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7년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김레지나 2017. 1. 21. 21:11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2016. 12. 14

 

  눈이 와서 종일 방에서 지냈다. 환우 언니들을 방으로 초대해서 오래 이야기하느라 무리를 해서인지, 저녁부터 갑자기 왼쪽 견갑골 아래가 근육이 꼬인 듯 심하게 아팠다. 두어 시간 지나니, 왼쪽 겨드랑이 아래 임파선이 부풀어서 아리고 아팠다. 글 <본향을 향하여>에서 아픈 어깨는 오른쪽이었었다. 그때는 더 많이 아팠고, 호흡곤란 증상이 급작스럽게 심해져서 눕지도 못했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서 마음이 놓이던 참이었는데, 비슷한 증상이 왼쪽에 또 생긴 것이다. 며칠 전부터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있고, 숨 쉬는 게 좀 곤란했다. 10시쯤 잠들었는데, 통증이 심해서 12시에 깼다. 진통제를 먹었는데, 세 시까지 아파서 잠을 못 이루고 기계로 마사지를 하고 찜질을 했다. 아파서 다른 날보다 더 자주 깼다.

 

2016. 12. 15

 

  10시에 일어났다. 아침은 못 먹어서 간단히 간식을 먹었다. 혈압은 140, 90, 맥박은 118이다. 맥박이 자주 높아진다고 의사선생님에게 물어보니, 태평한 얼굴로 “그럼 퇴원하셔야 하는데요.”하고 잘라 말한다. 대꾸하기가 싫어서 말았다.

어제보다 통증이 좀 덜하면 좋겠다 싶은데, 여전하다. 점심 먹고 두 시간 잤다. 진통제 먹고 찜질하고 7시부터 12시까지 잤고, 한 시간 깨어 있었다. 그 사이 일곱 번쯤 소변을 보았다. 심부전 증상이기도 하겠지만, 몸 안에 정체되었던 수분이 빠져나가는 날이 가끔 있다. 다시 한 시간 자다 통증으로 깼다. 너무 아파서 빈속이지만 진통제를 먹었다. 한 시간쯤 지나니 통증이 20%쯤 줄어들었다. 누워 있으니 목 안이 불편해서 앉아 있었다. 그후로 한 시간 반 동안 소변 5회, 잠 자는 게 늘 일이다.

 

2016. 12. 18

 

  요양병원 진통제가 잘 듣지 않는다. 본병원 검사일을 한 달 앞당겨 1월 초로 예약을 했는데, 그 사이 통증이 더 심해지면 어쩌나 걱정된다. 병원 의사선생님은 암통증이 원래 진통제가 안 듣는다면서,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 받아오라고 하셨다.

  환우들이랑 주일 미사에 다녀왔다. 신부님께서 아기 예수님 맞을 준비로 성찰을 잘하고 고해성사를 보라고 권하셨다. 11월에 성지 미사에서 성사를 보아서, 이번에는 넘어가려고 했었다. 통증은 미사 중에도 계속되었고, 문득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성탄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 총고해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0년쯤 전에 총고해 했으니, 그후 10년 동안의 일들만 잘 성찰해보아야겠다.

  미사에서 돌아와 곧바로 쓰러져 한숨 자고, 천천히 산책하면서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많이도 미련을 떨었구나. 그때..., 그때는 사랑과 용서에 인색했음에도 뻔뻔했구나. 교만한 마음으로 험담했구나....... 최근에도 00의 일을 도와준답시고 그 사람의 미움에 필요 이상으로 동조해서 마음과 시간을 허비했구나. 그래그래, 빠뜨리지 않으려면 다 적어봐야겠다.’

  고해성사의 은총이 지금처럼 간절한 적이 있었을까. 늦기 전에 성찰해서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엉뚱하게도 부끄러움 대신 부드러운 감격으로 마음이 환해졌다.

  ‘부족하고 못난 모습 이대로 주님이 다 아시니 얼마나 다행이야. 이렇게 부족한 모습 기억하며 죄송해하는 마음을 보탬도 뺌도 없이 알고 계실 테지. 하느님이 전지하시니 참 좋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내게 '그것으로 되었다. 내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충분하다.'하고 일러주실 테니, “하느님, 저도 전지하신 당신의 눈길 한 번만으로 족합니다.”해야지.’

