 멈춘 후) 저는 이미 제 마음 안에 계시는 당신을 포옹하며 저의 전부를 당신과 일치하나이다. 절대로, 절대로 제가 당신께로부터 분리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아멘."
신령성체의 특별한 장점은 우리가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백번이라도 할 수 있고, 늦은 밤에도, 사막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고 있지만 주님을 성사적으로 모실 수 없을 때 신령성체를 하는 것이 적당하다. 미사드리는 사제가 성체를 모실 때,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심으로써 사제의 영성체에 참여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참례하는 모든 미사가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에게 예수님께서 환시 중에 신령성체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직접 말씀하여 주셨다. 성녀는 신령성체가 성사적 영성체에 비하여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환시 속에서 주님께서는 두 개의 성작을 들고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금으로 된 성작 안에 나는 너의 성사적 영성체들을 넣는다. 그리고 이 은으로 된 성작 안에는 너의 신령성체를 넣는다. 두 성작들이 다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또 예수님께서는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로 자신의 불타는 사랑을 열절히 향하고 있던 성녀 마가렛 마리아 알라꼭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받으려고 하는 영혼의 갈망이 나에게는 너무나 귀중하기 때문에 나는 영혼이 나를 갈망할 때마다 바삐 그에게로 달려간다."
성인들이 신령성체를 얼마나 중요시했던가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신령성체를 통하여 사랑하는 주님과 일치하려고 했던 그들의 열렬한 원의가 최소한 부분적으로 만족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 안에 머물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라" (요한 15:4)고 하셨다. 신령성체는 비록 성당으로부터 멀리 있을 때에도 우리가 예수님과 결합되어 있게 도와준다. 성인들의 마음을 불태우는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 하느님, 나의 온 영혼이 당신을 애타게 바라나이다. 사슴이 개울물을 원하듯이, 저의 영혼이 하느님을 갈망하나이다" (시편 41:2).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는 사랑에 찬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외쳤다. "오 사랑하는 내 영혼의 배우자여! 저는 당신과 함께 있는 기쁨을 너무나 갈망하기 때문에 만약 제가 죽었다라고 하더라도 영성체로서 당신을 모시기 위하여 다시 소생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십자가의 복녀 아가타도 성체의 예수님과 항상 결합되어 있기를 너무나 갈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해 신부님께서 저에게 신령성체하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상(五傷)의 성녀 마리아 프란체스에게도 집에 갇혀있으면서 특히 성사적인 영성체가 허락되지 않았을 때에 느꼈던 심한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은 역시 신령성체였다. 그럴 때에는 성녀는 자기 집의 테라스에 나가서 성당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성체 성사 안에 계시는 당신을 모시는 이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항상 가장 사랑스러우신 예수님 곁에 계시는 신부님들은 복되신 분들입니다." 오직 신령성체만이 성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낮 동안에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자기가 지도하는 영적인 딸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해주었다. "하루를 지내면서 성사적 영성체를 할 수 없을 때에는, 영혼의 한숨을 쉬면서, 예수님을 부르도록 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는 매번 오셔서 당신의 은총과 사랑으로써 너희의 영혼과 결합하여 주실 것이다. 감실 앞에 신체적으로 갈 수 없을 때에는 너의 영혼으로 날아가도록 하여라. 그리고 거기에서 너희 영혼의 갈망을 쏟아내고 영혼의 애인이신 분을 포옹하여라. 성사적으로 그분을 모실 수 있을 때보다도 더욱 그렇게 하여라."
우리들도 이 훌륭한 선물을 잘 쓰도록 하자. 예를 들어, 우리가 시련을 받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낄 때 신령성체를 통하여 성체의 주님과 결합되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가치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거룩한 습관은 우리의 하루하루를 사랑의 행위와 감정으로 채워줄 것이다.
성 프란시스 드 살레즈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그분의 전 생애가 신령성체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성인은 최소한 매 15분마다 한 번씩 신령성체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역시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하였다. 하느님의 종, 안드레아 벨트라미의 일기를 보면 성체 성사의 예수님을 신령성체로 끊임없이 모시는 생활을 하기로 정하고 실천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디에 있든지 저는 성체 성사의 예수님을 자주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생각을 거룩한 감실에 고정시킵니다. 밤중에 잠이 깰 �에도 그렇게 합니다. 제가 어디에 있든지 그분을 훔숭하며, 성체 안의 예수님을 부르며,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그분께 봉헌합니다. 저는 저의 서재에 성당으로 보내는 전보 송신기를 설치하고, 제 침실에 또 하나, 그리고 수도원 식당에 또 하나를 설치하여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사랑의 메시지를 언제라도 보내드립니다." 이 귀중한 전보들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거룩한 사랑의 메시지들이 보내어졌을까!
밤 중에도
성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흘러넘치는 사랑을 표출하기 위하여 이러한 많은 거룩한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이 사랑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성녀 프란체스 사비에르 카브리니는 외쳤다. "제가 당신을 더 사랑할수록, 저는 당신을 덜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 하면 제가 당신을 더 사랑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 저의 마음을 더 크게 하여 주십시오." 성녀 벨라데따는 동료 수녀에게 한밤중에 깨워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그것은 신령성체를 하고자 함이었다.
