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요한복음 20장 - 차동엽신부님

김레지나 2008. 8. 28. 21:09

(까붕이님이 안식일 다음날 쉬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하셨지요.(아래 144번 글에서)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암튼,, 그 이유 중의 하나를 복음묵상 테이프 듣다가 알게 되었거든요. (언젠가 좀 다른 말로 차신부님께서 안식일에 대해 뭐라 하셨는데,, 기억이 안나요.)

옮기다 보니 다른 내용들까지 옮기게 되었네요.

까붕이님에게 부활절 선물로 드리려고,, 꽤 오래 컴 앞에서 낑낑댔어요.

까붕이님. 워때유? 저한테 고맙지요? 그럼 오뎅 사주세요. 바람의 향기님 가게 국물 맛이 좋은데....붕어빵도 있고... ^^)


차동엽 신부님의 주일복음 묵상 테이프 중에서...일부분 옮깁니다.



요한복음 20장



*** 눈으로 읽기.


- 말씀의 숲.

  

(생략)

.....................................~~~~~김후란 <우리도 다시 살게..>~~~~~~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전해줍니다. 그리고 사실상 요한 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물론 21장이 더 있지만, 이는 문학적 형태로 볼 때 하나의 후기 내지는 편지의 추신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무리이며, 따라서 요한복음의 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열쇠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므로 각별한 주의를 요구하며, 또한 앞선 요한복음의 모든 내용을 염두에 두며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심(요한 20,19-23)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둘째, 토마스의 고집(요한 20,24-25)

예수님께서 발현하실 때 자리에 없던 토마스에게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손으로 그분을 만지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셋째, 예수님의 두 번째 발현(요한 20,26-29)

토마스도 함께 한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가 원하던 대로 당신을 만지도록 허락하십니다. 토마스는 여기서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넷째, 요한복음서의 기술 목적(요한 20,30-31)

우선 사도요한은 저술의 한계성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술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말씀의 나무들"


(테이프 내용을 대충 받아적었습니다.)


“그날, 주간 첫날“ 이라면, 사랑하는 제자와 베드로가 빈 무덤 확인하고 돌아온 바로 그 날 저녁입니다. 그날 저녁에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누가 올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만큼 두려워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바로 이러한 철통같이 닫혀져 있는 공간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우리는 흔히 평화가 오려면 스트레스 주는 사람이 없어져야 하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평화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상황에서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곧 유다인들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박해 한 가운데서,,, 풍랑 한 가운데서...“나와 함께 있으면 평화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평화를 체험하고 기쁘게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

“보여주셨다”는 말은 “증명해주셨다.”와 같은 말입니다. .... 요한복음이 쓰여질 때에는 영지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영적인 존재로만 생각해서, 부활하신 예수님도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 만졌다는 것은 영적으로 본 것과는 다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만져봤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보내는 것은 증인이 되어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 것은 가서 이야기해야합니다. .......좋으면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나발을 불어야합니다. ...........여러분이 가서 아무리 위로해도 예수님 말씀이 직접 상대하는 것과 는 다릅니다. ..................

부활절을 기념해서 한 명씩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을 갖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엠피 싸오?(맞는지 몰겄네요..) 라는 동사는 창세기와 예언서에 나옵니다. 창세기에 “코에다 숨을 불어놓으셨다.” 에제키엘 예언서에, “뼈들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숨을 불어넣는 것은 생명의 재창조입니다.... 해마다 나에게 오셔서 나의 영을 새롭게 창조해주시는 성령을 다시 만납니다. ....절망하거나 고정관념을 갖거나,...... 주저앉아 있지 마시고,,,  희망을 붙들고 가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사도 2,17)


“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땅에서 용서를 하면 그 용서는 확정적입니다... 이 용서는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이것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사도들입니다. 고해성사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


“토마스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토마스는 쌍둥이라는 아람어입니다. 토마스의 성품은 적극적입니다. ............. 열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았다. ......... 자기 의사를  표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중략)  물론 토마스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왜 나 있을 때 나타나시지. 나 있을 때도 나타나실 수도 있으시면서,,’ 하고 속상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토마스가 그런 성향이기 때문에, 인류 대표로서 토마스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처음에 토마스에게는 안 타나나신 것입니다. ...배려하신 것이지요. 토마스가 못 믿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은 “부활하셨다는 예수님, 나 좀 만납시다.”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되다.하셨습니다. 물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됩니다. 하지만 누구나 예수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토마스가 표현한 것입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집에 모여 있었는데...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셨습니다.