  충분히 착하게 살지 못했어도, 엄청난 은총에 맞갖은 삶을 살지 못했어도, 형편없이 자주 넘어졌어도, 교만한 마음으로 불평 속에 살았어도, 다시 고쳐 살 기회가 없다 해도, 제 바람직한 소원들까지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가볍게 털고 일어나 기쁘게 따라나설 수 있도록, 은총의 고해성사로 주님 맞을 준비를 잘 해야겠다. 아직 영혼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갑자기 부르시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던 마음이 말끔히 개었다.

  ‘히야~! 고해성사가 주는 위로가 이렇게 크다니. 놀랍고 놀라운 은총이야.’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비장한 마음이긴 했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싱글거리며 깡총깡총 걸었다.

  “하느님은 생각할수록 좋으신 분이어요. 하느님, 못난이가 못난 채로 걍 갈랍니다. 헛폼 잔뜩 잡고, 핫, 둘, 핫, 둘~!!! 봐줄만 한가요? 히힛! 저 나름 심각하니까 준비 잘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용.~!!”

 

2016. 12. 19

 

  어깨와 겨드랑이 통증이 너무 심하다. 찌르는 듯 아프고, 아리고 쑤신다. 얼얼하던 겨드랑이쪽과 오른팔 아래쪽 통증이 날카로워져서 몸이 저절로 움찔거려진다. 진통제는 여섯 시간 간격으로 복용하는데, 먹으나 안 먹으나 차이가 없다. 걷는 것도 힘들고, 숨이 차서 밥을 먹는 것도 힘들다. 지난 엑스레이 결과 오른쪽 늑막에 전이가 되고 횡경막이 올라갔다더니, 왼쪽까지 탈이 생기면 정말로 큰 일이 난거다 싶다.

  의사선생님이 암 때문에 늑막이 유착되면 그럴 수 있다면서 빨리 검사해보고 마약성 진통제 처방을 받으라고 하셨다. 앞당긴 본병원 검사일까지 2주일을 기다리는 것은 위험하겠다면서 종합병원에서 먼저 씨티를 찍어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일단 종합병원에 예약을 해놓고 고민을 하다가 내가 마지막 즈음에 처했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대형병원에서는 호스피스도 없고, 쉽게 입원할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몇 달 전에 종합병원 종양내과에 자료를 옮기고 진료를 보고 ‘마지막 항암은 이 병원에서 하겠습니다.’ 했었다. 항암 부작용으로 떨어진 심장 기능 때문에 독한 항암은 미루고 있는데, 이렇게 통증이 심하면 이판사판으로 항암을 해야 하고, 끔찍한 부작용과 통증에 시달리다가 곧 떠나겠구나 싶었다. ‘이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번잡한 검사와 항암 안 하고 곧장 호스피스로 가서 진통제랑 산소 처방을 받을 수는 없을까.’

 

2016. 12. 20.

 

  급속히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환우들이 생각났다. 나도 모니카 언니처럼 보름 만에 떠나게 되면 어쩌지? 000 언니도 떠나기 전에 통증으로 너무나 고생했는데. 숨 못 쉬는 건 너무 힘든데.’

걱정을 한들 소용이 없다.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위로도 구하고 마음도 가라앉힐 겸, 책을 읽었는데,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두려워마라. 네가 겪는 모든 시련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투덜거렸다.

  ‘두려워하지 말라니.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 말씀은 참 좋으셔요.’

  불평은 했지만 두려움이 거의 사라졌다.

 

2016. 12. 21

 

  종합병원의 진료를 보았다. 지난 달에 오른쪽 어깨가 아파서 갔을 때는 폐의 가지 하나가 막혔거나 늑막 전이 된 게 커졌을 수 있다고 정확한 원인을 찾으려면 흉부 씨티만 찍어보면 되겠다고 하셨다. 차도가 있어서 미루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에게 씨티 찍어보고 항암 시작하려고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뼈에 이상이 있을 수 있으니 뼈 검사를 찍어보면 좋겠는데, 이왕이면 펫 시티를 찍는 게 좋겠고, 흉부 시티, 복부 시티도 함께 찍어보자고 하셨다. 내가 조영제 때문에 두 가지 검사를 한 번에 받으면 일주일간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하소연을 했는데, 그 병원에서 찍은 자료가 하나도 없으니 다 찍어보고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소염제가 심장에 무리가 간다고 안 먹는 게 좋겠다고 해서 처방을 못 받았다고 말씀드렸더니, 마약성 진통제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는 진통제를 처방해주셨다.

