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천식에 00,00,00,.... 나중에는 거의 종합병원이었어요. 임종 전에 폐결핵에 걸려서 기침하고 숨을 못 쉬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간호하는 수녀님들이 안절부절 했어요.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줄 길이 없는 거예요. 그때 벨라뎃다 성녀가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수녀님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벨라뎃다 수녀님이 해야할 일이 뭐에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분은 별 재주가 없었어요. 14살 때 성모님 발현을 처음 목격했는데, 그때까지도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몰랐습니다. 수녀원에 간신히 들어가서 공부를 배워야했는데, 항상 꼴찌였어요. 벨라뎃다 수녀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통을 참는 것>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당신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 이거는 나한테 주어진 일이다. 내가 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또. 워낙 몸이 아프니까 주위에서 처음에는 꾀병인 줄 알았어요. 성모님을 목격했다고 티를 내는구나 싶어서 벨라뎃다 수녀님을 무시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아파도 보통 아픈 상태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수녀님들이 “ 루르드로 가자. 네가 판 기적의 물이 있지 않느냐? 성모님께서 최우선적으로 낫게 해주실 것이다.”하고 권합니다. 그러니 벨라뎃다 성녀가 “그 물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멋져요.
하느님께서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시는 자는 걷는 길이 굉장히 고달프고 험난합니다. 그냥 놔두지 않으세요. 외적인 것을 다 벗겨 냅니다. 하느님이 손수 그 사람에게 재물도 건강도 안 줍니다. 다 벗겨냅니다. 어떻게 보면 잔인하다 할 정도에요. 이걸 보면 참 기쁨은 그런 외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벨라뎃다 성녀는 “성모님께서는 저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해주시시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 하십니다. 저 세상의 행복은 보장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프면서도 기쁜 것입니다. 그분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다 저 세상이 보장되어 있지요.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입적이 다 되었어요. 좀 못 살았어도 그 유산이 상속이 됩니다. 구원을 받았어요. 죄를 지을 수 있지요. 그래도 상관 없어요. 우리는 뉘우치고 성사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리가 보장되어 있으니, 살면서 자랑스럽고 행복해야 되는데 자꾸 딴 데를 쳐다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어떻게 살고 싶을까요? 이건 ‘절대로’입니다. ‘절대로’ 편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편하게 사는 것은 너무 송구스러운 겁니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기 뜻대로 안 살아요. 편하게 안 살아요. 갑돌이가 갑순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갑순이를 이용해서 자기 편하게 하려고 할까요? 그렇다면 가짜이고 기만이지요. 갑순이를 위해서는 돈도 시간도 몸도 아깝지 않고 무슨 일이든 해주고 싶어 합니다. 갑순이를 이용해서 편하게 살려고 하지 않고 갑순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이용해서 좋은 걸 얻어볼까 하고 지내다가, 뜻대로 안 되면 “하느님 믿어도 별 것 아니구나”하고 떠나갑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지난 번 강의에서 ‘멍에’에 말씀드렸습니다. 소 쟁기질할 때 멍에 매잖아요. 이걸 해놓아야 꼼짝 못하고 주인 말을 들어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멍에를 맡기시나요? 속상한 남편을 만나게 한다든지, 집안에 뭐가 있다든지.. 그런 멍에는 “너는 내 뜻대로 살지 말고 하느님 뜻대로 살아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만 믿는다고 갑돌이가 갑순이에게 결혼반지를 해주듯이, 멍에 자체가 총애의 표지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참 힘들어요.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만 마셔보세요. 고생고생하고 있는 내가 너무 자랑스러운 것이에요. 그 사랑을 만나고 느끼기만 해보세요. 맞아도 아프지 않습니다. 나만 두들겨 맞고 있는데도 아프지 않고, 나만 울고 있는데도 크게 슬프지 않습니다. 기뻐요.
