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레지나의 메모

예수님과 자캐오 - 레지나

김레지나 2008. 8. 29. 09:17

루카 19장 <예수님과 자캐오>


성경 한 번도 통독한 적이 없는 내가, 벌써 여러 번 읽은 데레사한테 성경묵상 이야기하면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라고 하나? ㅎㅎㅎ

데레사가 ‘흥, 시시하다.’할지도 모르겠지만 구박받을 각오하고, 수다 좀 떨어볼게. ^^


어제 밤에는 자다가 깨서 오랫동안 잠이 안 와서, 그 덕에 자캐오 이야기를 한 장면 한 장면 묵상해보았어. 아주 신나고 기쁜 거야.

언젠가 내가 이야기 한 적 있지?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만나는 장면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토마스를 만나는 장면이라고.

어제 밤에는 자캐오 이야기에 반했거든. 그래서 세 번째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기로 했어. 

자, 내 맘대로 묵상한 거라서 엉터리일지도 모르겠지만,...들어 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들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겠어?

예리코는 굉장히 잘 사는 동네였다지? 근데, 거기에 자캐오가 있었대.

자캐오는 김양진 선생님 성경공부 시간에 배운 바에 의하면 “우상”에 빠져서 살고 있었던 거지. 우리들도 그렇잖아. 세상 살아가기 위해서 돈, 권력, 명예, 그런 것들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잖아. 자캐오는 남들에게 욕을 얻어 먹거나 말거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애썼던 거야. 영악하게 계산 잘하고 일처리 똑소리 나게 했을 것 같아. 그러니 부자로 살았고 세관장까지 되었겠지.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자캐오는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정말 구세주이신가? 사람들이 기다리던 분이실까? 그렇다면 혹시나 나한테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너무 너무 궁금했던 거야.

근데, 군중들이 둘러싸고 있었던 거지. 군중들 중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추종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야. 예수님의 행동을 책잡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아니면 예수님의 권능을 맛보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그리고 군중들은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거야.

(때로는 신앙인들이 자캐오처럼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로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어. 키가 작거나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 거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방향이 엇나간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비신자들이 참 하느님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방해하기도 하고,,, 정작 하느님의 눈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왕따시키고 있으니까..)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자캐오는 세관장이지만,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죄인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무지 외로웠을 거야. 키도 아주 작았으니 더욱 무시 당했을 거야. 직업, 외모의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을 테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고,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고, 왕따 당해서 너무 외로웠겠지.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데레사! 상상해봐.

아주 작고, 나이를 꽤 많이 먹은 자캐오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 궁금해서,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웃건 말건, 군중을 가로질러서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 거야. 영적인 갈증 때문이지, 세상의 것들로는 자신의 열등감, 소외감을 낫게 할 수 없었던 거야. 열등감 소외감의 크기만큼 영적인 갈증도 컸을 거야. (마찬가지로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을 만나 치유받고 싶어하는 갈망을 갖게 되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부족함, 고통은 은총이라고 할 수 있어.)

키가 아주 작은 자캐오가 힘껏 달려가서 아이처럼 쪼르르 나무 위로 올라간 거야.




“그 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이 자신을 쳐다봐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었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꿈도 못 꾸었겠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거지. 자신은 한참 빗나간 인생을 살고 있고, 같은 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테니,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마주할 자신도 없었지만, 그래도 꼭 한 번은 “지나가시는” 예수님이라도 보고 싶었던 거야.



“예수님께서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는 그냥 지나가는 예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한 번 보려했을 뿐인데,,.. 뜻 밖에도 예수님이 자캐오가 올라가 있는 나무 아래서 딱 멈추신 거야. 그러시더니 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자캐오를 올려다 보시는 게 아니겠어?

사실 당연한 일이지. 하느님은  우리를 다 알고 계시니까. 우리가 부족하고 외롭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록,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지.

자캐오는 깜짝 놀랐을 거야.

데레사! 예수님이 우리 앞에 딱 멈춰 서서 우리를 쳐다보신다고 생각해봐. 아주 사랑어린 눈길로... 태초부터 쭈욱 사랑으로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했음을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리움까지 담은 눈길로 말이야. 

예수님도 자캐오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부터 자캐오를 만나기를 애타게 기다리셨을 거 아니야.

그러니 그리움, 반가움, 기쁨이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셨을 걸.

예수님의 그런 눈길을 마주하는 자캐오의 기분이 어땠겠어?

아마 어릴 적 헤어진 부모를 만난 듯, 애타게 그리워했던 연인을 만난 듯,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기쁘고 행복했을 거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예수님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실까’ 자캐오는 더욱 놀랐겠지.