  ‘이미 검사 처방이 나왔는데, 또 미루고 다시 본병원을 가면 이 병원은 다시 못 올 것 같다. 그럼 어디서 죽지? 본병원에서 항암 이것저것 바꾸어 하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말기 진단서 내주면 어쩌지? 몇 달 생명 연장하자고 병원서 시키는 대로 항암 하기는 싫은데, 급할 때 들고 바로 호스피스 찾아갈 수 있도록 미리 소견서를 받아놓을 수 있을까? 어디다 물어봐야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

  혹시나 통증만 줄어들면 원래 계획대로 이 주일을 더 기다렸다가 본병원으로 가보자 싶어서 오후에 한방 병원에 갔다. 한방 소염제 같은 건 없다고 해서 일반 침치료와 물리치료만 받았다. 겨드랑이는 림프 부분이기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찌릿찌릿 아프고 숨쉬기 힘든 게 더 심해졌다. 천천히 걷는데도 숨이 차고 말을 할 때도 숨이 찬다. 심부전 때문인지, 부종 때문인지, 횡경막이 올라가서인지, 어깨 쪽 염증 때문인지, 약물 때문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에라, 낼부터는 모든 약을 확 끊어버리고, 염증에 좋다는 어성초차만 끓여 먹어야겠다.

 

12월 22일~ 12월 23일

 

  아프고 피곤하니 집중이 안 된다.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숨이 차서 힘들다. 똑바로 눕는 것도 쉽지 않다. 심각하게 아프니까 암 말기 통증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어깨 속은 아리듯이 아프고, 가끔 칼로 쑤시듯 아프고, 겨드랑이 주위로는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듯 아프고, 피부는 쓰리다.

  ‘글 정리는 아쉽지만 못하겠고, 블로그 비번은 동생이랑 00님에게 알려주고 관리를 부탁하면 되겠다. 유서 쓰는 건 미루지 말 걸. 애들한테 당부할 이야기가 많은데.... 아일린 조지 여사님이 당분간 회복기에 있을 거라고 예언해주셨는데, 그 기간이 벌써 끝났나보다. 벌써 이렇게 아프면 살아 있어도 아무 일도 못하겠는 걸.’

 

  늘상 하던 오지랖이 여전하다는 게 신기하다. 지인들에게 카톡을 보내서 KBS다큐 스페셜, <앎-에디냐와 함께 한 4년>을 보라고 광고했다.

  나도 인터넷과 텔레비전으로 1,2,3부를 모두 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스피스 병동인 갈바리 의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이다. 죽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아니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자서전을 몇 페이지 펼쳐보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툭 튀어나와 안겼다.

  “보아하니, 너는 내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했구나. 이제 내 가슴에 기대고 쉬어라.”

  나는 싱긋 웃으며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 보시라는 듯이 끄덕끄덕했다.

  “맞아요. 예수님. 저 열심히 일했어요.”

  예수님이 ‘보아하니~’라고 말씀하셔서 기분이 좋았다. 다 지켜보셨고 다 알고 계시니 참 좋다. ^^

  ‘’본향을 향하여‘라는 글 쓴 게 괜한 일이 아니었어. 이젠 정말 본향으로 떠날 때가 된 거야. 나는 기도도 건성으로 하는 사람이고, 봉사활동은 물론 거의 못하고.... 내가 남들보다 쬐끔 잘한 일이라고는 고통을 겪는 일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하느님 덕에 수월했지. 뭐든 서툴렀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을 부렸지. 주님이 보아주셨다니 기분 좋아.’

 

12월 24일

 

  성탄 전야 미사에 갈 수가 없다. 집 떠나서 성탄절 보내는 것도 처음이고, 냉담 이후로 성탄 전야 미사에 못 가는 것도 처음이다. 좀 쓸쓸하다. ㅎ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자칭 불기천교라는 포항 아저씨를 만났다. 전에 하느님 만난 이야기 더 해달라고 하셨던 기억이 났다.

  “성탄 선물 드릴게요. 날마다 잠깐씩 하느님 이야기 해드릴게요. 교리 받으실 건강이 안 되니까 대세 받으시면 어때요? 불교, 기독교, 천주교 다 알아보시고 마음에 드는 걸로 선택하세요. 하하. 제가 천주교 파트는 맡을게요. 제가 시간이 없을 수도 있어서 서두르는 거예요. 올 해가 가기 전에 세례 받게 해드리고 싶어요.”

