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6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2001년 3월에 직장에 복직하였습니다. 몸이 많이 약해서, 아이들 키우면서 직장 다니는 일을 병행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최대한으로 휴직했던 겁니다.
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복직발령을 받으니, 막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다행히 통장님의 소개로 아이들을 돌봐주시고 살림을 맡아 해주실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제가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밭에서 키운 무공해 채소를 뜯어다 주시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시고, 아이들을 잘 돌봐주셨습니다.
제 가족에게는 은인이신 그 분은 이번 부활절에 ‘루치아’라는 세례명으로 하느님의 딸이 되셨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대모를 서느라고 루치아 어머님의 뒷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세례 받으시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첫 영성체 후에 눈감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찡하게 기뻤습니다. “그 때 무슨 기도를 하셨어요?” 하고 여쭤보니 “하느님, 다음에 제 남편이랑 꼭 같이 성당 나올께요.”라고 기도하셨답니다. 루치아 어머님은 친구분들에게도 성당에서 교리 받아보도록 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루치아 어머님은 평생을 독실한 불교신자로 사셨습니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개신교 신자여서 교회에 나오라는 권유와 기도를 많이 받으셨지만 선뜻 개종할 마음이 들지 않으셨답니다. 그분이 불교신자이심을 알고 있었던 터라, 그분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도 없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천주교 소개하는 모임에 가보실 의향이 있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가톨릭 신앙을 갖도록 설득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승낙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루치아 어머님은 교리만이라도 받아보시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루치아 어머님은 첫 교리를 받고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엄마, 교리 선생님이 어떻게 해서 성당에 나오게 되었느냐고 물어봐서 루카 엄마 아프다는 이야기 했는데 괜찮지?”
대부분의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감추고 싶어 하기에 제 이야기를 했던 것이 걱정되셨나 봅니다.
“그럼요. 말씀하셔도 돼요. 저 아픈 줄 시내 사람들이 다 알걸요.”
“다행이네. 루카 엄마가 항암치료를 오래 받았는데 퇴원해서 집에 돌아오면 분명히 많이 힘들고 아플 텐데도 표정이 너무 밝아서 놀라웠다고 이야기했어. 마음도 아프고 걱정되어서, 일하다가도 뭐하나 쳐다보면 루카 엄마가 혼자서 자주 웃더라고. 밥 먹다가도 웃고, 운동하다가도 웃고, 그래서 내가 '그것 참 이상하다. 어쩌면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성당 나가면 다 저렇게 지낼 수 있을까' 궁금해진 거여. 루카 엄마 표정 보고 교리 받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교리 선생님이 '그 자매님은 은총 받아서 그렇다'고 대답하시대. 그런거여?”
“하하하. 그래서 교리 받으실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럼요. 제가 은총 받은 거지요. 제가 아무리 도를 닦고 자기암시를 한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기쁘게 지낼 수 있겠어요? 분명히 제 내부의 힘은 아니예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이지요. 저를 아는 사람들이 지금 제가 누리는 기쁨과 평화를 기억하고, 언젠가 고통이 닥칠 때 하느님을 찾을 생각을 하기 바라요. 그래서 열심히 글을 쓰는 거예요. 지금 그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느님께 관심을 갖게 되겠지요. 제가 맨날 웃고 지내는 것이 기적 같지요?”
“그래, 정말. 너무 신기해. 하느님이 있긴 있나봐.”
“그럼요. 하느님은 지금 우리들 이야기도 다 듣고 재미있어 하실 걸요.”