예수님이 자캐오에게 “얼른” 내려오라 라고 하시지.

예수님은 우리와 친교를 나누시고, 우리 집에 들러 식사를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지. 그것도 “시간 나면 나중에, 준비되면”이 아니라 “얼른”...서둘러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예수님의 눈길만으로 이미 마음이 다 나아버린 자캐오는 감격에 겨워 눈물 콧물 다 흘리지 않았을까? “저를 알고 계셨나요? 제 이름을 알고 계셨나요? 제 외로움을, 제 열등감을, 제 부족함을 알고 계셨나요. 제 영혼 깊숙이 다 알고 계신 분이, 저를 속속들이 다 아시면서도,,,제 이름을 불러주시고, 저한테 말을 걸어주시다니..” 자캐오는 고마워서 어쩔 줄 몰랐을 거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하겠다.”


데레사! 하느님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던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어. 그래서 하느님과 눈도 마주칠 수 있고, 집으로 맞아들여 식사대접도 하고, 담소도 나눌 수 있게 된 거야.

자캐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그렇게 만날 수 있는 거야.

(하느님께서는 어떤 형상으로 만나주실 수도 있고, 감정을 건드리면서 만나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그렇게 만나주시지.. 그 방법이야 유한한 우리 들이 다 알 수는 없겠지. 이것까지는 사실일 테고, 이것부터는 상상에 불과할 거라고 경계지을 수 없는 거야.)

하느님과의 만남은,,어떤 황홀하고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야. (그런 만남을 좇아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야.)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처럼,,그냥 이웃을 만나듯이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는 거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그런 거래. 관상을 통해서든, 성경묵상을 통해서든, 사람들을 통해서든, “하느님의 어느 한 속성이 사무치게 느껴지는 것”이래. ‘사무치게 느끼는 것’은 ‘감정이 움직여지는 것’이지. 그러니까 글이나 말로 설명할 수도 없어.

자캐오처럼, 자캐오가 예수님의 눈길을 마주하는 순간 “하느님의 사랑”이 사무치게 느껴졌을 거야. 아무튼 그래.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걸.

하느님을 “사랑이신 대상”으로 체험하는 것, 느끼는 것이 먼저 있어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 받고, 기쁨과 사랑에 넘치게 되고, 그 기쁨을 이웃과도 나눌 수 있게 되지.

하느님은 그런 분이셔. 구약성경에서처럼 불기둥이나 덤불 뒤에만 계시지 않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신 거야. 만날 수 있고, 집으로 맞아들여 같이 식사를 할 수도 있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내가 네 집에 묵어야겠다. 같이 가자”라고 하시면 어쩌겠어? 아마 나 같으면 춤을 추면서 깡충깡충 뛰면서 앞장섰을 거야.

당신을 만나려고 군중을 앞질러,,열심히 달려가서 체통없이 나무 위로 쪼르르 올라가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자캐오를 하느님께서는 무지 귀엽고 안쓰럽게 여겼을 거야. 어리고 미숙하지만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상상해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예수님은  그냥 “머무르고 싶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자캐오처럼 예수님을 알아보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한테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하느님께서 우리랑 "함께 있어야하겠다."고 말씀하신 거야.

우와~~ 하느님께서 우리랑 “꼭 함께 있어야만” 하신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우리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신다지.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이라고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어. )

하느님께서는 우리랑 꼭 함께 있어야만하셔. 왜냐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걸 거부할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지. )

하느님은 우리랑 ”함께 머무르고“ ”우리모두를 “구원하고 싶어 하시지“ 애타게 원하시지.

예수님이 ”얼른“ 내려와서 ”지금 당장“ 네 집에 가자.” “네 집이 엉망인데도, 나를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더라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지금 당장 너와 함께 하고 싶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자캐오도 참 대단하지. 당장에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잖아. 그것도 아주 기쁘게. 예수님의 눈길 한 방에 뿅~ 간 거지. (하느님과의 만남은 그런 거래. 하늘스런 만남, 그 맛이 어찌나 깊은지, 단 한 번에 엄청난 변화를 하게 하는 거야.). 얼마나 멋진 이야기야.ㅎㅎㅎ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그런 분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 걸 보고 화가 났겠지. 그건 당시로서는 부정타는 일이라고 여겨졌었거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을 에워싸고,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려고 애쓰던 군중들이었다는 말이지. 그 사람들이 정작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고, 예수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반대하고 가로막고 있는 거야. 어쩌면 신앙인들 자신들이 복음전파에 제일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좀 슬퍼지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자캐오는 어찌나 주님의 사랑어린 눈길에 감동받았던지, 주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철썩같이 믿은 거야.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벌떡 일어서서 당당하게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자신이 아무리 부족해도 하느님이 힘 센 분이시라고 해도 두렵지도 않은 거야. 마냥 기쁨에 가득 차 있을 뿐이야.




