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7년

<눈치 없으신 하느님> 책 속으로

김레지나 2017. 10. 23. 10:30

눈치 없으신 하느님 책 속으로

 

  10분쯤 지났을까. 큰 숨을 내쉬면서 기도가 저절로 멈추어졌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마음 가득 추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환희가 차올랐다.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맑디맑은 기쁨이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구나.’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P.30

 

  그 순간,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난생 처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다.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야속하게도 나를 보고만 계셨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엄마를 보면 더 크게 우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오히려 더 서러웠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내 고통을 보고만 계신다는 사실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좀 멀리나 계실 일이지.

- p 47

 

  진짜 유치하기 짝이 없네. 뭐하러 수술장까지 오셔서 퍼포먼스를 하셔? 아파서 죽겠구만, 아픈 거나 좀 덜하게 해주실 일이지. 보고만 있으면 뭐해? 보고만 있으면 뭐하냐고. 내 곁을 떠나지 마시라는 기도를 들어 주신 거라고? 별꼴이 반쪽이야. 힘을 내기는 무슨 힘을 내. 이렇게 아픈데 보고만 계신다 이 말이지? 흥!’

  너무 아파서 심술이 잔뜩 나 있었기 때문에 환시에 대해 자세히 묻지도 않았다. 예수님께 고마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매 순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거 누가 몰라. 아픈 거나 좀 덜하게 해주실 일이지.’ - p.54

 

  하지만 권능과 영광을 좇아 하느님을 찾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하느님 닮은 사랑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존재이다. ‘하느님도 참, 눈이 좀 멀면 좀 어때서?’하는 섭섭함이 남아 있었지만 내 마음은 평안을 되찾았다. 그리고 무사히 수술이 끝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어서 날들이 가고 아픔이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p. 57

 

  ‘아, 하느님께서 나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게 아니구나. 고통을 이겨나갈 의지를 부어서 만든 한 사람 한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구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구나. 그런데 나는 앞으로 어떻게 견디라고?’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듣게 된 엄청난 충격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홀로 설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깨달음에 대한 감격과 앞으로 내 의지로 이겨내 보라는 주문에 대한 섭섭함이 동시에 밀려들어 울음이 터졌다. p. 65

 

  생각해보니, 내겐 나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항암주사 부작용도 덜했으면 좋겠고, 팔도 좀 더 잘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고, 애들이 보고 싶어 괴로운 마음도 덜하면 좋겠고, 하느님께 심술 난 마음도 빨리 나으면 좋겠다.

  내가 부족한 글로 하느님의 사랑을 얘기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느꼈다고 쓰면서도 큰 걱정이 있다. 지금은 하느님의 사랑을 얘기하지만, 앞으로 또 잊어버리고 게을러지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버릇없는 자식이고, 잔소리 좋아하는 아내이고, 세속적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이고, 이기심 많은 이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나의 형편없음을 보고 내가 믿고 사랑하는 하느님을 얕보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오히려 내 부족한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욱 용기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저렇게 부족한 인간에게도 사랑을 일러주시는 하느님이시구나. 나도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언제든 도와주시겠구나.'하고. p.76

 

 

  그러나 큰 고통을 겪어 본 사람들은 그런 어리석은 비교를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적은 행복을 갖고 있어도 고통의 크기만큼 커지고 채워지는 행복을 담는 그릇이 있으니까. p.89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투덜거리면서 맛없고 쑥갓 향이 나는 요상한 잡채를 몇 젓가락 먹고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엄마의 당당한 미소를 애초에 믿는 게 아니었다.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었는데. ‘아이고~, 아이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잡채야, 잡채야.’ 입만 열면 절로 곡소리가 날 것 같았다. p.95

 

 

  나는 유지니오의 모습에서 하느님께 응석 부리는 내 모습을 본다. 그리고 아들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는 내 마음에서 우리를 어버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다. 나는 지금까지 영혼의 구구단 외우기를 미루고만 있었던 거다. 하느님은 응석받이이고 게으름쟁이인 나를 끝까지 기다려주시고 사랑해주셨다. -p.121

