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마리노 레스트레포 강의

[스크랩] 거룩한 자비의 은총 / 마리노 레스트레포 묵상

김레지나 2017. 5. 29. 21:46



The Graces of Divine Mercy by Marino Restrepo 




2013 4 7  - 자비의 축일

영국 리버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당

 

특별한 , 여러분과 함께 있는 영광과 축복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거룩한 자비에 대한 묵상을 나눌수 있음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동안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놀라운 은총을 우리 교회를 통해 주셨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도 동의하시리라 믿으며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자비의 은총이 너무도 크고 힘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것을 이해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의 사명중 하나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심을 이해시키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자비를 깨닫고 의탁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 소개를 하시는 동안 저는 사도행전 1장을 펼쳐 보았습니다. 제가 읽은 것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말씀: 사도행전 1:6-9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베드로는 무엇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다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살아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증거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곳에 오도록 하신 것은 저의 말이나 여러분의 생각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비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없는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필요는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알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신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노력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로서 그분께 의탁하고 곳에 그대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자비의 신심의 모든 메시지는 주님께 내어 맡기는 방법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콘트롤하려고 몹씨 애를 씁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엄마 말을 안듣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것을 있지요. 주위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조정하려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지 지요. 자비의 신심 메시지는 내려 놓고 맡기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우스티나 성녀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영혼들에게 말하여라.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나의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한다고 말하여라. 나에게 의탁하여라.”

 

우리가 인생에서 여려운 시기를 지날 ,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고 해결 방법을 찾을 없을 , 누군가가 주님께 의탁하라 말한다면 마음이 상할 조차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께 의탁하란 말이야, 도대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는데...”  믿음이 흔들리고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어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아무리 한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태도일 겁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의 도전은 초자연적인 현실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으로 도유된 믿음으로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황이 어떻든, 조건없이 하느님께 의탁할 있도록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상황이 아주 나빠지고, 빠져나갈 방법조차 없을 , 목까지 물이 차오르는 듯하고 도와줄 사람도 없어 보이는데 누군가가 와서 주님께 의탁하라 한다면,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의탁 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삶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지상의 삶으로부터 들여 올려져서 영원한 삶으로 향해 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적인 삶을 뛰어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현재의 상황은 엉망으로 보일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일시적인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말이 사람들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려움 안에 있을 우리는 어려움이 계속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당장 해결되기를 바라지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에 번이나 가보셨습니까? 아주 힘든 삶을 살았던 사람이 삶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처럼 보이는 죽음을 맞아 땅에 묻히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듣지 않으신걸까요? 대답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의 은총이 주어졌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참된 가톨릭 신자로서, 세례를 통해 초자연적인 도유로 성령의 은총을 받고 성사생활로 힘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끊임없이 하느님과 화해 하고, 가장 은총인 성체와 기도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께 충실한 믿음을 가질 있는 힘을 받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자비의 메세지입니다.

 

거룩한 자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메세지입니다. 모순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매일의 삶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안에서는 우리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해결할 없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세상을 바라보아도 세상은 완전히 엉망징창처럼 보입니다. 정의는 오간데 없고 사악한 사람들이 대부분 승자처럼 보이고 착한 사람들이 항상 짓밟힙니다. 죽을 운명의 안에서만 보거나, 요즘 가장 인기있는 지상의 번영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을것입니다.  

 

