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를 한 그룹과 성찰시간을 가진 그룹을 번갈아 오가며 그들 분위기를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침묵 중에 성찰하고 대화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학생들의 얼굴에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내면 깊이 내려가 자신을 만나고 아파하며 슬퍼했던 젊은이들이 오히려 더 평온했고 행복해 보였다. 노래를 부르고 신 나게 춤을 추고 나온 젊은이들도 물론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내면 깊숙이 들어갔다 나온 이들의 기쁨과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주어진 즐거움은 분명 달라 보였다. 노래와 춤이 있고 돈과 명예가 있어 잠깐 즐거울 수는 있다. 동시에 그 어떤 화려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분명 존재한다. 행복은 그 어떤 외부적인 자극과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지각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움직이는 ‘마음’의 파동에 있지 않을까 싶다.
책 읽기에는 지각능력이라는 것이 있다. 그저 보고 듣는 감각차원이 아닌 전체상황을 파악하여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깨닫는 능력이다. 율곡 이이는 마음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지각’이라고 했다. 어떠한 외부 자극에 대하여 의식하는 것이 마음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지각은 들으면서 핵심을 찾고, 읽으면서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정리하고 감정으로 반응한다. 그러므로 책 읽기는 지식의 곳간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감정이 반응하고 마음이 움직여 삶의 토대로 이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같은 강의, 같은 책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커다란 깨우침을 얻지만 어떤 사람은 알아듣지 못해 지루해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같은 하늘아래 산다하여 똑같은 세상을 산다 할 수 없다. 이것이 동일한 사건 앞에서 마음의 움직임이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세월호 침몰사건에 대한 소식을 어떻게 듣고 지각하였을까? 이들에게 이 사고가 신문이나 텔레비전 속에 갇힌 그냥 ‘뉴스’였을까? 아니면 굳이 축제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 애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나름의 확신이 있어서일까? 혹은 언론매체에 의하여 거의 매일 쏟아지는 잔혹한 사건과 재난소식이 이들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을까?
분명한 것은 지각한다는 것은 책이나 뉴스를 많이 듣고 보아 아는 지식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각능력은 감각과 경험이 만나 의미 있게 인식하고 멈춰 성찰하고 반성하는 토대가 된다. 지각된 세상에서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며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참된 경험은 지각의 경험”이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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