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라와 개신교 신자인 숙이 언니랑 병원 뒷산에서 한참 이야기 나누었어요.
엘라가 어젯밤 체험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하느님이 엘라 안에 있는 걸 느꼈대요.
아주 신비하고 행복한 느낌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엘라가 움직이면 엘라 안에서 쓰윽 같이 움직이셨대요.
엘라는 폐암이 뇌와 신장 등으로 전이가 되어서 통증이 있는데,
통증을 느끼니까, 마치 하느님께서 엘라의 통증을 함께 느끼고 아파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대요.
'아, 하느님께서 이렇게 나와 함께하시는구나. 내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시는구나.'하고 생각했대요.
저는 엘라 이야기를 듣고, 울고 말았어요.
"맞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으신다는 것, 정말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겪는 고통, 그것이 '고통은 왜'라는 항의에 대한 답으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할 때가 있었지.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고.'.... 저는 또 훌쩍훌쩍 울었지요.
엘라 이야기를 듣더니, 숙이 언니가
"어머, 어쩌면 하느님이 안에 계셨지? 좋겠다. 나는 맨날 뒤에서 쫓아오시기만 했는데."하셔요.
자초지종을 이야기해달라고 졸랐어요.
"4년 전에 암진단 받고, 거의 일 년 동안, 하느님이 계속 내 뒤를 쫓아다니시는 거야.
나는 좀 앞서가시면서 길도 알려주시면 좋겠는데, 늘 내 뒤에만 계셨어.
내가 "아니, 여기까지 쫓아오셨어요?"하고 묻곤 했어.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하는 동안 성경을 읽으면 말씀이 그렇게 달 수가 없어.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게 해주시는 거야.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들었어. 나를 위해 세상 모든 일들이 돌아가는 것 같았지.
하느님이 눈으로 보이는 건 아닌데, 분명 뒤에 계셨어.
그런 체험을 이야기하면 핀잔을 듣기도 해서 힘들었지."
제가 말했어요.
"'하늘의 사냥개'라는 시도 있는 걸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연인처럼 우리를 쫓아오신대요. 놓치지 않으려고."
엘라가 말했어요.
"내가 000 치료를 고민하고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속상해하니까, 그렇게 위로해주셨나 봐요."
제가 말했어요.
"그래. 하느님은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하는 질문에 점쟁이처럼 대답해주시지는 않아.
무얼 하든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주시고,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를 도와주시고 밀어주시지."
'맛이 간' 긴 대화 다 옮길 수 없어서 아쉽네요.
참 맑은 행복에 오래 잠겨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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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8일 - 하느님의 고통
저는 9년쯤 전에 아일린 조지 여사님의 책을 읽었어요. 요즘 다시 읽어볼 작정으로 병원으로 갖고 왔는데, 고작 한두 페이지씩밖에 못 읽었어요. 9년 전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딱 한 부분 있었어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부분이었어요.
어제 잠들기 바로 전에 이 부분을 읽었어요.
“성부께서 : 내 딸 아일린아. 네가 고통을 당하면 이 아버지도 아파서 눈물을 흘린단다. 너는 사제들을 위하여 그 고통을 사랑으로 봉헌하고 있구나. 내가 성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네게 부어주었고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는 성자의 수난과 슬픔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자는 너를 사랑과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는 자신의 신부로 맞아들여 세상의 죄를 위한 고통을 너와 함께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일린도 나도 일부러 고통을 구하는 것이 아니지만 아일린이 고통을 잘 참아 봉헌하니 내가 아일린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구나. 세상이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관대한 영혼이 많이 필요하단다. 영혼의 자유의지를 통해서만 세상의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깨닫고 깊이 통회해야 하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천국에서 나눈 대화 p.28)”
저는 하느님께 종알거렸어요. “하느님, 정말이세요? 아일린 조지 여사도 암에 걸린 이후로 아직까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게 하시고, 안 아프게 하셨으면 더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요. 그분 사랑이야 하느님이 제일 잘 아시고 믿으시잖아요. 여사님의 공을 위해서 일부러 고통을 겪게 하신 게 아니에요? 저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항암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지요. 게다가 제가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그 많은 문제들은 또 어땠구요? 그 모든 일을 아빠가 일부러 제게 엮어 주신 게 아니라구요? 제가 아프면 아빠 하느님도 아프세요? 저는 아빠도 저만큼 아프신 줄 몰랐어요. 그럼 아빠는 어떻게 견디세요? 낫게 해주시거나 살짝 막아주시면 될 텐데요. 아빠도 아프시다니, 아무래도 저희 고통을 해결해주지 않으신 데 대한 변명 같아요.”