거룩하고 참된 , 단순한 수녀였던 성녀 파우스티나를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메세지는 그것이 지상의 삶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라는 것입 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엉망으로 보일지라도 내가 너를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데려갈 것이다. 죽음이 없는 영혼의 상태로 데려갈 것이다. 이상 죄가 없고 해가 지지 않는 , 영원한 영광, 영원한 빛과 기쁨, 하느님의 영광, 그것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문해볼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그것을 꿈꾸었는가?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에 지상의 , 일시적인 노력에 대해서만 꿈꾸고 걱정합니다. 그리고 일이 나아지지 않을 , 좌절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며, 우울증에 빠집니다. 때로는 모든 일이 풀릴 조차도 우리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지상의 목표를 위한 것입니다. 경쟁사회 안에서 매일 높은 목표를 세워놓습니다. 부자들 조차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언제나 많이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덫에 걸린다면 우리는 항상 좌절만 하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유의 영역으로 초대하십니다. 일시적인 삶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자유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상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르드의 메세지를 보십시오. 성모님께서 목격증인 버나뎃트에게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메세지는 버나뎃트에게만 준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는 메세지입니다. “나는 지상의 삶에서의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상의 삶의 행복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다니지요. 현대 심리학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행복해야한다. 기쁨을 찾아야한다. 자아실현을 해야한다. 긍정적인 사고, 자아존중, 등등 ..모든 것이 자신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계신 하느님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위에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철학입니다. 그러나 복음 말씀은 비참함과 죽음의 자신은 죽고 하느님이 커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난함을 이룰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이 죽는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작아져야하고 그분은 커져야한다 것이죠. 바오로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 것입니다. 그것이 성인들의 끊임없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이 부풀려져서 너무 자신이 커졌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멈추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은 죽고  당신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지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들으시고 해결해 주시기를,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당장 기적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면 벌써 지쳐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같은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며 질질 끌려 갑니다. 마치 응답이 없는 기도를 하는 같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생각합니다.  

 

거룩한 자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길 재촉하십니다. 우리의 원함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해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원하시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하겠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원하십니다. 오직 거룩함만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가 나타나서 두루마리를 펼치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읽어주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거룩해지는 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하는 것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삶이나, 교회에 자료로서 남겨진 파우스티나의 삶을 읽어보아도, 그들 모두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겸손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많은 고통을 받았지요. 우리 모두는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녀 파우스티나는  신비가로서 평범한 사람과 다른 체험을 하였긴 해도 여러분이나 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성인들도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있습니다. 그들도 의심을 가졌고, 두려움을 가졌으며 때로는 불안해 하며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자비는 특별히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내어 맡길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지금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에서 작고, 선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함에 몰두하게 되면 그것이 아주 쉬운것임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선하게 순종하게 되며, 순종할 믿음에 충실하게 됩니다. 믿음에 충실하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아주 선한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성사적인 삶을 사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가끔 본당에 별로 관심을 끌지 않는 신자를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겸손하며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항상 성체를 모시고 항상 기도하며 항상 교회를 도와주고 항상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이 있는 작은 일들을 합니다.겉으로는 많은 것을 하는 같지 않지만, 믿음 깊은 신자가 하는 작은 일들은 주님 앞에 나아갔을 아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작은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너무 부풀려져 있어서 거룩하고 선하다는 것이 아주 크게 되고 많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선물은 작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미소가 거지에게 많은 돈을 보다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대부분 우리의 가장 작은 일을 통하여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깨닫지도 못한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 가장 것일 있습니다. 제가 보장하지요. 여러분이 죽어서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여러분이 알지 못한 쌓아 놓은 것들을 보고 매우 경이로워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쌓아 지지 않은 것들을 보고 매우 놀랄 것입니다. 여러분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주 것임을 알게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거꾸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연옥에 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정말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합니다. 영혼들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거룩한 자비는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는 바로 지금,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우리에게는 오늘이라고 부르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놀라운 기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며 깨어라! 깨어서 내가 주고 있는 모든  은총들을 보아라!  너희는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되는 모든 것들 안에 있다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엄청난 은총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원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걱정합니까?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자동적으로 다른 영혼들의 구원을 걱정하게 됩니다. 자신의 영혼이 낼수 있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염려하고 걱정하게 되면 모든 영혼의 구원을 걱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해지도록, 거룩해지도록 애를 쓰는것, 그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자비의 신심입니다. ‘이봐,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군. 전혀 중요하지 않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라고 일깨우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이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자신의 장례식을 직접 보게 것입니다. 내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모든 걱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프로젝트가 어떻게 될까요? 많은 생각이며, 죄의식이며, 두려움등,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감정, 애착 모든 것들이 될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뼈와 함께 속에 묻혀 공기처럼 사라지고 말것입니다. 지상의 모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지혜롭게, 깨어나서 하느님께서 오늘, 아니  항상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거룩한 자비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청하게 것입니다. “주님, 거룩해지고 순종하고 겸손할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말씀을 듣는 것을 배우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을 배우고 미소짓는 것을 배우고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기뻐할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우리는 평화를 가지고 기뻐하여야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사적인 삶을 사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로서 기도의 힘을 이해하고 성사의 힘을 이해하고 생명의 빵인 성체의 놀라운 힘을 이해한다면, 하느님의 성령이 실제로 개인적으로 오셔서 안을 채우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순종하도록 힘을 주고 계심을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사랑할 없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결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없습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불가능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마음 상하게 하고 피해를 주면요~ 용서가 안되지요.   수가 없습니다은총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잡을 있는 은총은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은총을 향해 나아가서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성사의 은총입니다. 성전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전은 이곳에 있는 우리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 성체 안의 현존을 증거하기 위해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희와 종교 단체들이 매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무너지고 많은 종교 공동체가 사라집니다. ‘~ 교회들이 사라진다고? 우리가 그토록 잘못하고 있는 거야?” 라고 생각하지요. 저는 그것을 주님께서 교회에 변화를 가져오려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누구도 교회를 없애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이천년 동안 내부에서 자신의 교회를 파괴시키는 많은 크고 작은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천년동안 누구도 교회를 파괴할 없었습니다. 교회 내부 사람들조차도 항상 교회의 이곳 저곳에서 망치질을 댔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내에서도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손가락질 하는지 보지 않습니까?   사제가 어떻다, 신자가 어떻다하며 하루종일 문제를 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는 항상 건재했습니다.