 

 

 

  작별인사를 하려고 환자의 손을 잡으니 너무 차가웠다. “하느님이 바로 여기 계시거든요.” 나는 환자의 얼굴 바로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여기 계신다고 생각하고 힘들면 욕도 하시고, 매달려도 보세요. 꼭 잊지 마세요. 늘 옆에 계세요. 다음에 항암주사 맞고 다시 입원하게 되면 또 찾아올게요. 기도할게요.”p. 135

 

 

  “어머, 왜요? 왜 하느님이 아무것도 못 해주세요? 하느님이 왜 능력이 없으셔요? 그 환자도 기도하고, 저도 기도하고, 레지오 단원들도 기도하는데, 이제껏 종교생활도 안 한 환자가 그 정도면 됐지. 얼마나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해요? 얼마나 더 해야 그 불쌍한 환자를 도와주신대요?”

나는 집에 돌아와서 속이 상해서 울었다.- p. 160

 

  나는 하느님과 강마리아 님에게 감격했지만 심술 난 척하고 말했다.

  “하느님이 왜 안 미워요? 저는 밉던데요.”

  (사실은 나도 안 미워한다. 금방 하느님 짱!이라고 기도했잖은가? 나는 그분이 이 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님과 화해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 p.169

 

 

“예수님, 제 작은 고통이 뭐라고 이렇게 후한 값을 쳐주십니까? 제 작은 수고가 뭐라고 제게 이렇게 큰 기쁨을 주십니까? 기도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p. 175

 

 

 

  두려움을 극복하면 지금의 병도 나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매이면 병을 더 키울 수 있습니다. 죽음을 바로 보는 일, 죽음을 더 일찍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우리들의 마음이 낫는 지름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지혜입니다. -  p. 178

 

 

 

  저는 그분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주님의 위로를 받았고, 그분들 덕분에 빗나가지 않았고, 그분들을 보며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고통을 통해 가장 잘 성장할 수 있음을, 고통을 통해 가장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 p. 183

 

 

  엉터리인 것은 하느님도 마찬가지예요. 용서 못 해 부끄럽고 괴로울 때 하필이면 사랑 고백 받아가셨잖아요. 말씀도 옹색하게 화장실에서 주셨고요. 하느님은 저보다 한술 더 뜨시던데요. 하느님도 폼하고는 영 담쌓으셨어요. - p.193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주님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는 줄. 이렇게 가슴 벅찬 일인 줄. 연인을 사랑하듯 설레고 자식을 사랑하듯 애틋하고 부모를 사랑하듯 고맙고 친구를 사랑하듯 든든하고 이 모든 감정을 다 더해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에요. - p.209

 

 

  다정님,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보다 더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데요? 우히히히! 제가 거룩한 일을 했군요, 이런 글을 읽으면 도무지 겸손해질 수가 없어요. 자뻑이 중증이어요. 푸하하하! - p.220

 

 

  제가 어떤 느낌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으세요? 으앙~ 하고 울어버렸어요. 제가 어제 예수님께 했던 사랑 고백과 오늘 아침에 했던 세 가지 걱정거리에 대한 답이 다 들어 있잖아요. 분명 예수님의 답장이어요. 읽을 때마다 좋아서 눈물이 나요. - p.213

 

  그래서 ‘저한테 주시는 말씀이면 한 번 더 펼쳐지게 해주세요.’하고 눈을 감고 성경을 다시 펼쳤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페이지가 펼쳐졌습니다. ‘하느님, 이왕이면 한 번 더요.’라고 기도하고 성경책 위쪽을 잡고 펼쳤는데, 다시 나왔습니다. 어찌나 놀랍고 고마운지 푸핫! 웃음이 터졌습니다. ‘어머나, 이렇게도 말씀을 주시네요. 우하하. 근데요. 하느님, 이왕 선심 쓰시는 김에 더 보여주세요.’저는 거실로 자리를 옮겨서 다른 성경책을 집어 들고 펴보았습니다. 또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 p.250