  식사 시간에 준 님이 말했다.

  “어제 KBS다큐 <앎, 서진아 엄마는>을 봤는데,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네요. 마음이 아파서 괜히 봤다고 후회했어요.”

“저도 그 프로 봤어요. 엄청 울었지요. 그 엄마 참 대단하더라구요. 그렇게 용기있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사람이 진짜 위대한 사람이에요.”

  준 님은 아프게 되니 종교에 관심이 간다고 하셨다.

  “성당에는 잠들만하면 일어서라고 해서 영~~. 명동 성당에도 가봤어요.”

  “형제님은 중한 환자가 아니시니까 대세 대상이 아니어요. 교리 받아야 해요. 제가 책 빌려드릴까요?”

  “아니요. 아직은 확신이 없어서요.”

  “아기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느끼려면 엄마와의 역사가 있어야 하잖아요. 배고프면 젖 주고, 울면 기저귀 갈아주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야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깨닫게 되고 의지하게 되지요. 하느님과도 마찬가지여요. '하느님이 계시구나.' 하는 확신이 생기려면 먼저 하느님을 알기 위한 시간을 들여야 해요. 확신이 먼저인 게 아니어요.”

  폐암 4기, 기침으로 몹시 힘들어하면서도 늘 미소 짓는 옥이 자매님이 말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지금까지도 많이 힘들게 살았는데, 왜 또 아프기까지 하는지 좀 억울할 때가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옥이씨는 신앙이 없어도 이미 하느님 은총을 누리고 살고 있어요....,, 우리가 겪는 고통이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신앙 안에서 배우고 나면 마음이 낫지요.”

  옥이씨에게 신앙 이야기를 조금 해주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하신다고. 내가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서, 당장이라도 대세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대세나 세례나 효력은 똑 같아요. 대세 받았다가 병이 나으면 정식으로 교리 받아야 해요. 내가 대모 설게요.”

  옥이씨가 지인들이 섭섭하게 할 때가 있다고 했다.

  “맞아요. 주위 사람들이 속상하게 할 때가 있어요.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암에 걸렸냐는 둥, 누구도 세상일에 욕심 부리더니 암에 걸리더라는 둥, 조심성 없이 말할 때가 많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쭐해 할 자격이 있어요. 고통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거니까 우리 ‘달란트’라고 할 수 있어요. 하하. 또 정작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때가 맞는데,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 꺼내지도 못하게 하고,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다그치기만 하면, 참 외롭지요. 외롭게 혼자 준비해야 하잖아요. 정말 혼자 떠나는 길이더라구요.”

  아직 종교를 갖고 싶지 않다는 혜영씨가 말했다.

  “성경을 읽고 있는데, 읽기만 하면 잠이 와요. 구약부터 읽는데, 아무리 읽어도 왜 이스라엘의 역사일 뿐이에요. 우리나라에 단군설화가 있듯이 말이에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이 나를 만나주시는 하느님이에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내보내시기로 하셨어요. 인류 역사에 언제 뛰어들까 가만히 살펴보시다가, 가장 핍박받는 민족을 택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거지요. 이스라엘에게만 오신 게 아니에요.”

  옆에서 듣고 있는 영 언니가 말했다.

  “나도 아무리 애써도 믿음이 생기지 않아. 모르겠어.”

  “하하. 그렇지요? 저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을 익혔지만, 커서 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택하는지 궁금해요. 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은총인 것 같아요. 우리는 단지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보려고 우리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을 하는 거예요. 우리 마음이 다른 일에 바쁘면 신앙이 생길 수가 없어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마음의 주파수를 맞춰보려고 먼저 마음을 먹어야 하고, 이런저런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날 삐~하고 하느님과 소통을 할 수가 있겠지요.”