 

교회는 단지 성전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심장(마음)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심장의 둥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전에 오고, 하느님 앞으로 나오지만 마음이 함께 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때로 전례중 말씀이 봉독되고 나서 후에 몽땅 잊어버립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가면서 누군가가 물어보아도 기억도 못합니다. 왜냐구요? 곳에 있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에 마음은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있어야 성전에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곳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순이지요.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곳에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익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시간에 우리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자동적으로 좋지 않은 것들에 이끌립니다. 대부분 우리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반면 유익하고 긍정적인 것에는 피곤해 하고 졸기 시작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미사중에 꾸벅꾸벅 졸다가  미사가 끝나자 마자 눈을 크게 뜨고는 성당 밖에 나가서는 두시간씩 잡담을 합니다. 미사 시간에는 코를 골다가 나와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요. 실제로 자신은 그곳에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문제입니다. 은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죠. 그렇게 은총을 계속 건너 뛰고 점점 약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종교라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것에 지나지 않으며 영적인 종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어기지 않고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께서 주신 의무를 다하고 가끔 성사도 보는등, 그런다고 해서 하느님의 사람이며 진정으로 신비의 일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고, 편리하다고 생각할 있고, 어쩌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어쩌면 삶의 어려움을 피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미신이나 액댐과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영성이 아니라 기복일 있습니다.

 