“보십시오. 주님!”


자캐오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예수님, 저를 좀 보십시오. 제 허전함, 외로움이 다 치유되고 제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송두리째 변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저를 불러주시다니.......당신은 분명 세상이 기다리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자캐오야“라고 이름을 불러주시니, 자캐오는 ”주님“이라고 응답한 거야.

데레사! 가슴 벅차지 않아? 자캐오의 마음을 상상으로 느껴 봐. 기쁘고 뜨겁게 “주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거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누구나 변하지 않을 수 없어.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진 영혼들은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라질 수 밖에 없을 거야.

자캐오는 자신의 영혼이 가득 찬 후에야,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이 보이고, 연민이 느껴진 거야.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의 반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한 거지.

자캐오의 말처럼 다 갚고 나면 재산이 거의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캐오는 평생을 두고 모았던 재산이 다 없어진다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으니, 다 가지고 있는 거야. 이미 천국을 살게 되었으니까. 다 가진 거지.

주님을 체험하면 다 그렇게 변화된대. 우리는 관념적인 주님을 만나면 안돼. 하느님은 관념적인 분이 아니야.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시지.

일상에서 자캐오처럼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하는 거야.

데레사! 우리도 군중을 앞질러 달려가서,, 예수님을 알아보려고 애써보자고. 그럼 예수님이 문득 우리를 쳐다보시는 눈길이 느껴질 거야. 그럼 세상의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어. 고통과 죽음까지도.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 이미 천국을 살 수 있으니...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예수님과의 만남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야. 선후관계가 분명히 있어.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전적으로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이웃과 나눌 줄도 모르는데, 예수님께서 “구원받았다”라고 하시지는 않지. 자캐오처럼 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거야.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캐오처럼 온전히 변화하지 못하고, 그냥 관념적인 하느님을 생각하고, 신앙의 기쁨을 맛보지도 못하고, 세상 것을 여전히 부여잡고 나눌 줄도 모른다면, 구원을 받은 게 아니야.

자캐오처럼 변화해야 구원이 내리는 거야. 그래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는 거야.

자캐오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겠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노래불렀을 것 같아.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데레사! 히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세상에 오셨대.

얼마나 기쁜 소식이니? 가슴 설레는 말씀이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도 새롭게 와 닿더라구.

어쩌면 성경 전체의 이야기,, 정신적, 육체적 병자들을 치유시키시고,, 그들을 한없는 애정으로 "찾으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캐오 만나는 장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잃어버린 이들"은 매 순간의 우리들이야.

구원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고 하던데...

무한하시고 절대적인 하느님 앞에서 부족한 우리들은 전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완전히 하느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혀 지낼 수는 없겠지.

그러니 많게 혹은 적게 우리들 영혼의 일정부분은 늘 하느님을 떠나 길 잃고 헤매는 거지.

그런 우리를 하느님께서 “찾아” 오셨고, 사랑으로 “쳐다 봐” 주시고,, “데레사야. 레지나야." 이름 불러 주시고, "얼른 내려와라"하고 재촉하시고, "네 집에 가서 같이 밥 먹자” 그러시는 거야.

이 세상에서 내 삶에서, 사소한 일상에서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그게 구원이지.

자캐오 이야기가 그렇게 신나는 이야기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니까..




내가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어도, 어떤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도. 소외감을 느끼고 있어도, 매 순간 하느님은 우리를 쳐다보시는 거야. 데레사, 상상해 봐. 예수님이 “데레사야! 너랑 같이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떤 기분이 될지,, 산같이 든든한 하느님의 아들이, 구원자 예수님이..


데레사,, 자캐오 이야기를 묵상하고 나니 성가가 흥얼거려지네...


“주님과 나는 함께 걸어가며 지나간 일을 속삭입니다.

손에 손잡고 산과 들을 지나 친구가 되어 걸어갑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걸어 갈 때 천국의 일을 말해줍니다.

이 세상 꿈이 모두 사라질 때 천국의 영광 보게 되리라.


험하고 먼 길 주님 함께 가며 생명의 친구 되었습니다.

잠시의 세상 충실하게 살아 영원한 세상 얻으렵니다.“

                         ( 가톨릭 성가 400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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