 

  저녁에 성탄 전야 미사 중계방송이라도 불까 싶어서 평화방송을 켰더니, 묵주기도를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잘되었다 싶어서 묵주를 잡고 누웠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기도에 집중하지 못했다. 하느님께 성탄 선물로 통증을 좀 줄여달라고 청해볼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하느님은 내가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실 테고, 뜻하시는 바가 자주 내 바람과는 달랐기 때문에, 순순히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아빠, 아파서 성탄 선물 드리기로 했는데, 못했네요. 저도 뭐 청하지는 않을게요. 지독하게 아프기는 하지만 이만큼만 아픈 것도 다행이에요. 제가 못다 한 일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 다 내려놓습니다. 아빠께 의탁하니 참 편안해요. 이제 낫고 싶다는 바람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닥칠 모든 일을 주님 뜻으로 여기고 받아들일게요. 앞으로 겪는 고통들을 예수님의 거룩한 수난과 일치시키고 봉헌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제가 주님이 좋으신 분인 줄 잘 알고 있으니 좋으시지요? 헤헤. 앞으로 더한 통증이 생기면 어쩌나 겁이 나는데, 마지막까지 참을만한 통증만 있으면 좋겠어요. 한 가지만요. 저 숨 못 쉬는 건 너무 무섭고 힘들어요.”

  곧 헤어져야 할, 사랑하는 이들이 떠올랐다.

  “앞으로의 고통은 누구를 위해 봉헌할까요? 이번에는 우리 아들들이 우선이에요. 우리 아들, 남편, 가족들, 기도 약속해놓고 잊어버린 분들, 아는 신부님들, 특별히 기도가 필요한 사제들, 환우들,.... 아~~ 저 한 사람의 고통에다 청하는 게 넘 많아서 어쩐대요?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제일 기도가 필요한 분들에게 알아서 써주세요. 특히 우리 아들들 영혼이 잘못 되는 건 정말정말 안 돼요. 아들들 대신 제가 더 많이 아프다 가도 좋아요. 세상을 떠날 때 제가 행여 기도할 여력이 없을 때에라도 제 부탁 기억하시고 제가 겪는 모든 아픔들 다 그들을 위한 기도로 받아주세요.”

  모처럼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다.

  “네 기도가 마음에 든다.”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께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그리움’, 몇 년만에 다시 느껴보는 감정인지. 그런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은 성령께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때문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다. 그리움이 진하면 마음이 아프게 마련이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 듯해서 좋았다. 곧 내가 그리움을 느낄 자격도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죄송스러움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훌쩍거리며 연신 중얼거렸다.

  “나는 이렇게 엉터리인데. 훌쩍.” “나는 두려운데, 훌쩍.”

  고마운 마음이 클수록 더욱 죄송해져서 더 격하게 흐느꼈다.

  “나는 엉터리이고. 흑흑.” “나는 두렵고. 흑흑.”

  성령님의 어루만짐은 얼마나 따뜻한지 곧 편안해졌다.

  옷장 위에 붙어 있는 자비의 예수님 성화에 다가가 용기를 내서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었다. “예수님, 사랑해요.”하고.

 

12월 25일

 

  밤에 아파서 잠을 설쳤더니, 늦잠을 잤다. 내 기도가 마음에 드신다더니만 하느님께서는 눈치 없는 척 더 큰 통증을 주셨다. ‘으째 전능하신 분이 적당히 하실 줄을 모른다니까.‘

  서둘러 미사에 갈 준비를 했다. 하루인가 이틀 전부터 가슴에 좁쌀같은 뾰루지가 났었는데, 하룻밤만에 벌겋게 퍼졌다. ‘왜 이러지?’ 만져보았는데, 따끔거리지 않는 걸로 보아 대상포진은 아닌 것 같았다. 여러 해 전에 안면부 대상포진에 걸려보아서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환우들과 함께 미사에 갔다. 어깨가 아프고 피곤해서 자주 앉아 있었는데, 발진 부위가 따끔따끔 느껴졌다.

  ‘아싸~! 대상포진이구나. 말기암 통증이 아닐 수도 있겠는걸. 천만 다행이다. 72시간 내로 치료를 해야 된다는데 발진이 이틀전부터인지 사흘전부터인지 모르겠다. 급한테 오늘이 일요일이니.’

  미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지금 데리러 와. 내일 병원에 가야 해.’

 

  미사 후에 성당에서 맛있는 시래기 국밥을 주었다. 신부님께서 내시는 점심이라고 했다. 맛이 있었는데, 숨이 명치까지 차올라 조금만 먹었다.

  21일 갔던 병원 선물가게에서 산 핸드폰 가방을 교우 언니들에게 선물했다. “아픈데 이런 것까지 챙겨. 하여간 얼굴은 좋아. 맨날 웃고, 반짝반짝 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웃는 게 병이어요. 그것 때문에 그르치는 일들이 많다니까요. 아프다고 하면서 웃으니까 의사샘이 항암 부작용도 무시해버리고 몸이 망가질 때까지 계속하고.‘

 

  차가 막혀서 저녁에야 집에 도착했다.