오늘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은 사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들이었어요. (선으로 이끄시기 위해 저와 문제들과의 인연을 만들어 주기기도 하셨지만, 저 아닌 다른 이들의 고통을 원치 않으셔서 끼어들게 하신 거라 생각해요.) 적어도 제 질병은 하느님께서 더 힘들게 겪도록 허락하신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너무 힘들지 않게 살짝살짝 거들어주셨지요.
점심 전에 저는 복도에서 넘어졌어요. 오른손으로 땅을 퍽 짚었더니, 통증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두어 달 전에도 넘어져서 어깨 근육이랑 팔목이 움직일 때마다 아픈데, 또 다친 거여요. 아빠께 그랬지요. “헐! 아빠, 또 다쳤잖아요? 이런 거 안 막아주셔요? 이왕 아픈 거 신부님들과 아들들을 위한 기도로 봉헌할게요. 근데요. 아빠는 제가 팔까지 못 쓰게 되면 좋으세요? 능력은 두었다가 언제 쓰실라고. 원치 않으신다면서요? 저 지금 아픈 것도 함께 느끼셔요?”
하느님은 아주아주 특별한 목적이 없이는 자연의 섭리를 간섭하지 않으셔요. 제가 오늘 넘어진 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만드신 게 아니라는 거지요. 제가 어지러웠거나, 잠시 필름이 끊겼거나,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거여요. 하느님께서 제게 친구처럼 말씀을 건네신다면, “아이쿠, 레지나 아프겠다. 내 맘도 아프다. 얼른 나아야지?” 하셨을 거예요.
곧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성부 하느님은 성자 하느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함께 고통을 겪으셨어요.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성부와 성자는 사랑으로 결합된 한 분이시니, 성부 하느님은 성자 하느님과 함께 수난 당하고 함께 죽으시고 함께 부활하신 거여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신성을 나누어주시고 당신의 지체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시고 우리와 함께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셔요.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신부로 창조하셨다고 하는가 봐요.
하느님의 고통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사랑 때문이에요.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으로 결합되어 하나이시듯, 삼위일체 하느님과 우리들도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으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겪는 ‘하느님의 고통’이야말로 우리의 "고통은 왜?"라는 항의에 대한 유일한 답일 것 같아요.
2006년 수술 전날, 뼈 전이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엄마는 곁에서 울고 계시고, 남편은 세상 끝난 것 같은 얼굴로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지요. 능력 있으신 분이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만 계시니, 더 서럽더라구요. 저 멀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계셨더라면 그렇게 섭섭하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예수님께 이렇게 따졌지요. “예수님, 보시니 좋으세요?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세요?” 하구요.
10년이 훌쩍 지나 이제 알겠어요. 예수님께서 제 유익을 위해 일부러 제게 병을 주신 게 아니라는 것을요. 예수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고, 저를 걱정하셨겠지요. 이제 저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하시며 겪으신 고통을 제 항의에 대한 충분한 답으로 받아들여요. “하느님, 늦어서 죄송해요.”