 

 

  갑자기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셨어요.(그때도 과잉친절이었어요.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거든요.) “너, 라자로 무덤 앞에서 내가 왜 마음이 북받쳐 울었는지 궁금해 했지?” -  p.265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은총을 받았어요. 그러니, 제 안에는 질병의 치유보다 더 초자연적이고 강력한 표징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서럽게 어떤 상황을 겪을 때가 있어요. 부끄럽게도.  - p.275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인간으로서는 꿈꿀 수 없을 만큼 강렬해서 단 한 번이라 할지라도 모든 고통을 다 보상받았다고 생각될 만큼 강한 힘을 갖습니다. 또, 앞으로 겪게 되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어떤 일이든지 하느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렇게 한 번 마음 한가운데 굳게 자리 잡은 기쁨과 평화는 어떤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살면서 가끔은 자잘한 일로도 짜증을 내고 불평도 하게 되겠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에는 늘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런 식의 평화와 위로를 구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원치 않는 고통이 닥치면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병을 낫게 해주시라고만 떼를 쓰기도 하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하느님께 따지기도 하고, 기도원 같은 곳으로 기적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고통이 사라져야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고통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과 깊이 결합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정한 표징은 우리가 겪는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 p.323

 

 

  그 장면이 생각나면서 마치 하느님의 속삭임인 양, 어릿광대의 독백이 제 머릿속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그 모든 모습까지 다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p.342

 

 

  하느님께서는 제게 그렇게 ‘특별히’ 당신 사랑을 일러주셨습니다. ‘특별하다’는 것은 ‘고유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누어줄 수 없는 사랑을 마련하셨습니다. 왜냐면 저는 이 세상 어느 누구와도 다른,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하느님을 향한 저만의 그리움이 있습니다. 제 환경과 제가 겪은 일들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과 저만이 속삭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대하시듯, 작고 작은 제 영혼과 ‘특별히’ 대화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뿐만 아니라 온 인류 한 명 한 명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 p. 343

 

 

  로사 어머님 말씀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어머님은 하느님이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으니, 대신 당신 편에서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줄임으로써 덜 손해 보는 쪽을 택하신 것 같았습니다. - p.367

 

 

  제가 하느님을 경외하게 되었다지만, 여전히 하느님은 제게 만만한 분이십니다. 세 번의 회개를 하기 전의 만만함과는 조금 다르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바탕이 된 만만함입니다. 제가 하느님을 어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철석같이 믿게 된 응석 어린 기쁨이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경외심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  p.376

 

 

  주님 앞에서 우리의 비참함을 고백하는 것은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며, 주님의 사랑을 그만큼 더 많이 깨달았다는 확인이며,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4:17)”라는 기도입니다. - p.383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42:5). 눈부신 표정을 짓는 데레사 안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여유를 잃지 않는 동생의 모습에서도 당신을 보았습니다. 저희가 당신을 뵈었기에 저희는 평화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저희의 영혼만은 절대 병들지 않을 것이니, 어떤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돌보심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다른 이들이 저희의 남은 생애 안에서, 저희의 죽음 안에서조차 당신을 뵈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한시도 저희에게서 눈을 떼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걸으시어 저희 안에 당신 모습이 비취게 하소서. 아멘.”  - p.406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희생과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길임을 제 삶으로 이해해보려고 감히 두려움을 참으며 주님의 뜻을 묻습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p.423

 

 