거룩한 자비의 메세지는 영적인 삶을 사는 영적인 존재, 영을 염려하는 사람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영원한 삶에로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죽음의 운명, 일시적인 삶을 뛰어 넘는 사람입니다. 지상의 삶에로만 묶인 마음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참된 현실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지금 보이는 것은 모두 사라질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분명히 해야할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이상의 것에로 향해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의 눈에서 사라질 천사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 하늘만 바라보고 있느냐? 가라! 가서 할일을 하여라!” 라고 하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어떻게 곳으로 올라갈 있는지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우리는 성서의 중요한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아직 우리는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올라가야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분께서 하늘과 땅사이에 사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십자가, 그것이 사다리입니다. 그것을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어떻게? 고통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두어야 함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사랑과 동정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려놓고 자신의 뜻을 내어 놓아서 예수님과 함께 죄가 죽는 것임을 이해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며  하느님께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영혼이 육체로부터 나오겠죠. 그런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것입니다. , 여러분이 성체와 성사적인 삶을 살아온 참된 가톨릭 신자였다면 바로 감실이 여러분의 영적인 집입니다. 여러분은 길을 잃은 방황하는 영혼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겁니다. 영혼은 육체에서 나왔을 목적지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목적지에 집중해야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약속을 이해하고 성체의 신비를 이해했던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참된 하느님을 섬기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면 죽음을 맞는 즉시 감실 아래에 있게 것이며, 때는 철이나 돌로 감실이 아니라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것입니다.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이 위에 서서 여러분에게 올라오라고 하시는 것을 보게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산을 올라야 합니다. 얼마나 멀리까지 오를 있을까요? 지상의 삶에서 얼만큼 주님을 향해 올라갔는지, 주님께 가까이 갔는지에 따라 그것 만큼 오를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올라가야 하는 , 그것이 우리가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 주어진 가장 은총중에 하나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묵상이 아마도 가장 은총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일겁니다.  갈바리산을 오르는 신비에로 이끌어 주는 영적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 가며 성요한의 영성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하느님 자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도록 자신을 내어주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요한 역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이해할 없었지만  스승과 계속 함께 , 그것은 사랑입니다. 결혼에 있어서도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이해할 없지만 사랑으로 함께 하며, 서로를 용서할 있습니다. 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서로를 이해할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분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음을 지킬 있습니까? 하느님은 너무도 신비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거꾸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찾아다니며 최선을 다해 선해지려 하며 순종하려하지만 많은 일들이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의탁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거기엔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주 중요한 혼인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하느님과 결혼해야하며 믿음에는 조건이 없어야합니다. 이해할 없을지라도 그분께 의탁하여야합니다. 예가 성요한입니다. 성요한이 이해할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함께 걸어간 것은 무엇에도 상관하지 않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이해할 없을지라도 신뢰하고 사랑해야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전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도하고 기도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조건을 붙여 기도해야합니까? 우리는 조건없이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만 사랑이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저의 삶에서 있었던 예를 드리지요. 저는 콜롬비아에서 가톨릭 신자인 대가족에서 태어났고 14세까지 신앙교육을 받으며 모든 가톨릭 전통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나이 14 즈음에 당시 60년대에 유행하던 히피라든지, 마약, 락음악, 미신, 동양사상 많은 것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33년동안 하느님을 떠나 대죄상태로 살았습니다. 배우, 작곡가로서 캘리포니아 헐리우드에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삶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아주 퇴폐적이며 죄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이 선한사람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것이 사탄이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33 교회를 떠나 살던 저를 주님께서 구해 주셨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성당에서 하느님에 대해 말할 가장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바로 저라고 장담합니다. 