재밌는 것은 예수님이 큰 일을 하는 요일이 계속 안식일 다음날, 주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이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피하시고 주일날만 계속 일을 하십니다. 유다교와의 차별성을 두시려는 암시입니다. 유다교의 안식일 정신을 계승하기는 하되,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차별이 되라고,,, .............

두 번째 나타나신 날도 주일이고, 성령강림일도 안식을 다음 날, 주일날입니다. 큰 사건들이 주일날 일어났기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일요일을 주일로 삼습니다. 일요일이 안식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 된 것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의심을 버리고 믿는 것은 사건에 따라 다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는 말이라기보다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믿는 자가 되라는 의미 이것이 영성입니다. 심오한 말입니다. 믿음은 그 사람의 인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토마스가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는 가장 위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만 여겼지, 하느님, 주님이라고 고백한 적이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고 믿는 사람은 육안으로 믿는 거고,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영안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지만, 만나고 싶은 마음만은 간절한 게 사실입니다.)




* ***마음으로 읽기

  

- 인물공감 - 토마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 못한 제자로 정평이 났습니다. 하지만 토마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억울한 누명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처음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을 때 다른 제자들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토마스에 대한 기록이 다른 복음서보다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열 두 사도의 명단을 나열할 때 한 번씩만 등장하지만, 요한 복음서에는 3번 그의 언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이름은 예수님께서 친구 라자로가 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유다지방으로 올라가고자 하셨을 때 처음 등장합니다. 그 때 제자들은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예수님의 유다행을 만류했습니다.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고 가시렵니까?”(요한 11,8)

그때 토마스 사도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며 다른 동료 제자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셨고, 또한 의리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생각한 바를 그대로 행동하는 ‘행동파’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두 번째로 등장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작별의 말씀을 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1-4)

 필경 당시 분위기는 무척 무겁고 우울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감히 그 뜻을 여쭙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나섭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토마스는 어렴풋한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꼭 따지고 넘어가는 성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세 번째로 등장합니다. 토마스의 성격이 저러하기에, 자신이 자리에 없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말을 다른 제자들로부터 들었지만 그는 그것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과 손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자신의 손으로 만져봐야 믿을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감동적인 것은 예수님의 배려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토마스의 확인 욕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셨고, 그를 더 높은 믿음의 차원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의 고백은 단순히 교리 차원을 뛰어넘어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온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내어 맡길 수 있는 주님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인류의 대표입니다. 토마스의 회의(會意)에는 우리들의 회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처럼 우리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고는 쉽게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 때는 확증을 구하는 것도 정당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토마스를 탓하지 않고 그의 원(願)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토마스를 통해서 우리도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음의 놀라운 평화를 체험했습니다.

 토마스의 의심이 바로 우리의 의심이듯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토마스의 고백은 곧 우리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토마스의 증언이 우리에게 간접 체험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주인공’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경험인 양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의 이야기를 읽을 때도 그의 체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의 고백 속에 우리의 신앙 고백이 함께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말씀공감 - 주님의 처방, 주님의 식단, (생략)

             Jesus is alive. (생략)


***** 영으로 읽기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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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붕이님이 올리셨던 글..ㅎㅎ


일,월,화,수,목,금,토........

첫 번째날,  두 번째날, ............. 마지막 일곱번째날.

일곱번째날이......     토요일이잖아.

안식일이 토요일인가?.....

아니지, 다람쥐가 체 바퀴 돌리듯, 요일을 윤회해 볼까?.....

월요일을 첫 번째로 두고......

어디, 세어보자!  월화수목금토일.... 이제 안식일이  일요일이 맞아지네!


그런데, 뭐야!

달력에 왜?....  

일요일이 첫 요일로 등장 하는거야~

이 달력이 잘못 된건가?....