  저도 그 거인 아저씨처럼 커다란 왕주사 대신에 작은 주사 열 방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하느님, 지독한 통증과 울렁증이 겁나서 저도 거인 아저씨처럼 숨고 싶거든요. 혹시 저를 위해 왕주사를 준비하고 계신 건 아니시지요? 저는 왕주사 맞을 만큼 큰 사람이 아니거든요. 꼭 참작해 주세요. 저도 큰 거 한 방 대신에 작은 거로 열 방 맞고 싶어요. 웬만하면 견딜만하게 따끔거릴 정도로만 아프게 해주세요. 아셨지요?”-p.426

 

 

  “눈치 없으신 하느님. 계속 눈치 없는 척하지 마시고, 이번에는 제발 눈치 좀 봐가면서 일을 좀 벌여주세요. 전에 제가 했던 봉헌기도들을 도로 물러주시든지, 그게 싫으시면 눈치껏! 아셨지요? 아무리 좋으셔도 그렇지, 주사 여섯 번이 뭐래요? 그렇게 오버하시니까 하느님께 믿고 맡기는 사람이 적은 거 아니겠어요?” -p.431

 

 

  ‘고통에 의미를 입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고통에 우리의 작은 고통을 합치시키기로 마음먹는 일이다. 예수님의 고통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이듯이, 우리도 이왕에 겪는 고통에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기로 마음먹는 일이다.

우리 힘만으로 우리의 고통에 사랑의 의미를 입히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우린 그저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기로 결심만 하면 된다. 그다음에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고통을 사랑으로, 기도로 바꾸어줄 것이다. -p.443

 

 

  한꺼번에 열려 버린 깊은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몹시 고통스러웠다. 억울하고 서러워서 애먼 하느님께 자꾸자꾸 물었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예?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 p.458

 

 

  우리가 고통이나 죽음을 비롯한 부정적인 일들을 겪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두 가지뿐이다. ‘받아들임’을 거부하는 것과 ‘받아들임’을 선택하는 것. 받아들임을 거부하게 되면 우리 마음에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들 자리가 없게 된다. 받아들임을 선택한 후에야 우리는 평화를 누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받아들임을 선택한다’는 것은 울며 겨자먹기로 마지못해 견딘다는 뜻이 아니다. 선택은 체념과는 다르다. 선택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의지이다.- p. 460

 

 

  나는 암이 재발해서 지루한 항암을 앞둔 중증환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룩한 자뻑증’도 중증으로 앓고 있다는 것이다. - p.480

 

  그래도 이번 일은 저한테 가혹해요. 오늘 하루만 더 삐칠래요. 하느님! 너무하셨어요. 칫! - p. 493

 

 

  미사 중에 주님으로부터 더욱 겸손해지라는 책망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놀라워서, 제 부족함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통해서도 저를 당신께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를 살리신다는 것, 이것이 고통 가운데 제 위로입니다(시편119:50).’  - p.503

 

 

  주위로 눈을 돌려 보면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떨며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에게 다가가갸겠다. 레지나식의 경쾌한 몸짓으로. 같이 폭풍 속에서 춤추자고 청해야겠다. 마음을 다해 두 손 잡아 이끌며. - p. 507

 

 

  이렇게 글로 전하는 제 ‘은총 광고’가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게 더 나은 은총을 청하고 마실 수 있게 도와주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 p.544

 

  마치 예수님께서 “레지나야, 화가 나느냐?”하고 물어보시는 것 같아서 와락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예, 예수님. 아시면서 왜 물어보십니까? 너무너무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 p.546

 

 

  새 뿌리와 새 가지를 만들어낸 부러진 나뭇가지가 제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는 주님의 말씀을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꺾인 나뭇가지가 제 쓰러진 자리에서 생명을 도로 얻어 새잎을 피워내듯 나도 꺾인 모습 이대로 기적을 피워낼 수 있는 거야. 내 건강을 회복해야만, 예전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만 내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건 아니야. 내 망가진 모습에도,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두려운 걱정들 속에도 주님 사랑은 부족함 없이 깃들이 었어.’ - p.563

 

 