그대로 저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했고, 교회를 웃음거리를 만들었으며 저의 부모님이 하시던 모든 전례와 전통을 반대하였고 저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세상적인 것과 권력과 향락만을 추구하던 저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을 통해 주님께서 저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아주 유머를 가지신 분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숙부댁 농장을 향해 운전을 하고 가던 저는 콜롬비아 반군에게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저는 육개월 동안 정글에 감금되었고 죽음을 선고받았으며 정신적, 육체적인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머리에 후드가 씌어지고 손이 묶인 채로 박쥐가 날아다니는 어둡고 끔찍한 동굴에 감금되었고 16 되던 , 주님과 함께 저는 밤새도록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아홉시간정도 됬을 겁니다. 저는 그날 제가 부정하였던 모든 진리를 체험했습니다. 주님께서 제가 반대하던 모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옥이 존재하는 , 연옥, 주님의 영광,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의 , 그리고 영혼의 원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 사탄과 그의 군대 등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가 웃음거리로 만들고, 부정하고, 짓밟았던 모든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날 죽고 말았다면 지옥에 가고 말았을 겁니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제자신이 했던 모든 일들을 깨달았고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체험의 첫부분은 인식의 밝힘 혹은 양심조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었고 두번째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전 앞에서 삶에 대한 심판을 체험하였습니다. 바로 정확하게 사람이 죽으면 겪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삶으로 돌아왔느냐구요? 저는 대답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말씀드린대로 저는 곳에서 가장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납치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고, 교회로 돌아온 저는 2 동안 주님께서 삶을 기워 갚을 한번의 기회를 주셨음을 확신하고 준비하였지만, 저에게 사명이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2 주님께서는 제게 다시 나타나셨고 저에게 사명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14 일입니다. 저는 저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떠났고 콜롬비아 보고타 교구하에 사랑의 순례라는 교회의 승인을 받은 선교단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4 동안 끊임없이 세계를 다니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명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그것이 지금 제가 하고 있듯이 신앙을 증거하고, 저의 체험을 전하고, 주님께서 마음 안에 넣어주신 것들을 나누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삶을 떠났을 어떤 일이 계속 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영적인 삶이 실제로 있고, 우리한 처한 위험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구원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것들에 순종할 , 성서의 말씀이 진리임을 이해하고 하느님의 교회를 이해할 ,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하느님의 교회입니다. 저의 체험에 의해 저는 어느 누구 앞에서라도 이것을 말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의 유일한 교회라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습니다그렇다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가톨릭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틀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어쩌면 종교에 대해서나 우리 교회에 대한 것에 있어서는 그들이 틀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이 있다면 사랑에 있어서는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말했습니다. 삶이 끝났을 우리 모두는 사랑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또한 명확하게 해야 것은,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그러나 지상의 삶에서 그리스도교의 은총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이곳에서 사랑에 따라 살았다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전 앞에 나아갔을 기회가 있으며, 사랑에 따라 살았던 모든 사람은 주님의  대전에 나아가면 즉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평생 하느님을 모를지라도 하느님께 많은 사랑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상 전교할 필요도 없고 성서도 필요없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말은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각기 다른 책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가톨릭 신자로 태어났거나,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이 육십세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처음부터 가톨릭 신자로서 창조하신 것이며, 성체로서의 보속의 도구로서 모든 인류의 영혼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는 하느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마십시오. 신비체험에 의해 눈으로 것이며 삶을 통해 그것을 증거할 있다고 장담합니다. 제가 지금 하느님의 성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아주 근사한 느낌입니다.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누구도 다른 말을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고 생애 매일 매일을 그것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씀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대해 아주 많은 의문을 갖습니다. 하느님 뜻에 대한 온갖 가르침이나 문화, 서적등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아주 아주 짧은 대목을 읽더라도, 짧은 말은 아주 아주 부드럽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해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에 대한 참된 대답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대답은 오직 거룩해 지십시오.’ 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가족이 구원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곧바로 천국으로 가지 못할수는 있지만 결국은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구원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를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회개하십시오.