  ‘아, 집에 오니 좋다. 한 달도 안 남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대상포진 치료가 잘 되면 남은 시간이 꽤 길 수도 있겠는걸. 음하하하. 좋아좋아.’

  통증이 더 심해졌는데도 웃음이 났다.

  “하느님, 대상포진이 성탄 선물이네요. 선물 마음에 들어요. 어쩌면 이번 정기 검진에서도 큰 탈 없을 것 같아요. 기대해도 되나요?”

 

  아들 자세가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어서 속이 상했다.

  “귀염동! 꼴등이어도 좋다. 자세 좀 바르게 해라. 나중에 허리 아프게 돼. 스트레칭을 자주 해야지. 응?”

 

12월 26일

 

  대상포진 전문병원에 일찍 도착했다. 의사 선생님의 인상이 좋아서 안심이 되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걸리는데, 치료 시기를 놓치면 대상포진 후 신경통이 남습니다. 지금보다 50배, 100배 더 아플 수도 있어요. 겨드랑이까지만 아프면 3번 흉추 신경이 문제가 있는 거고, 팔 안쪽까지 통증이 있었다면 2번 흉추 신경이 문제이지요. ..... 가장 아픈 통증만 인지를 하게 돼요. 보통 어깨가 많이 아프면 겨드랑이랑 다른 쪽도 아픈데도 인지가 안 되구요. 가장 아픈 통증 한 가지만 뇌가 인식을 해요.”

  바로 채혈하고, 엑스레이 찍고, 심전도 하고 통증 검사를 받았다. 채혈할 때는 역시나 혈관을 잘 못 찾아서 한 번 실패하고 다른 간호사가 와서 오른쪽 발등에서 혈관을 찾았다.

  입원실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잠깐 한숨 자고, 신경치료실에서 치료 받았다. 어깨 부위 깊숙이 바늘을 찔러 신경에 주사를 놓는 거라고 했다. 다섯 번쯤 찔렀는데 무지 아팠다. 매일 받아야 하는 치료라고 하고, 퇴원 후에는 주 2회 외래로 치료 받는다고 한다. 이어서 발진 부위에 레이저 치료를 받았다.

  필요한 입원 짐을 남편에게 갖고 오라고 적어주었다. 정맥 주사로 항 바이러스제를 하루 3회 맞아야 했다. 간호사님이 발등 십여 군데를 때려보고 만져보고 알콜을 발랐다. ‘아이고, 한 번에 찔러야 할 텐데.’ 한참 헤맨 끝에 왼쪽 발등에서 한 번에 성공했다. “아빠. 퇴원할 때까지 이 혈관 안 막히게 해주세요. 저 혈관 없잖아요. 넘 아파요.”

  항바이러스제는 오전 6시, 오후 2시, 8시에 맞는다. 한 번 맞는 데에는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걸린다.

  혈관이 자주 막히니까 잘 보고 있어야 하는데, 주사를 맞는 동안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있어서 주사액이 안 들어가고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간호사를 불렀다. 주사액이 다 들어갔는데도 남편은 몰랐다. 내가 비상벨을 눌렀다. 남편을 믿지 못해서 피곤했는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기어이 내가 한 마디 했더니 남편이 편안한 얼굴로 대꾸한다. “다 자네를 위해서 그러지. 성경에 나와 있잖아. 늘 깨어 있으라고. 자네를 깨어있게 하기 위해서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일일이 다 챙겨도 발동이 걸릴까 말까 하는 저이를 두고 죽으면 안 되는데.’

 

12월 27일

 

  열한 시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새벽 두 시에 통증으로 잠이 깼다. 세 시 넘게 누워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휠체어를 타고 간호사실로 나갔다. “저 많이 아픈데 진통제 먹어도 돼요?” 여차저차해서 처방된 진통제를 당겨서 받았다. 빵 한 개를 먹고 진통제를 먹었다. 그런데도 꽤 아파서 다섯 시 반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얼핏 잠이 들었는데, 여섯 시에 항바이러스 주사를 주러 와서 금세 깼다.

