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생활성서] 의수 화가 석창우
[생활성서 2017년 11월] 만나고 싶었습니다
붓 짓 날갯짓
의수 화가 석창우
9월 한 달 동안 신촌의 한 소극장(얘기아트시어터)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몸짓, 몸짓 그리고 붓 짓’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퍼포먼스 전시회’다.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는 기존 전시의 틀을 깨고 그림 한 점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공연과 결합된 전시회다. 이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의 주인공은 의수 화가 석창우(베드로·63) 화백이다.
팔 없는 화가로 살아온 33년이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을 석 화백은 새로운 도전 앞에 설레는 아이 같았다. “이 전시회 아이디어는 우리 사모님이 냈어요.” 석 화백은 늘 그의 팔이 되어주는 아내 곽혜숙(베로니카·57) 씨를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사모님’이란 말 속엔 아내를 향한 사랑과 존경은 물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이 녹아 있으리라.
1984년 10월, 전기 기술자였던 남편이 2만 2900볼트 고압선에 감전되었고 한 달여의 사투 끝에 눈을 떴다. 두 팔과 두 발가락을 잃은 남편에게 아내가 건넨 첫마디는 ‘식구들 생계는 내가 맡을 테니 이제부터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였다. 그때 그녀는 한 달 보름 전 둘째아이를 출산한 스물다섯 젊디젊은 엄마였다.
자신은 할 얘기가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곽 씨는 남편의 은근한 강요에 못 이겨 속내를 보여준다. “소치 장애인 올림픽 폐막식에서 남편의 모습을 보며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라왔어요.” 경기장 한가운데서 굵은 붓을 의수에 걸고 대형 화선지에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려내는 석창우 화백의 퍼포먼스가 끝나자 5만 관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때 곽 씨는 ‘남편의 그림 작업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데, 이 감동을 더 잘 나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단다. 이 퍼포먼스 전시회는 그 바람을 현실로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하느님은 나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시더니 끝내 낭떠러지에서 밀어내셨다. 그런데 낭떠러지에 떨어진 후에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석창우 화백은 두 팔을 잃었지만 날개를 발견했다. 이 날개의 비밀은 네 살배기 아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내민 종이 한 장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늘 미안하던 아빠는 의수에 연필을 꽂고 처음으로 그림이란 걸 그려보았다. 아내는 남편의 그림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감지했다. 물론 무수한 거절과 편견의 벽에 부딪혀야 했다. 하지만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렵게 서예를 배웠고 누드크로키를 만나 몸짓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6년을 크로키에 매달려 동양의 묵과 서양의 크로키를 하나로 빚은 수묵크로키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림이라는 새로운 날개를 펴기까지, 마침내 날아오르기까지 얼마만큼의 땀과 눈물을 쏟아야 했을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는 석 화백. “먹도 아내와 아들이 갈아주다가 제가 발로 갈았어요.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났지만 계속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손으로 가는 것처럼 되었어요.” 처음 시작과 그 과정은 힘들지만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쉬워진다는 걸 수없이 체험했단다. “성경에도 하느님은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주지 않으신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딱 맞더라구요.”
경륜, 축구 등 스포츠의 역동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그려온 석 화백은 김연아 선수에게서 자신과 닮은 여정을 읽어냈다. 기자도 그가 그린 ‘김연아의 트리플 러츠’가 마음에 오래 남았었다. “이 동작을 몇 번이고 천천히 돌리면서 보니 회전을 하기 전 김연아 선수가 이를 악물고 있었어요. 선수 내면의 깊은 고통을 표현해보고 싶었죠.” 이 어려운 동작을 그토록 아름답게 완성하기까지 선수가 치렀을 혹독한 과정을 그는 그림 속에 녹여내었다.
그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으니 서슴없이 ‘좋으신 하느님’이라며 아이처럼 활짝 웃어 보인다. “돌아보니 팔 없이 산 30년이 더 즐겁고 행복했어요. 하느님의 계획 속에 내가 들어와 있었다는 것, 하느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아내가 엄청난 희생으로 함께해주었구나, 생생하게 보였어요.” 남은 생애 동안 이 소중한 두 분을 위해 무엇을 해드릴까 생각했다는 석 화백. 아내에게는 해줄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방 닦기나 신발 정리, 간단한 심부름하기 등 아주 소소한 일을 찾아 돕고 있단다.
그리고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은 성경필사였다. 화선지에 붓으로 써내려가 3년 남짓 걸려 구약을 완성했는데 25m 두루마리 91개가 되었다. 펼치면 2km가 넘는다. 그런데 성경필사를 하며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시력이 좋아지고 진통제도 듣지 않던 무서운 환상통이 견딜 수 있을 만큼 묵직해졌다고!
신약을 필사 중인 석 화백은 이제 오전엔 성경을 쓰고 오후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일정을 잡는다. “내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대로 살자고 생각하니 편안해지고 걱정거리가 없어졌어요.”
“남편의 그림 작업이 들어간 공연을 탄탄하게 만들어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이미 중고등 교과서 8종에 석 화백의 그림과 삶이 실렸지만 학생들이 석 화백이 그림 그리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싶다. 아내의 선한 꿈에 석 화백은 감사할 뿐이란다. 판을 만들어주니 자신은 화선지 위에서 놀면 된다고.
화선지 위에서 그는 자유롭다. 팔이 사라진 자리에 날개가 돋았다. 붓은 그의 날개. 그는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며 생명의 몸짓을 그린다. 그는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그 비상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하는 날갯짓이다. 석창우 화백의 날갯짓을 따라 힘껏 날개를 펼칠 어린 꿈들을 상상해본다. 유난히 하늘이 아름다운 가을날이다.
글 | 신효진 편집장 사진 | 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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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생활성서] 의수 화가 석창우|작성자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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