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레지나의 메모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서 미치게 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김레지나 2008. 8. 28. 22:17

사순특강을 듣고,, 

김레지나   2007-03-09 15:38:06, 조회 : 50, 추천 : 4


사순특강(교구의 발자취와 역사적 전망)


3월 8일, 빛고을 주보에 ‘재미있는 교구사’를 연재하셨던 옥현진 신부님으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간략한 교구역사를 배웠습니다. 간단히 소개합니다.


올해가 광주대교구 설정 70돌이 됩니다.

광주교구는 1937년 4월 13일에 전주교구와 함께 교구로 등록되었습니다.

신앙의 역사는 1937년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광주, 전남 지역의 신앙역사는 약 110년 정도입니다.

1934년에 동산동 성당에 이민구 신부님이 초대본당신부님으로 부임받으셨으니 여수지역 첫 본당과 광주대교구가 시작된 시기가 거의 같습니다.

광주교구에서의 첫 본당은 1897년에 세워진 목포 산정동 성당입니다. 당시에는 목포가 광주보다 발전되어 있었습니다.


180년 전 정해년에 곡성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당시에 있었던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많은 신자들이 전국의 교우촌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산간에서 옹기를 구워 팔거나, 산에서 나는 소출로 근근이 생활하였습니다.

묵주나 성물 등은 돌담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숨겨놓기도 했습니다.

박해가 심한 때여서 기도를 하고 싶을 때 기도문도 맘대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기도문을 기록해두지 않고 몽땅 다 외워야했고, 자녀들에게도 외우게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신앙생활을 했지만 교우들은 기쁘게 살았습니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사랑하면서, 일치된 생활을 하면 틀림없이 구원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먹을 것이나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 모든 것을 나누면서 살았습니다. 언제 잡혀가서 순교를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우촌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훌륭한 영성 덕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인들을 잡아갈 포졸은 없습니다. 하지만 ‘생과 사’의 문제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우리들을 하느님께서 ((포졸처럼)) 하늘로 데려가실지 모릅니다. 우리 신자들도 교우촌 신자들의 영성을 배워야합니다.


광주대교구에 순교지가 없지만 순교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안 등지에서 순교하신 분들의 기록이 있지만 그 당시 감영이 전주에 있었기 때문에 전주감영으로 끌려가 박해를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무안몽탄에 우리 교구의 첫 한국인 사제로 이내수 신부님이 부임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식복사도 없었고, 재정도 열악하여 1900년 12월 20일에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폐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당시에 무안 지역의 예비자 4명을 입교시켰고, 그 4명이 이내수 신부님께서 유일한 신자?? 였다고 합니다.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 신부님께서 얼마나 큰 고생을 하셨을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지요.) 이내수 신부님의 유언은 ‘나의 믿음을 기억해 달라’ 였습니다. ㅠㅠ


70년 전에 본당이 7개 있었는데 현재는 110개 본당이 있고

           공소가 37개 있었는데 현재는 78개 있고,

           신자는 3000명이었는데 현재는 30만명입니다.


그 외에도 주교님들이 애쓰신 이야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자료들, 등등의 교구의 역사를 많이 배웠습니다만 아주 조금만 소개했습니다. ^^* (힘들어서 메모하다가 말았습니다. 죄송....... ㅎㅎㅎ)


옥현진 신부님께서 옛날 사제들과 신자들이 고생 고생했던 일화들을 소개하실 때는 울컥 눈물이 솟기도 했습니다.

골롬방 수도회 수도자님들이 먼 이국땅인 우리 나라 전라도까지 오셔서 선교하시다가 순교하신 이야기, 죽기까지 신앙을 증거하셨던 선조들의 이야기, 6.25 중에 북한에 끌려가다가 총살 당하신 신부님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자들 모두 가슴이 뭉클하셨을 겁니다.


박해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세속적인 많은 일들을 우선시하고, 이런 저런 핑계로 기도와 봉사의 기회를 미루기만 했던 저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때부터 신앙을 이끌어주셨던 신부님들, 또 지금 우리의 신앙을 지도해주시는 신부님들, 본당 신부님, 보좌 신부님, 두 분 수녀님들께도 새삼 감사의 마음을 다졌습니다.


강의해주셨던 옥현진 신부님과 김계옥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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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죽음을 요구하는 박해의 시절이라면, 과연 우리모두는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아무래도 저는 숨어지내거나 배교??? 에고,,자신없습니다.)

훌륭한 순교성인들과 선배신자들은 하느님께 미치지 않고서는 목숨을 건 신앙생활을 하실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옥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문득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옮겨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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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솟구치는 기쁨을 지니면서 침묵하기란 무척 힘드는 일이요, 아닌 척 꾸미기도 적지 아니 어려운 노릇입니다. 그래서 정녕 성프란치스코는 소리를 지르면서 들판을 두루 다니셨고, 강도를 만났을 때 스스로를 위대하신 임금님의 벽제 소리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다른 성인들이 광야를 찾아드신 것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하느님의 찬미를 소리 높이 부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성인 한 분, 알칸다라의 베드로라는 수사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생활로 보아서 나는 그 분을 성인이라 믿는데, 그 분이 이런 짓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고함소리를 들을 때마다 미치광이로 간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치광이... 그렇게 미칠 수 있다면야 작히나 좋겠습니까? 자매들이여, 제발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서 미치게 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제발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서 미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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