2016년 6월 29일 - 맑게 갠 마음
어제 하느님의 고통을 묵상한 이후로 마음이 완존 활짝 개었어요.^^ ‘이 고통이 하느님의 뜻일까?’하고 여쭈면서 지체하면 안 되겠어요. 제가 아프면 하느님도 아프시다니, 제가 기뻐해야 하느님도 기쁘시겠지요. 그래서 하느님 듣기 좋으시라고 산책하면서 영가를 불러드렸어요. 레지나는 노래도 잘해용. 키키키. 그랬더니 마구마구 힘이 나서, 늘 자던 낮잠도 안 자고 씩씩하게 지냈어요. 연신 히죽히죽 웃으면서 물리치료도 받고 침치료도 받았구요. 저녁에는 환우들이랑 병원 노래방에 갔어요. 너무 많이 불러서 머리가 띵하기는 한데, 기분이 좋아요. 홍야홍야, 푹 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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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주님
로사야, 어제 복음(루카 7,11-17)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였지. 본당 신부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란 원어 표현은 ‘고통을 함께한다.’는 뜻이라고 하시더라. 내 마음에도, 네 마음에도, 가족들 마음에도, 환우들 마음에도 과부의 처지에서 느끼는 아픔과 상처가 있게 마련이지. 아~!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면서, 고통이 의미가 있다면서 말로만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야. 과부의 고통에 마음을 기울이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분이셔. 묵상 중에 새삼 깨닫게 된 십자가의 의미는 ‘사랑 때문에 차라리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야. 예수님은 사랑을 하시다하시다 기어이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을 선택하신 거야. 그러니까 십자가는 대속이나 용서보다 사랑을 더 먼저, 더 크게 드러내고 있는 거지. 함께 아파하는 사랑 말이야.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께서 그 아픈 사랑으로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셔. “일어나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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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사냥개]는 영문학 중요한 시 중 꼽힌다. 이 [하늘의 사냥개]를 지은 프랜시스 Francis Thompson(1859~1907)이 감춰두었던 일기장을 백 년 만에 찾았다는 가상의 아래, 절망을 이겨내고 시를 쓰기까지의 심경을 담은 로버트 Robert Waldron이 재구성하여 만든 소설이다.
이 프랜시스 깊은 무한한 바탕으로 프랜시스 톰프슨의 책에 담았다. 표현력이 훌륭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있으며, 과정을 흥미롭게 문학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한가운데에서도 빛을 찾는 시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다. 그리고 타락으로 도망가는 시인을 구원의 이끄시기 위해 쫓아가신다는 내용의 ‘사냥개와 같은 하느님’을 그린 소설의 통해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종교를 감동의 깊은 울림!
이 유명한 톰프슨의 추적하여 마침내 숨겨져 백 년 전에 쓰여진 시인의 일기장을 스토링턴의 잉글랜드 성모 수도원에서 시작한다.
기대와는 신학에도 흥미가 없던 프랜시스 나와 부랑자 생활을 하며 되어 간다. 그러나 재능을 알아 본 [메리 잉글랜드 Merry England] 편집자인 메이넬 Wilfrid Meynell의 도움과 자신과의 긴 싸움 끝에 마침내 아편 중독을 이겨낸다. 그와 함께 자신이 고통과 있던 하느님이 늘 자신과 함께 하셨음을 깨닫는다. 그러한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세상에 명작으로 길이 남은 시들이 된다.
이 소설은 소설이지만 등장인물은 프랜시스 생애에서 역할을 한 이들로 구성했고, 그가 사건들과 그가 장소들을 소설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마치 실제 시인의 그대로 놓은 같은 주어, 독자들 시인의 들추어 보며 읽고 있는 문학적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일기의 특성상 1인칭으로 쓰여 있어 시인의 고통의 시간을 그 긴 이겨 내 시들을 때는, 함께 큰 성취감과 기쁨을 될 것이다.
책의 뒷부분에는 이 소설의 바탕을 이루는 시 [하늘의 사냥개]의 원문을 수록하여 시를 읽으며 더 큰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한 이야기도 소설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어떠한 속에서도 함께 계신다!
톰프슨은 그 시대의 박식한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인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인생의 채로 보냈다는 잘 못했다. 일부 대한 접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영적인 그의 신체적 배우지 않기를 바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싸웠다는 것을 아는 오히려 더 영웅적이고 한다. 전 생애를 우리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실패하더라도 우리를 않으시며 우리의 항상 사랑하시고, 사정없이 우리를 추적하신다는 것을.
나 또한 도망쳤다. 그러나 내가 추위를 거처로 삼았던 런던 하수구 뒤쫓아 오셨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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