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조명연 신부님

2016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항상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 죽을 날을 안다면

김레지나 2016. 8. 30. 15:21

2016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30년 넘게 안경을 썼습니다. 사실 안경을 쓰지 않았던 초등학생 때에는 안경을 얼마나 쓰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더 잘 생겨 보이고, 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형 누나 몰래 안경을 쓰고는 거울을 쳐다볼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안경을 쓰고 있으니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제게 있어서 제일 불편한 것이 바로 안경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노안까지 와서 썼다 벗었다를 반복해서 그 불편함이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쓰고 있는 안경을 구박했던 적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안경이 제 거대한 몸에 눌려서 안경다리가 쫙 펴져 있더군요. 문득 이 안경이 주인을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의 몸에 눌려서 안경다리가 쫙 펴지는 고통을 겪게 되었고, 제대로 닦아주지 않아서 늘 뿌연 안경알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불만이 많았을까요? 그래서 안경을 깨끗이 목욕시켜 주었습니다. 비누로 깨끗하게 안경을 닦아 주고, 구석구석 까맣게 낀 때도 제거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목욕하면 기분이 좋은 것처럼, 안경도 기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끗하게 닦은 안경을 쓰는 순간, 세상이 너무나 깨끗하게 투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동안 안경에게 수고했다고 했던 보상이었는데 혜택은 제가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이 세상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을 위한 행동과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남을 위한 행동과 말이 나의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보지 못하고 그저 남만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 힘들어하고 때로는 아파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이 모두 충실하고 동시에 슬기로운 종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죽을 날을 안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남은 시간을 잘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바로 항상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구원의 열매를 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노력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남을 위한 말과 행동을 통해서만이 구원으로 연결될 것이며, 이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이 바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주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의 내 말과 행동이 나의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나무가 나무를 만나 숲을 이루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세상을 이룬다. 삶은 인연의 연속이다(장영섭).

처음처럼


‘처음’, ‘첫’이라는 단어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설마 ‘소주’가 생각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무튼 ‘처음처럼’, ‘첫날’, ‘첫사랑’, ‘첫걸음’ 등의 단어를 떠올리면 설렘도 생기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누구나 ‘처음’, ‘첫’으로 시작되는 단어를 말과 몸으로 느끼고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설렘을 가져다주면서 기분을 좋게 하는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나 봅니다. 그래서 신입을 잘 뽑지 않는다고 하지요. 심지어 아르바이트도 경력자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인광고에 늘 이렇게 적혀 있지 않습니까?

‘경력자 우대’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툰 것이 당연한데, 그리고 이 처음을 겪어야 그 다음이 있을 텐데, 이 사회는 처음에 대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처음을 너그럽게 봐주고 응원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모습을 바로 우리들 각자가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빠다킹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