몽�리에르의 성 로쉬가 위험한 방랑자로 오해되어 감옥에 갇혀 5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그의 눈은 감방의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간수가 "너는 무엇을 그렇게 바라보느냐?"라고 물었을 때, 성인은 "저는 성당의 종탑을 바라보고 있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종탑이 그에게 성당을 연상시켜주었고, 감실을 연상시켜주었으며, 성체의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연상시켜주었다.
아르스의 거룩한 신부는 본당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당의 종탑을 볼 때 여러분은 이런 말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기 계신다. 그곳에서 사제가 미사를 드리기 �문이다." 복자 루이 과넬라가 기차를 타고 여러 성지들을 순례하고 있었을 때, 동행하는 순례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해주었다. "창 밖으로 성당의 종탑이 보일 때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하십시오."
우리도 성인들로부터 배우자. 성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던 불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어하신다. 우리도 많은 신령성체를 하도록 하자. 특히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에도 그렇게 하자. 그러면, 곧 사랑의 불길이 우리 마음속에서도 타오르게 될 것이다. 뽀르 모리스의 성 레오나르도의 말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여러분이 신령성체를 하루에 여러 번씩 실천한다면, 한 달 안에 여러분의 마음은 완전히 변화되어 있음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신령성체는 미사성제에서 나를 받아들이려는 간절한 소망에서 이루어진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살아 움직이는 소망을 가질 때 이 세례에 큰 은총이 내리는 것처럼, 영성체를 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있을수록 그 영성체에 더 큰 은총이 내린다. 영성체에 대한 뜨거운 열망은 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네 영혼 안에 나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을 보자마자 사랑에 넘쳐 너의 영혼과 일치하고, 너의 영혼에 영성체의 은총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성사적인 영성체와 신령성체의 차이는, 성사적인 영성체가 신령성체보다 효과가 훨씬 크다는데 있다. 그러나 네가 정말로 큰 사랑과 뜨거운 열망으로 신령성체를 한다면, 사랑없이 실제로 영성체를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유익함을 얻게 된다.
신령성체의 헤아릴 수 없이 큰 유익은 하루 동안에도 헤아릴 수 없이 자주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령성체를 할 때마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커지고, 너희의 영혼은 순수해지고, 너희의 삶에 은총이 늘어나고, 영혼의 힘이 고귀해지고, 나쁜 탐욕이 줄어들고, 악과 욕망에 대한 저항력이 늘어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커질 것이다. 이러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효능 때문에 신령성체는 너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쉽고, 큰 가치를 지닌 수단이 된다.
사랑을 많이 받는 영혼이여! 네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거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평일에도 자주 신령성체를 하여라. 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단련을 위해 시간을 정해 두어라. 너의 육신에 영양분을 공급할 때, 신령성체를 함으로써 너의 영혼에도 영양분을 공급하여라.
그리고 정신적으로 미리 나를 받아 모시지 않고 쉬러 가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너희가 이 경고를 존중한다면, 나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너희가 보다 자주, 아니 계속해서 신령성체를 하도록 너희를 재촉해나갈 것이다. 너희의 영혼 안에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이 불타고 있으면, 이 사랑이 모든 영혼에게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러니 신령성체를 할 때 너희 자신들에게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많은 영혼들의 이름을 불러 그들을 위해 지향을 두고 신령성체를 해야 한다. 신령성체를 자주 할수록 나를 크게 기쁘게 하며, 냉담 상태로 나에게 멀어져 있는 많은 영혼들을 위해 나에게 보속하고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너희의 영성체 하나 하나는 이런 보속과 보상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가장 큰 유익함을 얻는 것은 너희 자신들이요, 따라서 나, 곧 너희의 예수는 너희의 영혼을 반기며, 너희의 영혼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신령성체를 수련할 때 꾸준히 마음써야할 것은, 이 신령성체가 미사성제 때 나를 받아 모시고자 하는 열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너희의 소망을 말로써 표현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사랑에 가득차 당신의 이름과 모든 영혼들을 위해 당신을, 오 예수님, 미사성제에서 받아 모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소서 예수님, 우리와 하나가 되소서!' 아니, 너희가 그리움에 가득차 '오, 예수님, 저의 마음에 오소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 나는 마음으로 너희를 껴안아 내 가슴에 끌어안으리라. 너희와 이렇게 사랑의 일치를 이룸으로써 나는 너희의 사랑이 소망하는 것은, 그것이 너희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 아무것도 너희에게 거절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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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면 ‘신령성체의 기도’의 예 참조
신령성체 기도의 예
(1) 신령성체의 기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옵나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시옵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옵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현세에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2) 성 알퐁소 리고리오의 신령성체기도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께서 진실로 여기 성체 안에 계심을 믿나이다.
세상의 모든 것 위에 주님을 사랑하오며,
당신의 성체 영하기를 간절히 구하나이다.
지금 당장 주님 성체를 영할 수 없더라도,
제 영혼 영적으로만이라도 배부르게 하시옵소서.
주님 성체를 모실 때처럼
저를 주님께로 일치시키려 하오니
영원히,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게 하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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