 

제가 납치사건으로 부터 돌아왔을 하느님께서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가장 걱정은 아들이었습니다. 저의 아들들은 제가 믿음이 없이 길렀습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가톨릭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죠. 당시 아이는 이미 자라서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고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저의 체험을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을 , 아이들은 우와~” 라는 표정으로 저를 보았고 아이들이 저를 믿을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해 증거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고 아이들은 그것을 그냥 넘겨 버린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은 제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이 마음안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저는 없습니다만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아주 좋은 아이들이지만 믿음을 갖지 못하므로 그것이 저에게는 슬픔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을 확실하게 한다면, 믿음에 충실하고, 매일 거룩해지기를 노력한다면 제가 지금 하려는 것처럼, 매일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자신의 증거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데려오는 그것은 기쁨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만), 아이들이 구원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영광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할지는 개인의 문제이므로 저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기 지불해야 것들이 있으며 오직 아이들이 죽기 전에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저의 걱정은 자신이 거룩해지는것입니다. 저부터 그것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있는 하느님의 자비가 항상 이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은 나의 마음이 바뀌어야합니다. 자신부터 시작해서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고,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되는 것을 멈추고 영적인 기쁨을 갖기 시작해야합니다. 기분이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으십시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그분의 모든 약속을 믿는건가? 나에게 밝혀진 모든 것이 진리임을 정말 깨닫고 있는가? 진리에 따라 산다면, 기도하고, 그분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나의 삶은 바뀌어야한다 비록 삶에서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해도 죽는 순간에 내가 노력했던 변화를 누리게 될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있을 곳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보장하지요. 모든 성인들은 얼만큼 성덕에 이르렀는지에 상관없이 그들 모두 더욱 거룩한 성인이 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깊이 하느님 안으로 있습니다. 하느님은 끝이 없고 무한하며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더욱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더욱 깊게 가까이 가고 더욱 하느님을 얻는 다는 것은 영원한 삶의 기쁨인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며 환희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모든 은총이 담긴 접시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먹이고 계심을 깨달을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우리는 그것을 받아 들일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천국의 보물을 얻을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어제 거룩한 자비의 신심에 대한 마지막 구일기도를 마쳤을 겁니다. 구일기도의 지향중 하나가 자신을 천국에 쌓기 위한 방법을 배우것이지요. 어떻게 그것을 준비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중 하나가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라고 하셨죠. 교회가 우리에게 전대사를 연옥영혼에게 양도할 있지요. 신앙의 해에 우리에게 전대사가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미사나, 전대사를 연옥영혼을 위해 바칠 때마다 천국에 놀라운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주었던 사랑입니다. 또한 가장 좋은 사랑은 연옥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연옥영혼들을 돕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돕는 것과 같습니다.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만큼 여러분도 하느님께 가까이 갑니다. 둘이 동시에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성인의 통공입니다. 통공은 하나가 되어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순간마다 여러분의 친지중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여러분의 나무에 속한, 여러분이 책임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로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책임져야   영역의 영혼들이 주어졌습니다. 살면서 모든 여정에서 만나는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입니다길에서 우리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다시 보지 못할 사람까지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그들도 사랑하고 하느님을 전하게 되어있습니다. 복음 말씀에 베드로가 지나갈 , 아픈 사람들이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스쳐 치유되길 바라지요.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느님으로 가득 채우고 길을 걸어가기만 해도 우리의 그림자만으로도 사람들이 치유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갔을 분명히 사람들을 보게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고 성당에서 나와 길을 걸어가던 어느날, 근처 어느 집에 있었던, 우리가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놀라운 일을 하셨는지를 보게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블럭 옆에 서있었던 사람이 우리가 모신 성체로 인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그를 축복하시는 것을 보게 될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거룩하고도 거룩하고도 거룩한 성령의 감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통한 참된 보속의 도구임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비록 많은 일을 수없고, 많이 나눌 없고, 많은 것을 변화시킬 없을지라도, 우리는 걱정을 멈추고 주님을 믿고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여야합니다. 그리고 메시지를 깨달아야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에는 아주 풍요로운 많은 신심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신심이나 구일기도, 모든 기도를 매우 사랑합니다. 그러한 신심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주 슬픈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신심기도나 구일기도는 신앙을 미신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보물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의 상태는 계절과 같이 일생동안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그에 따라 한동안은 십자가의 길이 아주 도움이 되고 어떤 때는 무언가 다른 것들이 영적 도움이 됩니다. 경우에는 매일하는 것이 묵주기도입니다. 성모님에게 배운것입니다. 또한 매일 시에는 자비의 기도를 드리려고 노력합니다여러가지 일상의 이유로 못하게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것들이 저에게 힘을 줍니다. 모든 신심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 또한 영적인 안에서 일할 수있는 도구로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할 것은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기도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구일기도라든지 묵주기도를 어떤 자신의 방법으로 응답을 기대하면서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조건적인 기도일 뿐입니다. 조건적인 기도는 그다지 힘이 없습니다. 조건없는 기도를 ,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기도가 됩니다. 신심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 자신의 상황을 보여드릴 있습니다. 아름다운  어떤 구일기도이든 묵주기도를 통한 묵상을 하든 자신이 선택한 어떤 신심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 자신의 상황을 보여드리고 기도를 마치고 나서는 평화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렸으면 그것으로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드리고 그분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거룩한 자비의 신심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훈련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비의 기도에 대해 이런 저런 것들을 약속하셨지요. 그리고 약속들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믿어야합니다. 아주 힘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조건을 가지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 만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방법으로 답하십니다. 당신의 방법,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우리의 기도하고자 하는 충동을 주셨고, 또한 당신의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묵상을 나눌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자비, 동정, 용서의 순간을 나눌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사제를 주시고 고백성사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총중에 하나가 사제직입니다. 사제는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은총을 전해 줍니다. 우리들은 사제를 위해 아주 많이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우리모두를 위해 함께 기도해야합니다. 우리의 존재를 몹씨 증오하는 우리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적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데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아주 불리한 입장에 있는 것이지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준비할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무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준비할 , 우리의 존재가 적에게 있어서 장벽일 아니라 우리는 많은 영혼들을 구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와 사제성소를 위해 기도해야하며 우리의 신앙공동체를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가정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자녀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사제나 선교의 성소를 받아들일 있도록 해야합니다. 우리가 기도중에 기억해야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기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들으십니다. 특히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과 교회에 유익한 것들을 들어주십니다. 아멘  (역:wisdom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출처 :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글쓴이 : Wis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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