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나의 신부로 맞으리라.”
2월 26일 일요일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중에 갑자기 영화의 한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시절 읽었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라는 책의 한 부분이었다. 주인공인 어릿광대는 ‘마리’라는 여인과 서로 사랑하여 같이 살았다. 그런데 마리는 가난한 어릿광대를 떠나서 안정된 직업을 가진 공무원과 결혼해 버렸다. 영화처럼 선명하게 떠오른 부분은 어릿광대가 떠나간 마리를 그리워하는 장면이었다. 어릿광대는 마리가 젖은 머리칼로 화장대 앞에 앉아서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녹이는 모습, 치약 튜브를 짜는 모습 등의 동작을 하나하나 기억한 후 이렇게 말한다. “그 모습들까지 다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세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어릿광대의 처지에 당신 자신을 빗대어 마음을 털어놓으신 것이다. “네 사소한 모습들까지 낱낱이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 어느 누구도 나만큼 너를 사랑해줄 수는 없다.”라고. 나는 안정된 직업을 가진 공무원과 결혼해버린 마리처럼 세상 것들을 좇아 하느님을 떠나있었던 것이다.
고마움과 사랑으로 벅차서 눈물이 났다. 곧이어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를 나의 신부로 맞으리라.”
‘신부라니, 나같은 엉터리가 감히 하느님의 신부라니,’ 나는 펑펑 울면서 ‘내가 미쳤나보다’ 싶어서 내 뺨을 때려보았다. 겨우 진정을 하고 성체를 모시러 가는데, 성체성가로는 들은 적이 없는 곡이 들렸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일러주시는 하느님께 고마워서 미사 끝날 때까지 죽죽 울었다.
오후 내내 친구들에게 보낼 시를 썼다. 천상병님처럼 쉬운 단어로 편하게 이야기하면 다 시가 되는 줄로만 알고 엉터리 시를 열 편이나 써서 보냈다. 팔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자판도 제대로 치지 못했지만, 하느님 사랑을 전한답시고 낑낑댔다. 엄마가 운동도 안 하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고 계속 나무라셨다.
(일기 내용과 겹치지 않은 졸시 하나만 소개한다.)
눈썹문신
온 몸에 돌이 생기는 이상한 병을 앓아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
시를 쓴다는 남자를 다큐에서 만났다.
그가 오직 의지하는 엄마의
환한 미소가 놀라웠다.
미소보다 놀라운 건 엄마의
눈썹문신이었다.
저 힘겨운 마음에 눈썹문신 할 여유가 있었을까?
오늘에야 조금 알 것 같다.
병원 지하에서 엄마가 사준
병아리 아플리케가 예쁜 꽃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거울 속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수술 부위 철침도 빼지 않은
암환자처럼 보이지도 않고
호호 참 좋다.
이런 여유가 기적이다.
나보다 더 아픈 그 시인에게도
고통을 함께 안은 그 엄마에게도
눈썹문신이 기적이다.
예쁜 티셔츠가 기적이다.
유행가 가사만도 못한 글이라서 부끄러웠지만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적어내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또 하느님 얘기를 살짝이나마 해주어서 잘한 일이다 싶었다. 나중에 친구들이 물어보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 때 그 메일 있잖냐? 내가 나중에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구. 하루 동안에 써낸 거야. 내 말 믿지? 정말로 딱 그날 하느님이 그러셨다고.”라고.
일요일인데도 학교에 나갔던 율리아가 저녁 늦게 돌아왔다. 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반기니까 한마디 했다.
“오늘 또 하느님하고 뭔가 주고받은 거여? 감정이 극과 극을 달리네. 어제는 푹 가라앉아서 울고 난리더만, 갑자기 뭐가 좋아서 그리 웃어?”
“아니, 오늘은 하느님하고 아무런 작당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내 의지로 엄청 바빴어. 히히히. 니한테도 메일 보냈는데 읽어봐라잉.”
어제까지의 힘든 마음은 온 데 간 데 없고 신나고 행복한 마음뿐이었다. 하느님께서 내 의지로 이겨내라고 하셔서 아주 오랫동안 힘들어서 쩔쩔매게 될 줄 알고 무서웠는데, 빨리 마음의 평화가 찾아 온 것이 놀랍고 감사했다. 쓰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바빠졌다. 아픈 채로 시간이 천천히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남편이 투덜댔다.
“사흘 동안 웃지도 않고 옆 사람 힘들게 하더니만 갑자기 마음이 풀렸나 보네. 자네 그럴 수가 있는가?”
“히히, 그러게 말이야. 겨우 사흘 갖고 뭘 그래? 나만큼 잘 버티는 암환자 있어? 불행 중 다행인 줄 알라고. 앙?”
(1년 반쯤 지나서 “나는 너를 나의 신부로 맞으리라.”라는 말씀이 호세아서 2장의 말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 수사님에게 예언안수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내게 “호세아서 2장 끝부분을 읽어보세요.”라고 하셨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기대에 차서 성경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이날 미사 때 주님께서 내게 해주신 말씀이었다. 그 말씀이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는 것도 몰랐었다. 그후 다른 방법으로 같은 말씀을 한 번 더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해주신 것같다.
공동번역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호세아 2,21-22, 공동번역)”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티끌만도 못한 내게 당신의 사랑을 알아달라고 애원을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부질없는 것들을 좇아 하느님을 떠나 있었던 한심한 나를 그렇게 다시 불러주셨다. 바알신과 바람나서 하느님을 떠나있었던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처럼 다정하게.
나는 한동안 이 체험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2011년 1월에 송봉모 신부님의 책을 읽고 나서 용기가 생겼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특별히 당신의 신부로 부르신 게 아니라,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신부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랑으로, 한 번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부르고 계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매우 간단하고 분명하다.
주님은 우리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와 ‘인격적인 친교’를 맺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고 하셨다.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당신의 동반자를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라 동반자다.
여기서 동반자는 구체적으로 신부(新婦)를 가리킨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창조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신부인 우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송봉모 신부님의 책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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