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조명연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주님과 친해지기

김레지나 2016. 6. 15. 10:05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신학생 때 제가 다니던 본당에는 아주 괴팍한 형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본당에서 봉사활동은 아주 열심히 하셨지만, 별 것도 아닌 것에도 화를 얼마나 내시던지 사람들이 슬금슬금 그 앞을 피하곤 했었지요. 한 번은 본당 바자회 때에 한 청년이 서빙을 하다가 이 형제님과 부딪혀서 음식을 쏟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공손하게 사과의 말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님께서는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혼을 내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제가 갑곶성지에 있을 때 이 형제님을 여기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워낙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오셨었기 때문에 성지 안이 상당히 복잡했었지요. 이렇게 복잡하다보니 커피를 나르다가 어떤 형제님과 부딪혔는데 바로 문제의 형제님이신 것입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화를 내셨을까요? 안 내셨을까요? 자그마한 부딪힘에도 화를 내시던 형제님이신데, 커피 물을 쏟은 제게 어떻게 하셨을까요?

저는 곧바로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깊은 사과를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신부인 저인 것을 확인하시고는 화내기보다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신부님. 커피 묻은 옷은 빨면 되니까 아무런 문제없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화를 내시지 않았을까요? 그 동안 성격이 바뀐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 자신에게 불편함을 준 사람이 ‘신부’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부에게는 차마 평소의 모습을 보이면서 화를 내기 힘들었던 것이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주님을 향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숨을 받아 창조된 것을 떠올린다면, 각자의 모습 안에는 하느님의 속성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바로 또 다른 하느님께 행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감히 미워할 수도, 판단할 수도, 또 단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모습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도 아닌, 내 구원의 결정적 열쇠를 맡고 계시는 주님께 하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선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의 적극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선을 행하는 것은 분명히 옳습니다. 그런데 자선을 할 때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말라고 하시지요. 즉, 인간의 찬사를 추구하면 사람들에게서 얻고자 하는 보상만을 받을 뿐인 것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자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행에서 우리는 감추어져야 하고, 대신 하느님께서 드러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실 수 있도록 생활한다면 나의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부정적 모습보다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나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의 구원은 더욱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내 꿈이 아무리 커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이다. 마법은 작은 걸음 속에 숨어 있다(김택진).

 
주님과 친해지기

지금 인천교구 사제들은 강화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 가톨릭 대학교에서 연수중입니다. 사목활동에 도움이 되는 강의를 들으면서 동시에 오랜만에 반가운 신부님들을 만나면서 좋은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체험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윗옷을 바지 속에 넣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좀 나오다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은 몸매(?)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윗옷을 바지 밖으로 빼놓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 윗옷이 기능성 옷이라 몸에 달라붙어서 몸매를 더욱 더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글쎄 이 상황을 가지고서 10분 이상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별 것도 아닌 상황,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서로 친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저와 친한 동창 신부와의 관계를 떠올립니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하는데 참 길게 통화하는데, 아무리 못해도 30분 이상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면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바로 친하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도 화제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오랫동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기도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냐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지요. 그런데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맞습니다. 아직 하느님과 친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쉽게 주님께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