저는 루치아 어머님의 말씀에 너무 기뻤습니다. 제가 고통 중에 누리는 평화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니, 제 평화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되고, 제 평화가 복음의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받은 다른 영적인 체험의 은총들보다도 제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야말로 이웃에게 알리고 싶은 기적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기쁨과 평화 외에 어떤 표징이 그만한 가치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를 체험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세상에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작년 1월에 수술을 앞두고 영영 못 돌봐줄지도 모를 어린 아들들 생각에 너무나 괴로워서 기도했습니다. 제 평생에 그 날 기도하기 전만큼 괴로운 적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기도가 끝나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기뻐졌습니다. 살면서 그때처럼 기쁜 적도 없었을 겁니다. 수술받기 전날까지 몇 주 동안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종일 싱글벙글 웃고 다녔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만나보기 전에는 제 명랑함이 밝게 이겨내 보려는 자조적인 노력쯤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더 마음 아파했습니다. 루치아 어머님처럼 저를 자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 기쁨과 평화를 믿을 수 없었던 겁니다. 친구들은 저를 만나본 후에도 제가 누리는 기쁨과 평화가 일시적인 것이거나 타고난 밝은 성격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은총을 정말로 받았다면 제 병이 기적적으로 나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상했던 병기보다 결과는 더 나빴습니다. 친구들은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다른 환자들보다 건강한 편이 못됩니다. 타고난 병약함과 항암제 부작용으로 다른 환우들보다 건강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제게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이기고도 남을 만큼의 평화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병의 치유가 기적이 아니라 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 기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를 만날 때마다 이제는 병이 다 나았느냐고만 물어봅니다. 제 병이 나아야만 하느님의 은총을 이해하겠다고 말합니다. 저는 해 줄 말이 없습니다. 내일 일은 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아팠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다만, 제 병으로 인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어서 날마다 그 은총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최근에 저처럼 성령께로부터 특별한 위로와 평화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 반갑고 기뻤습니다.
P 자매님은 딸이 한쪽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는데도, 감사의 기도가 나오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더랍니다. 병원에 가는 차 안에서 앞에서 이끌어주시는 성모님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자매님 내외는 그 때 성모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로 인해, 지금까지도 날마다 이웃과 다른 영혼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있습니다.
D 자매님은 수 년 전에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아들이 사고로 죽었답니다. 아들이 죽은 지 며칠 후에 레지오 단원들이 기도하러 와서 묵주를 손에 쥐어주고 갔답니다. 평소에는 기도를 잘 하지 않던 D 자매님은 방에 들어가셔서 묵주기도를 하는 동안 온 몸이 떨리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밀려왔답니다. 죽은 아들에 대한 아픔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대한 감사만 나오더랍니다. 아들을 졸지에 잃은 엄마의 아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나 있겠습니까?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D자매님이 누리는 평화를 보고 가족들의 신앙이 더욱 깊어졌고, 많은 친척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답니다. D 자매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큰 기쁨에 차서 신앙생활을 하고, 선교를 아주 열심히 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인간으로서는 꿈꿀 수 없을 만큼 강렬해서 단 한 번이라 할지라도 모든 고통을 다 보상받았다고 생각될 만큼 강한 힘을 갖습니다. 또, 앞으로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 어떤 일이든지 하느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들게합니다. 그렇게 한 번 마음 한 가운데 굳게 자리 잡은 기쁨과 평화는 어떤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살면서 가끔은 자잘한 일로도 짜증을 내고, 불평도 하게 되겠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에는 늘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런 식의 평화와 위로를 구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원치 않는 고통이 닥치면 불평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고통을 이겨낼 강한 위로를 청하기보다 고통을 벗어나게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병에 걸리면 병이 낫게 해주라고만 떼를 쓰기도 하고, 가족이 죽으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하느님께 따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은 불행이라도 닥치게 되면 그 불행을 없애주는 표징을 보여주시라고 하느님께 청하고 기도원 같은 곳으로 기적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고통이 없는 영혼들만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맛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고통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과 깊이 결합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정한 표징은 우리가 겪는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그러니, 기쁨과 평화 외에 다른 표징만을 얻으러 여기저기 쫓아다닐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려면 지금 이대로의 우리들 생활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합니다. 그래야 불의와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누리는 기쁨과 평화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강력한 표징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신비한 영적체험이나, 기적적인 육체적 치유만을 찾아다니는 한, 하느님과의 일치감에서 나오는 기쁨과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고통 중에도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화 말고 다른 어떤 표징을 찾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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