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만 읽는 것은 읽지 않은 것과 같다.
다산 정약용은 “책을 그저 눈으로만 읽는다면 천 번 백 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똑같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영상도 눈으로만 본다면 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이미지도 소리도 텍스트도 모두 그 의미를 해석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수많은 정보 속에 묻혀 살면서도 그저 보이니까 볼뿐 그 어떤 정보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비추어주지 못한다면, 스스로 문맹인임을 자초하는 것이다.
앨빈 토플러는 현대의 문맹인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고 정보를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했고,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은 읽을 수 있지만 읽지 않는 문맹인”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는 더욱 많고 의미는 더욱 적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보가 넘치다 못해 익사할 지경이다.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정보의 파도를 타고 넘나들면서 눈으로 보기에도 바쁘다. 게다가 진짜보다 더 리얼한 이미지들이 현란하게 몰려오고 이러한 텍스트를 담아내는 다기능 디지털기기의 변화 속도는 도저히 따라갈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고 읽어내지 않는 문맹인이 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어린아이가 책을 가지고 놀아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듯, 우리도 분주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즐기지만 아쉽게도 딱 거기까지가 아닐까 싶다.
내가 무언가를 보고 기억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의미와 무의미의 차이는 있음과 없음의 차이처럼 매우 넓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읽고 본다는 것은 단순히 읽는 행위가 아니라 지각을 통해 인지하는 의미해석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무언가를 지각하는 정신 속에는 해석하도록 자극을 받고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워싱턴대학 신경과학자들 연구팀에 의하면 의미 없이 사물을 보았을 때 뇌의 반응을 보면 후두엽 시각영역 중 일부만 활성화된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것이라도 의미 있게 해석하게 되면 뇌의 새로운 경로가 열린다는 것이다. 유의미하게 읽어내는 순간, 뇌 신경세포의 활동이 두 배 혹은 세 배까지 증가한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지각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정신세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하지 않는가? 매일 보고 들은 것을 생각하고 의식차원까지 끌어올려 의미를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지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그저 보고 듣기만 하고 마음 속 의미체계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떠한 삶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니체는 “사실이란 것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 내가 읽고 해석하는 세상이 진실이 된다. 그러니 내가 얼마큼 의미 있게 읽어낼 수 있느냐에 따라 세상도 꼭 그만큼 열리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매일 진실한 세상과 만나고는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전철에서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문자와 이미지와 사운드를 접하고 있는 사람들, 혹시 눈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의 무의식적 즐거움에 빠져 살아가노라면, 어느 순간 의미 잃고 방황하는 문맹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된다.
김용은 제오르지아 수녀(살레시오수녀회)는 미국 뉴욕대(NYU) 대학원에서 미디어생태학(Media Ecology)을 전공하고, 버클리 신학대학원(GTU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살레시오영성센터(ISS)에서 살레시오 영성을 수학했다. 현재 부산 ‘살레시오 영성의 집’ 관장을 맡고 있다.
[이세상 책세상] (22) e세상 리터러시
방황하는 현대의 문맹인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
해석 없이 그저 바라만 보면
어떤 정보도 의미도 못느껴
해석 없이 그저 바라만 보면
어떤 정보도 의미도 못느껴
발행일 : 2014-12-25 [제2924호, 8면]
김용은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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