  남편이 10시 좀 넘어서 병원에 왔다. 휠체어를 타고 치료실로 가서 두 번째 신경 주사를 맞았다. 의사 선생님이 투시 영상을 보면서 바늘을 꽂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신경뿌리 쪽에 맞는다고 아플 거라고 하셨다. 처방 메모를 보니 8센티 바늘을 꽂는다고 했다. 꽤 긴장을 했는데 겁냈던 것보다는 덜 아팠다. 두 방을 맞았고, 침대에 누워 십 분쯤 안정을 취하는데, 등이 엄청 뻐근했다. 뻐근한 통증이 지나가니, 양쪽 겨드랑이에 좁쌀만한 폭음탄이 수십 개 터지는 것처럼 따끔거리고 가려웠다. 제일 아픈 통증 한 개만 느낀다더니 정말로 느낌이 한 가지씩 차례로 왔다.

  한참 지나니 통증이 훨씬 덜했다.

  오후 2시 주사를 맞는 중에 왼쪽 발등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아팠다. 혈관이 벌써 막힌 거다. 간호사님이 오른쪽 발등에서 다시 혈관을 찾아 바늘을 찔렀다. 속이 좀 상했지만 일은 해야겠다 싶었다. 아프는 일이 내 달란트이고 내 일이니까. 그런데 별 것도 아닌 것 안 들어주신다 싶으니 살짝 삐치고도 싶었다. “이번 고통은? 에이, 몰라 몰라. 필요하면 알아서 쓰시든지 마시든지.”

  문득 요즘 인어가 나오는 티비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인어가 사람이 되어서 비닐봉지를 눈 아래 대고 슬픈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 장면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인어의 눈물은 값나가는 진주가 되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하하. 내가 바친 통증 기도도 인어의 눈물 진주처럼 방울방울 사랑이 되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면 좋겠다.

 

2016.12.28~12.31

 

  나흘 간 병원에 있다가 퇴원했다. 발등에 꽂은 주사는 자꾸 막혀서 결국은 항바이러스제를 약으로 먹었다. 신경주사를 맞아서인지 약 부작용인지 집에 와서도 잠만 잤다.

 

  지난 달부터 몹시 아프니, 99.9% 암 때문에 생긴 통증인 줄로만 알았다. 더 이상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만 여겼다. 지금까지만도 잘 버텼다 싶어서 감사하는 마음만 가지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리얼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난 것이다.

  “주여 나를 샅샅이 보시고, 내 마음을 살펴 주소서. 나를 시험하시고 내 은밀한 생각들을 아시옵소서. 나쁜 길을 걸을세라 보아주시고 영원의 길을 따라 나를 인도하소서.(시편138,23-24)”

 

 

2017년 1월 1일

 

  새해 첫 날,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다. 대상포진 신경치료의 약기운이 떨어져서인지, 눈뜨자마자 어깨 통증이 꽤 심하게 느껴졌다. 숨쉬는 것도 다시 조금 불편해졌다. 미사참례를 못할 만큼의 통증은 아니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에 갔다.

  '새해 첫날인데 어떤 기도를 드릴까.'생각하다가, '통증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이만큼 아픈 채로 지내도 괜찮겠어요.'하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군 생활 중인 아들이 요즘 들어 연락이 없어 걱정하던 참이어서, 아들들, 가족들, 사랑하는 이들이 영육 간에 잘못될 것 같으면, '그 대신' 이라면’, 제가 더 아프는 게 낫겠다고 기도했다. 주님께 새해 첫 날의 제 지향과 고통에 대한 ‘예’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로 받아주시기를 청했다.

  잠시 ‘누구 대신이라면’이라는 가정에 많은 이들을 대입해보았다. “누구누구 대신이라면? ‘예’, 아픈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많은 영혼을 책임질 사제들 대신이라면? ‘예’ 하겠습니다.” .... 진통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만약 나 한 사람의 고통이 거대한 악을 물리치는 데 보탬이 되다면? ‘예’ 해야겠지요.” .... 작년 한 해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는데, 그에 비하면 이왕 겪는 고통에 사랑의 지향을 입혀 기도로 봉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 아빠, 작은 수고에 너무 많은 지향을 바라네요. 고통은 견딜만한 만큼만 허락해주시면 좋겠어요.”