  ‘아!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징 비천한 삶을 택하시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하셨구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수난이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힐링‘이구나.’ - p.566

 

 

  그러니 우리가 저지른 악의 최대 피해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하느님의 짓밟혀진 사랑의 고통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 p.575

 

 

  고통이 은총임을 알아 감사하고, 고통을 기회 삼아 사랑하고, 고통으로부터 지혜를 얻어 성장하며, 고통이라는 달란트로 거룩한 일을 해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 속에서 완전한 위로와 보상을 얻을 것입니다. 고통이 영원한 생명 속에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훈장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면 고통에 끌려가는 대신 고통을 안고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제 그만 쉬로 오라 부르실 때까지 지금 겪는 고통이 영광이 될 것을 희망하여 힘을 낼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콜로2:27).” - p.578

 

 

  예수님께서는 제게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가 잠시라도 겪었을 슬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이들, 죽음을 맞는 이들,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서 격하게 우십니다. - p.591

 

 

  주님의 눈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형편없는 사랑을 뉘우치게 되며, 주님의 눈물로써 우리는 완전한 치유를 받게 될 것입니다.- p. 593

 

 

  하느님의 섭리를 만드는 주역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죽어간 이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개인과 사회를, 정치와 경제를 바로 서게 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섭리’를 이루는 길이다. 우리가 그런 책임감으로 노력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섭리’를 말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제야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필요 때문에 만든 망상’이 아니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임을 증거하게 되는것이다. - p.607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한 영혼을 다른 존재들을 다 합친 것만큼 사랑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일대일의 관계에서 완벽하고 전폭적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의 시선은 인류 공동체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춰져 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일대일로, 맞춤형으로, 눈높이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결국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 ‘한 사람씩 모두’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 p.614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일부러 제자들이 문을 다 잠가놓고 있을 때를 택해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대보지도 않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닫힌 제 마음의 문을 여시려고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놀라운 일을 벌여 평화의 인사를 건네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토마스처럼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 p.634

 

 

  그래도 지금 저는 분명 행복합니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은 법이라지요. 병원 마당은 봄꽃으로 눈이 부시고,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지 환우들의 웃음소리는 파릇파릇 푸르기만 합니다. 삶은 참 아프도록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제 행복을 통해 찬미 받으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 p. 635

 

 

  언니와 저는 펜션의 정자에 누워서 욥 이야기, 고통이 사명인 사람들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 그러니 우리는 우쭐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킥킥댔습니다. "함께 있으면 뭐해? 아픈 거나 좀 덜하게 해주실 일이지.ㅋㅋ" 하고 하느님 흉도 보았지요.

  이젠 언니도 저도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다가섰음을 기뻐합니다. 하느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언젠가는 우리도 하느님의 질문에 기쁨으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 하느님, 저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하구요. 저는 언젠가 있을 그 대화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면 꼭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그리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저를 안고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 p.664

 

 

  금방 어떤 드라마보다 더한 감동으로 당신 사랑을 일러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금도 언제나 기다리셔요. 저를 지으신 하느님께서 저를 기다리셔요. 제게 입을 맞춰주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셨던 하느님께서 제게 구원의 빛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셔요. 아! 십자가는 사랑의 기다림이었군요. 저는 십자가 가까이에서 아버지를 보며 떨고 있어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음 졸이는 작은아들처럼 떨고 있어요. 아버지를 만나 그분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을 터뜨린 작은아들처럼 떨고 있어요. 아버지가 십자가 위에서 비춰주시는 구원의 빛을 받아 안고 그 큰 사랑에 놀라 떨고 있어요. - p.684

 

 

  10년이 훌쩍 지나 이제 알겠어요. 예수님께서 제 유익을 위해 일부러 제게 병을 주신 게 아니라는 것을요. 예수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고, 저를 걱정하셨겠지요. 이제 저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하시며 겪으신 고통을 제 항의에 대한 충분한 답으로 받아들여요. “하느님, 늦어서 죄송해요.”  - p.696

