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잘 만나고 계십니까?”
기도는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깨닫는 시간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첫인사를 드리면서, 기획의 제목은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로 정했지만 그 내용은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영성 생활에 대한 것을 나누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결국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이고 영성이기 때문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올 한 해의 시간이 마무리되어갈 즈음에 다시 결론으로 말씀드리겠지만, 아무래도 그 첫 시작을 풀어가는 것은 다시금 ‘기도’ 이야기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할까 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신자 여러분들께서도 많이 들어오셨고 또 그 답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사실 기도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또 교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도는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 ‘예수님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도 (묵상) 기도란, “자기가 하느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하느님과 단둘이서 자주 이야기하면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라고 가르치고 계시죠.(「자서전」, 8장,5) 여기에서 성녀께서는 기도를 ‘우정의 나눔’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아니 그 이전에 둘 사이의 우정이 있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둘 사이의 만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기도라는 것을 너무 단순하게, 아니면 너무 폭넓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기도가 담고 있는 의미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기도를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스스로의 기도 생활 내지는 신앙 생활을 돌아보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게 됩니다.
“기도 생활 잘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마도 자신이 지금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아침·저녁기도는 잘하고 있는지 또 하루에 묵주기도는 몇 단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겁니다. 이런 의미의 기도 생활이라면 그것을 잘하는지 못 하는지 여부는 우리 스스로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성체조배나 묵주기도처럼 구체적인 기도들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면 ‘기도 생활이 부족하다’라고 스스로를 탓하기 일쑤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반복해서 ‘영성 생활이 부족합니다’ ‘기도 생활을 잘 못 하고 있습니다’ 반성하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이죠. 그리고 이러한 반성에 이어지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거나, 그래도 다시 한번 해봐야겠다는 반복되는 다짐이거나, 아니면 기도를 못 할 수밖에 없는 외적인 환경들에 대한 변명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기도 생활을 잘하십니까?’라는 물음은 ‘하느님을 잘 만나고 계십니까?’라는 물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 앞에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어떤 대답이 떠오르세요?
물론 이에 대한 답도 여전히 ‘아닙니다’로 같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기도 생활, 신앙 생활을 돌아보는 시각은 훨씬 더 넓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체조배나 묵주기도, 아침·저녁기도를 매일같이 바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하느님을 만나고 있지 않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형식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좁은 의미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과의 만남 안에서 또 오늘 하루 바쁘게 치렀던 일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염경기도나 묵상기도 안에서처럼 교회에서 가르치는 형식과 방법에 따라 밀도 있게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앞으로 말씀드리겠지만, 하느님께서 또 예수님께서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아듣고 그 알아들은 바대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지요. 하지만, 기도 생활을 이렇게 폭넓게 그리고 사실은 본래의 의미로 알아듣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흔히 기도 생활로 일컬어지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정해진 양식을 따르는 기도처럼 신자로서 해야 하는 의무를 ‘잘하는가 못 하는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또 어떻게 그분을 만나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행위의 차원에서 무엇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전체적인 방향이 어디를 향해있는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신앙 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기도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정해진 기도를 ‘해야 하는’ 삶이 아닌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교회가 기도를 ‘살아 계시는 참 하느님과 맺는 생생하고 인격적인 관계’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 일상의 삶 자체가 곧 기도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어느 분께서는 아직 하느님을 못 만나셨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못 만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나고 계시는 하느님을 아직 못 알아차린 것일 뿐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하느님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되니까요. 지금껏 알게 모르게 만나온 하느님을 이제부터는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면서 만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이 만남을, 우리는 계속해서 깊이 해나갈 것입니다.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이제 우리는 이렇게 알아듣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가톨릭신문, 2017년 1월 8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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