그런데 말은 쉽지만 사살 현실적으로는 어렵죠. 인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참고 또 참아도 안 되고, 방금 고해성사 봤는데 또 쳐다보면 속이 뒤집어지고 합니다. 그때에도 겁내거나 화내지 말고 하느님께 맡겨야 됩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저 깊이 들여다보면은 하느님의 섭리가 있는 거예요. 손해나고 힘들다 해도 잘 받아들이면 뭔가가 있습니다.
마태 14장에 빵의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일부러 외딴 곳으로 가셔요. 돈을 주고도 빵을 살 수 없는 곳으로, 그러니 제자들이 외딴 곳이고 군중을 돌려보내 각자 먹을 것을 사게 하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셔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해요.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나와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앞부분을 빼면 ”가진 것이 없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라고 하십니다. 빵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찬미를 드리신 것은 그 빵이면 아주 충분하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감사를 드리셨다고 했어요. 그리고 군중들을 풀밭에 앉게 하고 나누어주라고 하시니, 장정만도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실 때는 이렇게 풍성하셔요.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예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가진 것이 없습니다’하는 제자들의 심리를 ‘결핍의 심리’라고 하고, ‘이것이면 충분하다’는 주님의 심리를 ‘풍요의 심리’라고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심리를 배워야 합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안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안 될 일도 된다고 하면 됩니다. 안 되는 일이지만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매사에 불평 많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노력도 안하고 무조건 안 된다고 부정적으로 판단하여 불평하는데. 이분들은 하나같이 말을 잘해요. 안된다는 논리가 아주 정연합니다. 그러니까 안 됩니다. 빵의 기적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없다. 소용 없다 이렇게 투덜거릴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우리 머리로는 우리 판단으로는, 우리 재주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내가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면 불평이 없습니다. 맡기면 하느님의 몫이 됩니다.
하느님께 맡겨서 잘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천만 다행’입니다. 바라던 일이 안 되었는데 왜 천만다행인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일이 안 되는 배경에는 하느님의 뭔가가 있는 거예요. 그것이 좋은 일이라면 다시 또 시도를 해보고, 다시 또 시도를 해봐야 되는데, 하여튼 그 안에는 다시 시도를 해보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하느님의 무언가가 있든지, 아니면 안 되는 데에는 하여튼 뭔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만다행이라는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신부 되고 싶어서 열심히 기도했네요. 청소년 시절에 매일미사 다니는 아이는 저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저보다 기특한 놈을 보지 못했네요. 그런데 때가 되었을 때 신학교에 시험을 못 봅니다. 소신학교 가고 싶었는데 사범학교에 들어가서 빚을 갚고 나중에 가거라 해서 선생이 됩니다. 선생이 되었다고 광부도 되었다다 수도생활도 했다가 빙 돌아서 신학교에 갔는데, 알고보니 하느님이 깊은 뜻이 있었어요. 제가 원래 성질이 고약합니다. 이마에 다 쓰여져 있지요? 청소년 시절에 가출도 많이 했어요.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서 ‘이놈의 새끼 나가거라’ 하면 나갔습니다. 제가 부모님 말은 잘 들었어요. ㅎㅎ 제가. 수십 번 가출합니다. 부모님이 홧김에 나가라고 한다고 해서 누가 나갑니까? 그런데 저는 그때마다 나갑니다. 대전 사범학교 2학년 때 4.19가 일어났어요. 그때는 서울에 와서 석달 동안 있었어요. 보통은 일주일 나와 있다가 들어가고 들어가고 했는데, 그것도 아버지가 찾으러 와야 돌아가고 내 발로 들어간 적은 없어요. 제가 제 때에 신학교에 갔다면 신학교에서 열두 번도 더 쫓겨났어요. 나중에 알았어요. 제가 선생 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갱 속에 들어가서 탄을 캔 것도 너무 자랑스럽고, 수도생활도 마찬가지였어요. 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초대였습니다. 내가 원해서 했던 것이 아닌데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런저런 고생을 했던 것이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천만다행이구나.’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소록도에서 11년 있었어요. ~~~
평화방송 영성강좌 / 강길웅 신부님 강의 <물이 샘울처럼 -최선을 다하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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