아니,  저 달력도 마찬가지인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런 논리인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문득 의문이 들어 성경의  여러 말씀과 알고 있던 여러 기억을 더듬더듬 끄집어 내어 본다.

언젠가 보았던 기록의 문서들 중, 예수그리스도께서 금요일 정오에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하시고  사흗날 즉 일요일에 부활하셨다는 구절을 살펴 본적이 있었지....

성경속의 사도들의 기록에서도 안식일 다음날 부활 하셨다는 기록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런 기록만 보아도 안식일이 토요일이 되는데...

유다지방 시진으로 계산해 보면 금요일 저녁에서 다음날 토요일 저녁 전까지가 안식일이 된다는 결론인데?....

뭐가, 잘못 된 거지?...

아무리 성경을 들쳐 보아도 안식일이 명시된 요일은 깊이깊이 숨어들어 찾아 볼 수가 없구나!....   신약에 나오시는 예수님은 안식일만 되면 사도들과 함께 회당을 찾고 안식일을 자주 거론 하신 걸로 보아 그 의미는 계명 그대로인데, 그 안식일이 일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안개 속에서 비추어 주는 희미한 불빛과 같구나!


창세기전에서 우리 주 하느님은 엿새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이렛날은 쉬셨다고 기록하여 전하는데, 지금으로부터 3300년전 모세는 주간절을 7일로 선포하고 안식일의 계명을 마지막 일곱째날로 준수 하였는데, 성경에서 요일의 기준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구나!


주,하느님. 저 좀 도와 주세요..... 해답 좀 알려 주시지 않으실래요...?  커닝할 기회라도 허락해 주소서. 오, 우리 주 하느님!

..................................................

...................................................


참으로 요상하다, 요상해!

돋보기....

눈이 침침해.....

나이가 들었어....

돋보기로 살펴보자....

오행설, 점성술의 측면, 천동설, 콘스탄티누스 법령.....

역시, 나이가 들면 돋보기만한 우군이 없는 법이지~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로마는 주로 태양신을 믿는 제국이었는데 4세기경에 예수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면서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각종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불변의 천동설에 의거, 목성의날, 화성의날, 해의날등 일곱의 별들을 등장 시켰다고 하는데, 그중 로마에서 주로 믿는 태양을 첫째날로 채택, 선데이라고 명명한 것이 그 기원이란다.


왜, 그렇게 했어야 하는지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 많은 사도들과 신도들이 엄청난 고통과 핍박을 당하였기에 사실,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두려움이 잠재하고 있었는지라, 종교적 유화 정책으로서 로마인들에게 첫날을 배려해 주었고, 곧 이어서 서기32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날을 휴업하게 함으로써 안식일로 삼으면서 종교적 마찰로 인한 살상을 피하기 위해서란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서 왜, 이리 당혹스러워 지는지....

세상에 이럴 수가?....

오, 주여! 어찌해야 하오리까?..... 정녕 주님의 날이 굴절 되어 전해 온 것이오리까?.....

......................

....................


까붕아!

너희는 걱정도 팔자구나~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듣고, 믿음이 있으면 확신은 영원하다!

게파와 바오로 그리고 여러 사도와 신도들이 너희가 말하는 그 일요일 첫 번째날 어떻게 하였느냐?.... 주님의 부활을 기리며 희망을 맛보며 주님의 몸인 성체를 즐기지들 않았느냐?...

그날이 언제더냐?... 바로, 너희가 말하는 일요일 첫 번째날이 아니더냐?...

그날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날, 희망의 날, 기쁨의 날, 부활의 날, 바로, 거룩하신 주님의 날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그리스도는 너희의 구원자이시다... 믿어라, 그리고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모실지어다. 그러하면,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새로운 계명 완전한 사랑이 보이리라.


그렇다.

주님의 날이 부활의 날인데....

참, 걱정도 팔자구나!

주님의 부활을 기리며 즐거이 성체를 나누며, 온 몸을 통하여 선하디 선한 마음으로 찬미를 드리고 무한한 기쁨을 나누리라... 그리고 주님과 제자들이 지키신 토요일의 안식일도 기억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