 

 

  마음이 바빠져서, 글들을 교정 못 한 채로라도 묶어놓아야겠다 싶었습니다. 우연히 한 곳을 펼쳐보았는데, 항암 후에 오심을 견디기 힘들어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허. 하느님. 이러시기 없기.…… 쫀쫀하게 굴지 마시기.” 그랬더니 울렁거림이 멎었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참 시시껄렁하고 유치한 속마음도 다 써놓았다’ 생각했지만, 그 시절의 제가 부러웠습니다. ‘그래, 철부지 애기일 때가 좋았어. 큭. 맞아. 쫀쫀 대마왕 하느님!’

돌이켜보면 하느님은 결코 쫀쫀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내가 지금 어쭙잖게 애어른처럼 굴면서 힘들다고 하고 있구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 진짜 진짜 이러시기 없기! 통증을 며칠만 없애주세요. 안 쫀쫀하실 줄 다 알거든요.”

  ‘쫀쫀 대마왕’이라는 말에 하느님이 억울하셨는지 진통제를 먹지 않고도 푹 자게 해주셨습니다. - p.724

 

 

  정말 그렇습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바라보아야 할 주님은 ‘사랑을 일러주시던 분’도 아니고, ‘위로해주시던 분’도 아니고, ‘산같이 든든한 애인 같은 분’도 아닙니다. 저를 도와주시기는커녕, 무능하게도 당신 고통도 벗어버리지 못하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제 죄 때문에 못 박혀 계시는데, 권능을 떨쳐 보이시라고 소리 지르는 저는 못난 죄인입니다. 자꾸 조르다 토라지는 저 때문에 주님은 더욱 외로우시겠지만, 제 고통을 함께 아파해주실 것입니다. - p.726

 

 

  저는 성인들처럼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하고 우도처럼 제 부족함과 죄로 못 박혀 있지만, 정말이지 다행히도 저는 주님께서 저의 왕이심을 인정할 줄 압니다. 제 마지막 날에, 우도의 마음이 되어 십자가상 주님을 바라보기만 해도, 주님께서는 왕다운 권위로 제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천국을 희망하는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왕이신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p.726

 

 

  모처럼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다.

  “네 기도가 마음에 든다.”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께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그리움’, 몇 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감정인지. 그런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은 성령께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때문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다. 그리움이 진하면 마음이 아프게 마련이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 듯해서 위로가 되었다. 곧 내가 그리움을 느낄 자격도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죄송스러움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훌쩍거리며 연신 중얼거렸다.

  “나는 이렇게 엉터리인데. 훌쩍.” “나는 아직 두려운데, 훌쩍.”

  고마운 마음이 클수록 더욱 죄송해져서 더 격하게 흐느꼈다.

  “나는 엉터리이고. 끄억.” “나는 두렵고. 끄억.”  - p.739

 

 

  주님의 시험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은총이니, 내가 누린 은총에 감사한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님의 사랑 어린 시험은 계속될 것이다. 얼마나 자주 겁에 질리고, 유혹에 넘어지게 될지 걱정이 되지만, 나는 굳게 믿는다. 주님께서 부족하디 부족한 나와 함께 계시면서, 넘어질세라 지켜보고 돌보신다는 것을.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 하십시오.”  - p.749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참으로 귀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시니 참으로 복되고,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하느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으니 참으로 훌륭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부터’ “용기를 내십시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마태 9,22 참조) 아자! 아자!^^  - p.761

 

 

  제가 받는 기도는 저를 기도로 업고 계시는 성자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성사이고 표징입니다. 저는 저를 구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업혀 살고 저를 지으신 하느님의 자비에 업혀 삽니다. 제가 세상과 작별하는 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저를 기도로 업어주실 것입니다.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 p.766

 앞표지 그림 박효민 로사리아

뒷표지 그림 이승미 엘리사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