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자비의 사도이신 파우스티나 성녀의 일기 원본 책이 있어요. 시중에서 팔지는 않고 따로 오데로 연락해서 구해야 볼 수 있었어요. 보통 책의 네 권쯤을 합쳐놓은 분량의 두꺼운 책이지요.
(찾아보니 가톨릭 출판사에서 판매하네요. 원가 이하로 파시는 듯..^^ 7200원입니당.)
2006년쯤엔가 뭣도 모르면서 빠져들어 읽었었는데, 지금은 그 내용이 99.9999% 기억나지 않아요. 딱 한 가지 빼놓고는요.
파우스티나 수녀님이 예수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기록하셨어요. 각 대화나 일화 앞에 번호가 적혀 있는데, 순서가 약간 흐트러졌다고 해요. 그 이유는 어느 날 천사가 수녀님에게 나타나서 그간 적었던 일기를 불에 태우라고 시켜서 수녀님이 정말로 애써 적은 것들을 다 태워버리셨기 때문이어요. 다음날인가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님에게 나타나셔서 악마가 천사인 양 가장하고 나타나서 일기를 태우라고 했던 거라고 알려주셔요. 수녀님은 그래서 기억에 의존해서 일기를 다시 기록해야 했어요. 글의 순서가 살짝 엉망이 되었겠지요.
저는 그 부분을 읽고 굉장히 의아했어요.
‘악마가 천사 흉내를 진짜처럼 내기도 하는구나.’
‘거의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셨던 수녀님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셨구나.’
‘ 왜 예수님은 그 많은 분량의 일기를 불에 태울 때까지 수녀님에게 귀뜸을 해주지 않으셨을까? 다시 쓰는 수고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제가 오랫동안 배워서 내린 답은 이거에요.
‘악마나 마귀는 천사나 선한 존재처럼 우리를 속여서 괴롭힐 수 있다. 좋은 일을 하라고 그럴 듯한 말로 속삭이지만, 실은 우리의 시간과 수고를 빼앗거나, 관계를 망가뜨리거나, 영혼을 교만에 빠트리려는 속임수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분별을 하려고 애쓰고, 분별의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특히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악마는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들을 방해하려 들겠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 성령의 위로를 체험한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자기가 보는 것,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되는 말씀들. 그 모든 100번의 체험들이 진짜 빛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그중 한두 번은 어둠에서 온 것들이 섞여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성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불순물이 섞여 있을 때에는 어둠이 그 사람에게 자기를 빛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 쉬워진다.’
‘내 생각와 느낌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되이 분별의 지혜를 청할 일이되, 아무리 애써도 분별할 수 없다면, 일단 ’순명‘해야 한다. 파우스티나 수녀님이 생각하실 때, ’내가 만난 예수님의 말씀을 적은 건데, 왜 태우라고 하지?‘라고 순명 못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우스티나 수녀님은 악마가 아니라 천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 큰 수고를 들여 적은 일기를 순명하는 마음으로 태워버리셨다. 분별을 잘 못하셨을지 모르나,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순명은 그 실수에 비해 값지고 값진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장상의 명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치가 적용된다. 아무리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여겨지더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손해가 크더라도, 일단 순명해야 한다. 거룩한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마지막 단계가 ’순명‘이다. 그만큼 어려운 덕이다.’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님에게 미리 귀뜸해주지 않으신 이유는 수녀님과 일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하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
매일 예수님을 만났던 파우스티나 수녀님도 천사인 양하는 악마를 알아차리지 못하셨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했듯이, 우리 생각에는 성령체험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어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일단은 의심하고, 특히 우리와 이웃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체험들은 다 무시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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