 

  퍼뜩 한 깨달음이 스쳤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리라는 천사의 인사를 받으신 후로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을 예견하셨겠구나.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계획에 '예'하신 것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희생을 선택하신 거였구나. 부족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통증은 갖고 살 수도 있겠다고 기도할 줄 아는데, 성모님께서는 얼마나 순수하고 위대한 사랑으로 한 평생 아드님을 위한 고통을 받아들이셨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라도 우리의 선택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겪게 되실 어려움을 미리 알게 하시고 성모님의 자유로운 응답을 기다리셨을 것이다. 천사가 성모님께 나타나 첫 인사를 하자, 성모님은 ‘곰곰이 생각하셨다.’고 한다.(루카1,29) 성모님께서는 천사의 인사 이후로 줄곧 당신의 “예”가 미칠 영향들을 곰곰이 생각해보셨을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겪게 될 어려움의 크기를 예견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겸손과 사랑으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답하셨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 닥칠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계획에 순명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만삭이 되어서도 험한 길을 떠나셔야 했고, 아기를 낳을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하셨다. 그후로도 계속,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으실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당신께 닥치는 갖은 고통에 ‘예’하셨다. 구세주의 어머니로서의 영광을 꿈꾸며 우쭐해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기셨다. 하느님의 사랑에 당신의 마음과 뜻을 일치시키며 일생동안 ’예‘하셨다. 성모님께서는 예언자 시므온의 말처럼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루카2,35)‘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로 끊임없이 선택하심으로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완수하셨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성모님의 ‘예’의 원천인 큰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드리는 날이다. 새해 첫 날이기도 한 오늘,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마음을 일치시켜 올 한 해 일상에서 겪는 크고 작은 수고를 '사랑을 위해' “예”하고 선택하기로 결심해야겠다.

  성모님의 ‘위대한 예’가 이 세상에 '참빛이신 구세주'를 세상에 오시게 했듯이, 우리들의 ‘작은 예’도 어둠을 밝히는 ‘소중한 빛’이 될 것이다.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저희 가운데 계시나이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17. 1.2 ~ 1.11

 

  내가 고위험군이라 대상포진 치료는 2월 중순까지 할 거라고 했다. 1월 첫 주에 본병원에서 펫시티를 찍었고, 두 번째 주에 진료를 받았다. 검사 결과 갈비뼈로 전이된 게 새로 보인다고 했고, 흉수가 고였다고 했다. 폐전이된 부분은 크기는 커졌는데 FDG 섭취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선방했다고 하셨고, 2차 호르몬 치료를 권하셨다. 삼개월간 먹던 약을 더 먹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만하길 다행이다. 기분이 좋았다. 삼개월간 할 일을 바삐 해야겠다.

 

  하느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고 시험하시는 게 특기인가보다. 나는 이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빼들었을 때까지 느꼈을 긴장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칼을 빼어든 순간까지도 당신의 진짜 뜻은 그것이 아니라고 힌트도 안 주셨을 거야.’

 

  하느님은 왜 우리를 시험하실까?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지 몰라서 알아보시려고? 그건 아닐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지 모르신다고는 하지만, 짐작은 하실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모르신다면 애먼 사람 힘들게 하시면서 잘못된 응답을 얻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하실 리가 없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어떤 사람을 시험하실 때에는 그의 반응이 상당한 범위에서 긍정적일 것이라는 것을 자신하실 때일 것이다. 아니면 여차하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이든가. 마음 약한 하느님은 우리 못지않게 긴장하고 지켜보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오너라.“하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잠깐 동안은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다. (마태14:27-32)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물 위를 끝까지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물위를 걸으라고 명령하신 게 아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서 해보라고 하신 것도 아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거나 물에 빠지거나 간에 그 경험이 베드로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겠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믿음은 굳세어졌을 것이고, 주님의 도우심에 대한 신뢰가 커졌을 것이다.

 

  이번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주어진 상황에 순명하려 애썼고, 내 부족함까지도 주님께 감사드렸다. 나는 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은총을 받아들일 능력조차 없는 사람이라,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천 번도 더 넘어졌을 것이다. 주님의 시험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은총이니, 내가 누린 은총에 감사한다. 주님께서는 때로는 안쓰럽게, 때로는 기특하게 여기시며 나와 함께 계셨음을 안다. 덕분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야고보 5:11)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님의 사랑어린 시험은 계속될 것이다. 얼마나 자주 겁에 질리고, 유혹에 넘어지게 될지 걱정이 되지만, 나는 굳게 믿는다. 주님께서 부족하디 부족한 나와 함께 계시면서, 넘어질세라 지켜보고 돌보신다는 것을.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나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주님, 제게도 물 위를 걸어오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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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