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8일(대림 제4주일) 마태 1,18-24
예수의 탄생은 신적 개입으로 가능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유대 사회에선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성령’의 등장으로 신적 개입은 시작되었다지만, 그 개입의 방법이 처녀의 잉태라는 사실은 인간 역사의 상식과 관습에 정확히 대립되는 것이었다. 물론 마태오 복음은 예언자 이사야의 입으로 선포된 내용을 가지고 와서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면서(이사 7,14) 신적 개입의 정당성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젊은 여인의 잉태’를 말하지만, 마태오 복음은 ‘동정녀의 잉태’를 언급한다. 마태오가 ‘젊은 여인’이라고 기록된 히브리 성경이 아닌 ‘동정녀’로 고쳐 번역한 칠십인역의 이사야서를 인용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처녀의 잉태는 생소하고 거북하며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예수를 메시아로 기다리는 기쁨과 설레임도 중요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신적 개입과 인간 상식의 대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곰곰히 따져 봐야 한다.
신과 인간의 논리가 정확히 대립되는 지점에 요셉이 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의롭다는 건, 유대 사회를 장악한 율법을 정확히 지켜 내는 상태를 가리킨다. 처녀의 잉태가 율법을 거스르기에 요셉은 파혼을 결심한다. 그가 고민한 시간들은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모두 거부하고 부정해야만 가능한 새로운 삶,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은 분명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느님은 상식과 관습 밖에서도 함께하신다는 생각을 하긴 쉽지 않다.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하시는 건, 인간 사회에 익숙한, 그래서 인간들이 의롭다고 판단한 범주의 틀 안에서 함께하시는 것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요셉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받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전적인, 그래서 무모한 해방을 시작하라고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을 다그친다.
대림을 산다는 건, 기다림이 아니라 어쩌면 떠나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다림은 집착이 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메시아를 받아들이기 위해 기존의 나로부터 떠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다듬는 데서 대림은 시작되고 완성된다. 사람이든, 하느님이든 기존 제 삶과 사상과 감정에 매몰되어 다가선다면, 그건 상대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제멋대로 상대를 판단하는 자아도취적 신앙은 상대를 피폐하게 만들며, 스토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을 뛰어넘어 참된 메시아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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